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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형 Jun 22. 2022

_야간산행-2

: 첫번째 이야기.




: a-1.

   여기에 서있으면 이상하게도 늘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곳은 내게 특별한 사연이 있었거나 어떤 의미가 있는 장소가 아니다. 나는 그저 작은 표 한 장을 손에 쥔 채 곧 도착할 열차를 기다릴 뿐이다. 사실 열차가 도착한다고 해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를 맞이해주는 것도 아니고 나 역시 누군가를 기다리던 것도 아니다. 열차에는 그저 내가 잠시 머물다갈 빈자리 하나만이 나를 반겨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홀로 있는 5분내지 10분의 짧은 시간동안에도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단순히 오랜만에 여행을 떠나는데서 오는 설렘을 너머 그냥 순수하게 이곳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만 여기저기를 서성거리며 사소한 풍경도 열심히 쳐다보고 보잘것없는 익숙한 물건에도 공연히 의미를 부여해본다.      


   지금 생각건대 그것은 아마도 정거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문학작품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마치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이 장소에 있는 것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즐거운 사건처럼 느껴진다. 소설 속 인물에 이입하여 왠지 오늘 하루는 무언가 새로운 사건이 발생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화 비포선라이즈에서 낭만적인 만남과 떠남이 이루어지는 두근거림과 애틋함의 공간,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비극의 시작이자 잔혹한 죽음으로 귀결되는 공간, 해리포터나 매트릭스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독립된 형태의 비밀스러운 공간 등 정거장은 누구나 잠시 머물다가는 곳이라는 공간적 특성 하나만으로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다양한 사건들의 무대로써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그리고 그 상상력으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지금의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이곳에 홀로 서있다. 

   이리저리 서성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철로의 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천장아래 줄지어 매달려있는 형광등에 시선이 멈추었다. 형광등은 등의 끝과 끝이 서로 맞닿을 만큼 촘촘하게 매달려 있었는데 그 형태가 마치 빛나는 열차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다란 정거장을 따라 저 멀리까지 이어진 빛의 선형 아래에는 시커먼 철로가 어둠 속에서도 눈앞에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꽤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보낸 듯한 육중한 철로 주위에는 출신을 알 수없는 모난 돌들이 잔뜩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거대한 콘크리트건물이 수많은 기둥들을 짓밟고 굳건하게 서있었다. 그 탓에 모난 돌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대로 된 물세례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일어나는 온갖 먼지들만 뒤집어쓴 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평생을 물과 바람에 맞서고, 때로는 서로 부딪치고 깨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을 텐데 이제는 박제된 동물처럼 한자리에 틀어박혀 옴짝달싹 못하게 된 것이다.

   시간의 궤도에서 벗어나 영원을 얻은 대가로 변화와 소멸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사뭇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가만히 바라보며 그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들이니 저 먼 곳에서 여기까지 가져온 것 아니겠냐는 심심한 위로를 전할 뿐이었다. 어쩌면 철로를 관리하다가 잠깐 지루해진 철도원 손에 운 좋게 잡혀서 어딘가로 날아갈 기회를 얻는 것만이 그들이 다시 시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싶었다.  



   

: A.

