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형 Jun 22. 2022

_야간산행-1

: 프롤로그




헤어지자.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누군가에게는 계획된 순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갑작스러운 순간이었다. 담담했지만 버거웠고, 괜찮다고 위로하기엔 너무 슬펐다.

   그리고 걸었다. 같이 걷기로 했다. 목적지는 없었고, 걸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겨울의 끄트머리에서 유난히 추운 날이었고 건조한 바람이 부는 게 분명 걷기 좋은 날은 아닌 듯싶었다. 그럼에도 그저, 묵묵히 걸었다.

우리는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었다. 반복은 마음의 여유를 주었고 그것만으로 서로에게 충분한 듯싶었다. 걸어온 거리만큼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늘 너를 바래다주던 버스 정거장에 도착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추위 탓인지 그사이에는 적적한 여백만이 가득했다. 여전히 별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고 어름어름 뜸을 들이며 버스를 기다렸다. 사실 특별히 버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던 건 아니었다. 그냥 상황이 그랬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곧 버스가 도착한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고요했던 버스정류장에 별안간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왔다. 추위 탓인지 머릿속이 잠깐 아득해지더니 뜬금없이 심지가 다 타들어 가던 촛불이 생각났다. 오래전 제주도에서 샀던 현무암의 형상을 본뜬 검은색 향초였다. 어둠의 끝에서 까막거리며 마지막을 향해가던 그 촛불은 결국 어떻게 되었나. 화려하게 스파크를 튀기면서 꺼졌던가, 아니면 진한 향기만 남긴 체 연기와 함께 홀연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가, 아니 내가 그 끝을 본 적이 있기는 하던가. 복잡한 머릿속 탓에 나는 그럴 때면 짓곤 하던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버스는 금방 도착했다. 나를 바라보던 네게 나는 얼어붙은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진심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잠시 껴안아 주었다. 손님을 모두 태운 버스는 이내 출발했고 내게 남아있던 온기는 그 순간만큼 짧은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유난히 차가웠던 포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걸었다.

  

   그리고 걸었다. 이번에는 홀로 걸었다. 지난 6년의 시간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만큼 아득하게 느껴졌다. 특히 오늘 하루의 끝은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서로가 그동안 드러내지 못했던 감정을 토해냈던 순간, 헤어짐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 길었던 여정의 마무리를 어찌할 줄을 몰라 하염없이 걸었던 순간,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럼에도 여전히 날은 밝았고 오늘 하루는 그대로 이어졌다. 상가에서는 유행하는 음악이 흘러나와 거리의 소리와 마구 뒤섞인 채 귓가를 윙윙대고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떠들며 소란스럽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 틈 속에서 떠밀려 빠져나온 나는 바다 위를 표류하듯 발길이 닿는 데로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공원을 지나가면서 그동안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렸고, 재건축지역을 가로지르면서 사소하게 다투었던 일들이 생각났으며 조용한 주택가에 들어서자 함께 나누었던 밤이 그리워졌다. 걸음이 반복될수록 이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속 무언가가 격렬하게 솟구치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요동치는 고요함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내 모습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어느덧 겨울 해가 뉘엿뉘엿 드러누우면서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아까보다는 가벼워진 듯싶었지만 그렇다고 경쾌하지는 않았다. 바람은 이제 확실히 세차게 불어왔고 추위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아까처럼 심지가 다 타들어 간 촛불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밤이 오고 있었다.




이전 01화 _서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