   밤 열한시가 넘은 늦은 시간임에도 이곳은 열차에 탑승하려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면서 오히려 점점 북적이고 있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이 열차는 앞으로 약 세시간반 정도를 달려서 태백역에 도착한다. 역 앞에는 늘 그렇듯 막차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로 가득 차있다. 서두를 것 없는 나는 먼저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서 얼어있던 몸을 녹인다. 행여나 놓고 온 것은 없는지, 더 필요한 게 있지는 않은지 진열대를 찬찬히 구경하면서 여전히 잠에 취해 굼적거리는 몸과 마음을 깨워본다. 따뜻한 음료를 한잔 마시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어느덧 몸에 혈기가 돌고 기운이 넉넉해지면 밖으로 나가 아까부터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를 탄다. 새벽 세시를 넘긴 도로는 텅텅 비어있다. 그렇게 찬 공기를 가르며 20여분 남짓을 달리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인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게 된다. 등산에 앞서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그동안 잠에 익숙해져있던 몸을 이완시킨다. 스트레칭이 끝나면 야간산행을 위해 가져온 장비를 착용하고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는지 살핀다. 그렇게 채비를 마치면 그동안 나를 반겨주었던 가로등을 뒤로한 채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첫걸음을 내딛는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깊은 밤을 담은 진한 산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해가 뜨기까지는 앞으로 세 시간정도 남아있고 나는 그동안 정상을 향해 오른다. 내가 걸어야할 길은 깊은 적막 속에 하얀 눈과 까만 밤이 마구 뒤섞여있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보면 겨울명소로 유명한 주목군락지가 나온다. 그때부터 산등성이를 타기 시작하면서 혹독한 추위와 함께 매서운 바람이 사방에서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한다. 식어가는 몸을 웅크리며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보면 어느덧 정상 부근에 도달하게 된다. 주변은 여전히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내가 정확히 어디쯤에서 서성이고 있는 건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오직 모든 것을 발갛게 물들일 작은 해를 기다린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한 찰나의 순간 단조로운 하늘에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짙은 어둠을 몰아내고 장엄한 풍경이 드러나면서 거친 바람소리도 잠잠하게 만들 붉은 물결은 격렬한 색의 파동을 일으킨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곱게 이는 붉은빛의 물비늘들은 일렁이던 나의 마음을 고요하고 아늑하게 만들어준다. 그것은 얼어있던 눈을 녹이는 아침햇살의 따스함 같은 것이어서 나는 쉬이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한참을 서있었다.     




: a-2.

   사람이 충분히 모여들었다 싶을 때쯤 열차가 정거장에 도착했다. 영화나 문학작품에서 여행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던 열차 특유의 경적소리나 엄청난 추진력을 상징하는 새하얀 수증기는 당연히 없었다. 두툼한 철판의 이음매를 그대로 드러내던 투박한 얼굴도 이제는 푸르스름한 광택이 반짝이는 유선형의 매끈한 곡선으로 대체되었다. 다만 기다랗고 큼지막한 창이 주는 인상과 커다란 철문을 올라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하며 내 자리를 찾아가는 일종의 시퀀스는 여전했기에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며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별다를 게 없는 평범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비어있던 자리들은 금세 각각의 얼굴들로 채워졌다. 미리 자리를 예매하지 않으면 표를 구할 수 없었기에 탑승객이 많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니 기분이 묘했다. 내게는 이 시간에 열차 안에 있는 날이 살면서 손에 꼽힐 만큼 특별한 날인데 이 사람들도 나와 같은지, 아니면 내가 그동안 상상하지 못했던 이들만의 일상이 있었던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알람시간이 되면 알람 벨이 울리듯 어디선가 열차 승무원이 등장했다. 그들은 자신의 가지런한 옷매무새를 바로잡듯이 열차내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하나하나 정리해나갔다. 열차는 곧 출발했다. 시계의 태엽바퀴라도 달고 있는 것인지 정시에 정거장에 도착한 열차는 정시에 출발했다. 창가좌석을 예매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의 풍경들이 마치 썰매를 타고 내려가면서 바라보는 것처럼 스르르 흘러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차가웠던 몸에 온기가 돌면서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노곤한 하품이 연신 흘러나왔다.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자정을 가리키며 하루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하던 일을 정리하고 자리에 누울 시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궤적을 살짝 비틀었던 나의 하루는 오히려 새롭게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주위를 둘러보니 이것은 나뿐 만은 아니듯 했다.     

    

   정거장에 도착했는지 어수선한 분위기에 단잠에서 깨었다. 객실에는 이제 막 열차에 올라타서 자리를 잡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변한 것은 없었다. 꺼질 줄 알았던 객실 내 조명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내 곧 열차는 출발하였고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까 전에 본 것 같던 풍경들이 계속해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잠에서 깬 나는 다시 잠들지 못했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딱히 할 게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싶지는 않았고 음악으로 주변과 나를 떨어뜨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아까부터 창밖을 구경하는 것이 지루했던 나는 그냥 가만히 앞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기로 했다. 머리와 마음을 비우니 어디선가 꾸준히 소곤대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 옆에 앉아있는 연인 혹은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소리, 그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소란한 일상과 여행의 흥겨움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마치 내가 극장에서 새로운 형태의 현대극 한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열차가 정거장을 지나칠 때마다 배역을 교체하듯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바뀌면서 새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난 열차 승무원은 새로운 막의 시작을 알리려는 듯 어수선한 장내를 단박에 정리하고는 말없이 목례만을 남기고 또다시 어딘가로 사라졌다.

   정거장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열차는 다시 속력을 내며 달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새로운 막이 올랐다. 사람들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다. 지루하기만 했던 창밖의 풍경도 이번에는 하나의 무대가 되어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도시의 불빛들이 아른아른 춤을 추며 겨울밤의 아련함과 세련됨을 감각적으로 드러내다가도 어느새 깊은 숲속으로 장면이 전환되면서 짙은 어둠과 적막함으로 창밖을 가득 채우면 괜스레 외롭고 적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기묘한 감응을 즐기다가 문득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보통 극장에 있으면 밖이 환하고 내부가 어둡기 마련인데 지금은 밖이 어둡고 내부가 환하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마치 내가 무대 또는 스크린 안에 직접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혹은 화장실을 가기위해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괜히 망설여졌다. 뿐만 아니라 나도 뭔가 제 역할을 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괜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옆 사람을 힐끔거리며 무언가 할 거리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그러나 연신 고개를 떨어뜨리며 졸고 있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면서 한바탕 기이한 연극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 a-3.

   정거장에 열차가 진입하자 하차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객실 내는 다시 한 번 어수선해졌다. 이번에는 나도 동참하여 혹시 놓고 가는 것은 없는지 이리저리 살피며 번잡함을 더했다. 그러다가 괜히 아까 궁금했던 소리의 주인공들이 누구였는지 살그미 눈을 굴리며 살펴보았다. 별다른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몇몇의 사람들과 마주했을 때는 괜히 기분이 묘했다.

   열차가 완전히 정지하고 사람들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문 옆에는 아까 보았던 열차 승무원이 어느새 먼저 나와 손님을 맞이하며 서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열차에 탑승해 있으면서 한번은 헝클어질 법도 한 유니폼은 여전히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또다시 열릴 새로운 막의 시작을 알리려고 준비한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잠깐 웃음이 새어나왔다. 떠들썩했던 분위기도 잠시, 열차가 떠난 정거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시계를 보니 열차는 이번에도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오랜 시간을 열차 안에 있어서인지 차가운 새벽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고 나는 잠시 이 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차가운 공기를 털어내고 색이 바랜 벤치에 살포시 앉았다. 정면에는 의식하지 않고 있었던 기차역이 떡하니 서있었다. 박공지붕을 얹은 아담한 크기의 수수한 역사를 기대했던 나는 커다란 네모꼴의 별다른 특징 없이 무던하게 생긴 모습에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풍경이 사뭇 지루하여 금세  뒤로 돌아 앉았다. 건너편에는 언덕을 등진 키 큰 나무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와스스와스스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 소리가 이곳의 적적한 분위기를 조금은 달래고 있었다. 문득 새벽하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붕이 없는 정거장 끝을 향해 걸어갔다. 구름 없이 청명한 하늘에는 새벽 별빛만이 반득였고 저 멀리 산등성이 너머에는 말간 달이 덩그러니 놓인 채 홀로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을 가만히 서서 감상하고 있으니 아까 보았던 기차역 지붕위에서 역의 이름을 애써 비추고 있던 네온 빛이 사뭇 우울하고 몽롱하게 느껴졌다. 

   곧게 뻗은 철로를 따라 들바람이 불어오면서 나 홀로 남아있던 정류장에도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차가운 공기가 내 몸을 고이 감싸고돌면서 정신도 깨고 몸도 좀 으스스해졌다. 떠나야하는 순간이 온 것일까. 나는 벤치위에 내려놓았던 배낭을 다시 메고는 정거장을 얼른 빠져나왔다.




: a-4.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새벽의 한기가 품속을 매섭게 파고든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는 드문드문 서있는 가로등만이 어둠 속에서 도로를 밝게 비추고 있다. 그 사이를 거침없이 질주하던 택시는 열기를 식히려는 듯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전경 속에서 샛노란 택시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래서인지 가로등이 침침해 보일만큼 택시의 전조등도 더욱더 밝아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오늘 하루의 마지막 손님이었는지 택시는 곧바로 떠나지는 않았다. 나는 이 시간에 산골짜기 한 가운데에서 정차한 것이 약간 미안해졌다. 그래도 이곳에서 하루를 마친 택시 덕분에 나는 이곳에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고마움에 택시가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무언의 배웅인사를 건네기로 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택시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있었다. 잠시 후 이제야 갈 길을 결정한 듯 택시는 다시 한 번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과는 달리 약간의 망설임도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같은 자리에 묵묵히 서있었다. 어둠을 가로지르는 택시의 뒷모습은 생각보다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도로 위에도 무겁게 깔려있는 탓인가 싶었다.


   택시를 떠나보내고 나니 이곳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그 사실이 문득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아까 열차에서 내릴 때 다른 차량에서 우르르 내리던 한 무리의 등산객들의 알록달록한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내심 그들과 같이 왁자지껄한 산행을 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다. 눈 덮인 적막한 산과 은은하게 비추는 교교한 겨울 달빛, 그 아래에서 차가운 새벽공기와 함께 사색과 풍경을 음미하며 천천히 산을 오르려던 나의 판타지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나는 이제야 발걸음을 옮겼다.


   지도를 볼 것도 없이 밝은 빛이 새어나오는 곳이 바로 등산로의 시작점이었다. 눈과 얼음이 뒤덮인 아스팔트를 걸을 때마다 사각사각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가 반복될수록 내가 가야 할 길은 더 명확해지고 있었다.     



                                         

: B.

   롤러코스터는 단 한 번의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는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 가장 고점이 되는 곳을 향해 천천히 올라간다. 이때 바퀴와 레일사이에서 들려오는 덜커덩덜커덩 소리는 긴장감을 서서히 높여가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눈앞에는 푸르른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구름 한 덩이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구름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가 싶더니 어느 한순간 놀이공원의 전경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다. 수목이 우거진 산허리의 부드러운 곡선과 우뚝 솟아있는 알록달록한 놀이기구들, 그 사이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이 바람 부는 해변가의 모래알처럼 자연스럽게 여기저기로 흩날리고 있다. 생경한 풍경에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도 잠시, 어디선가 ‘철컹’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있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고요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그 찰나적 순간이 지나고 나면 막혀있던 강줄기가 터져 나오듯 폭발적인 에너지와 함께 나는 손쓸 틈도 없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몇 걸음 앞에 존재하는 하나의 공간(혹은 풍경 또는 모습)이 방금 전까지 내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을, 그러니까 파란하늘과 하얀 구름, 초록빛 수목과 알록달록한 놀이기구들, 모래알처럼 흩날리는 사람들과 이들이 내는 아우성까지도 거대한 기계가 내는 마찰음과 마구 뒤섞인 채 통째로 집어삼켜버린다. 




: a-5.

    "이제 더 이상의 빛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내 앞에 기우뚱 서있는 마지막 가로등이 등산로 안내도를 밝게 비추며 나에게 말을 건넨다. 과연 그 뒤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새카만 어둠만이 그득했고 그 공간은 이미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에 주저하면서도 동시에 흥미로워했다. 그 곳은 내가 그동안 기대하고 상상하며 기다렸던 길이기도 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여행의 출발점에 섰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준비해온 장비를 갖추고 옷깃을 단단히 여미는 동안에도 긴장감이 더해지면서 점점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어디에서도 ‘철컹’하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다만 오직 매서운 바람만이 나의 등을 떠밀 듯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다.

    모든 것은 내 계획대로였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첫발을 내딛었다. 마지막 가로등의 밝은 빛이 잠깐 머리위로 쏟아지더니 얼마 후에는 나를 좇던 그림자가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사라져가는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문득 지금까지 나를 비추던 빛들이 생각났다. 정거장의 줄지어서있던 형광등의 번지는 듯한 주백색 불빛과 열차 안에서 꺼질 줄 모르고 반짝이는 LED의 백색 불빛, 어둠속 숨겨진 풍경을 은밀하게 드러내던 노란색 혹은 파란색의 가로등 불빛들. 이 수많은 불빛들을 지나고 나서야 나는 어둠 속으로 향하게 되었다.

    초입을 약간 지났을 뿐인데도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인해 등산로는 꽝꽝 얼어있었다. 날카로운 아이젠이 얼음을 내딛을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홀로 걷는 일이 낯선 경험은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뭔가 기분이 묘했다. 마치 눈을 감고 걷고 있는데 앞이 보이는 기분이랄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소리도 멀게만 느껴졌고 온몸을 할퀴던 추위도 무던하게 느껴졌다. 졸리고 피곤하다고 하기에는 다리에 힘이 넘쳤고 정신은 산 공기의 청명함만큼이나 또렷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별다른 생각 없이 한참을 걷고 있던 중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산짐승을 만나거나 귀신과 같은 존재를 상상하면서 떠올리는 공포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계획이 틀어지거나 길을 잃어버릴 때면 마주하던 막막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근원적인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아주 익숙하면서도 쉽사리 떨쳐내지 못했던, 오랫동안 걸어온 나의 지난 시간들은 물론 앞으로 다가올 시간마저 관통하는 그런 것이었다.    



                          

: 현실.

   나에게 두려움은 지독한 모순이다. 나는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늘 새로운 것을 두려워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그랬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늘 겁이 많은 편이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지금까지 내가 해보지 않은 그 모든 것 앞에서 나는 늘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에 떨어왔다. 물론 처음은 누구에게나 다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새로운 것을 대하는데 있어 더 어려워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사소한 일, 심지어 물건을 사기 위해 처음 보는 가게로 들어가는 것조차 나에게는 어느 정도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제일 어려웠던 것은 처음 만나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었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왁자지껄한 학기 초 분위기는 내게 늘 낯설고 어려웠다. 그 안에서 나는 매번 굳게 입을 다문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신하게 앉아있었다. 학교 생활기록부에서부터 사소한 성격 테스트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나를 설명하는 단어에는 내향적이라는 표현이 꼭 들어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었거나 친구를 사귀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여전히 내게 두렵고 불안한 일이었다.

    살아가면서 늘 괴롭고 불편했던 두려움이었기에 나는 대책을 마련해야만했다. 고심 끝에 내가 고안해낸 방법은 새로운 사람과 마주하거나 혹은 새로운 어떤 것을 시도하기에 앞서 철저하게 계획하는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 늘 미리미리 신중하게 고민하는 습관을 들여왔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맞닥뜨려 용기를 내야할 순간을 위해 충분히 알아보고 준비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언제나 날 적잖이 당황하게 했고 종종 어처구니없이 일을 그르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이러한 불안이 지금의 나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단지 남들에게 나의 불안한 마음상태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해왔던 나의 노력들이 결과적으로 내가 도전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어느덧 사람들은 나를 새로운 일과 만남을 부담스러워하는 소극적인 사람이 아니라 진취적이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새로움은 아직도 나를 긴장시키고 불안해하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두렵고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피하거나 도망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도전하고자 했던 새로움에 대해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나아가고 작은 것부터 해보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자신에 대해 혹은 내가 가졌던 생각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내가 늘 갈망하는 새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의 생각을 설득시키거나 공감을 얻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어서이다. 그것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으며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거나 혹은 적어도 인지 할 수는 있으며 그것이 비록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개인적으로 삶이란 어딘가를 향해 걷는 것이라는 표현을 좋아하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우연히 마주친다. 마치 핀볼게임처럼 한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정면으로 부딪치기도 하고 교차하기도 한다. 이러한 만남, 그 순간을 우리는 인연이라고 부르며 이 점들은 일정한 선(線)을 그리려는 삶의 그래프에서 변곡점이 된다. 이 점들 덕분에 우리의 삶은 이리저리 요동친다. 발걸음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하며 그러다가 또 다른 인연을 통해 새로운 방향으로 접어들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만남, 인연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고 이를 우정 또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우정과 사랑이란 각자의 관점에서 관계 맺기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의미하는데 우리는 우정과 사랑을 통해 삶이라는 고독하고 쓸쓸한 끝없는 반복의 과정을 즐겁고 가치 있는 것으로 변화시켜나간다. 그렇게 기억된 추억들은 우리가 계속 살아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큰 힘이 된다. 어쩌면 우리가 처음 겪는 이 모든 두려운 것들은 결국 이상적인 형태의 우정과 사랑이라는 삶의 원동력을 얻기 위한 질량이 되며 이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의지와 욕망에 의해서 우리들이 목표를 향해 힘껏 발걸음을 내딛으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a-6.

    정상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여전히 새카만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얼굴이라기보다는 마치 말레비치의 회화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검은 사각형>을 연상케 할 만큼 어떤 절대적인 무(無)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시야를 가릴 것이 없는 탁 트인 정상부에 올라왔음에도 달빛 아래의 근경만이 희끗거리며 검은 실루엣을 간간히 드러낼 뿐 검은 하늘의 지독한 단조로움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해가 뜨기까지는 여전히 30분이나 남아있었다. 추위에 허덕거리며 올라온 탓에 예상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것이 변수였다. 더 이상 갈 곳을 잃어버린 나는 되새김질 하듯 지나왔던 길을 다시 걷기로 했다.     

    올라오면서도 보았던 주목들은 다시보아도 묘한 감응을 주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듯한 기괴한 형상들은 각자의 기억을 간직한 채 어느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그 시간은 적어도 수백 년은 지난듯했고 세월의 무게는 오래된 육신에서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거대한 몸체와 이리저리 비틀리고 꺾이면서 형성된 독특한 자태는 처음에는 신비함에 감탄을 자아냈지만 속이 모두 썩어버려 텅 비어진 몸체를 바라보고 있으면 공허함과 애처로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오히려 나무난간 위에 하얗게 피어난 상고대에서 뭔가 설명하기 힘든 생명력과 아름다움이 느껴지면서 더 나무다워 보이기도 했다.     

    일출시간이 가까워졌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내가 방금까지 내려왔던 길로 분주히 올라가고 있었다. 먼 하늘을 바라보니 아까보다 살짝 푸른빛이 도는 게 확실히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땅바닥에 던져놓았던 가방을 들쳐 메고는 서둘러 정상으로 향했다.     










어둠을 풀어헤치자

산허리의 미끈한 곡선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

붉게 번지는 햇살이 살에 닿아 보드랍다.

따스한 열기가 딱딱해진 나의 몸을 감쌌고

감미로운 희열이 진득이 밀려왔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경이로움에 머릿속은 텅텅 비어 있었고

귓가에는 바람소리만이 왕왕거리며 맴돌고 있었다.

그래도 따스했다.

나는 그 따스함이 좋았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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