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을 시작하다
이 동네로 이사 온 다음 해 동네 길가에서 우연히 <텃밭 분양-해달빛 농원>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그런데 시골에 가까운 도시 외곽 동네라 그런지 <해달빛 농원>이라고 하면 누구나 찾을 수 있다는 듯 안내 문구에는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은 써놓지 않았다. 여기저기 해달빛 농원의 위치를 물으며 차로 혹은 걸어서 찾아다녔다. 3월 초 새봄이 막 시작되는 때여서 달뜬 기분 탓이었는지, 안내 문구를 보는 순간 ‘그래 이거다’ 싶어서 그랬는지, 또 다른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오후 쯤 농원을 찾아 밭을 확인하고 덜컥 분양 신청을 해버렸다. 일 년 계약, 열 평에 사용료 오만 원, 퇴비는 공동 구매. 밭 주인이 연세가 드셔서 아들의 권유로 일은 줄이고 밭은 놀리지 않는 방법으로 선택한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3월 말인 아직은 모종을 심기에는 이르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다음 주에 가까운 오 일 장을 찾아 호미, 장갑, 물뿌리개, 장화를 샀다. 설레고 긴장되었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심고 키울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었어야 할 텐데 설렘과 긴장감이라니.
무엇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생각하다가 가장 먼저 산 것은 상추 모종이었다. 자주 지나던 큰 시장가에 내어놓고 팔던 여린 모종들을 눈여겨보기만 했는데 드디어 심을 수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20kg 퇴비 두 포를 열 평 땅에 고루 뿌리는 것으로 첫 농사일을 시작하였다. 삽으로 땅을 파서 이랑 만들기를 하였는데, 시작하는 설렘 때문이었는지 너무 깊게 판 탓에 높은 이랑이 되었다. 밭 주인 할아버지가 지나다 보시고 한 말씀 하셨다.
“이랑이 높으면 가뭄 타기 쉬워......”
상추 모종 스물다섯 개가 얼마나 많은지 처음엔 몰랐다.
4월 중순이 넘어가자 뿌린 씨앗들의 싹이 올라왔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새싹이 땅에 균열을 만들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 작고 여린 새싹이 만드는 땅의 균열이라니, 세상에!
봄날은 하루하루가 기적에 가까웠다. 바늘만큼 가는 모종을 돋보기를 쓰고 겨우 심었는데 쑥쑥 자라 대파의 모습을 갖추고, 상추 모종은 배추만큼 자라 아랫집 윗집 나누어주기에 바빴다. 여름 끝자락에 가을배추와 무를 심었다. 첫해에는 수확이 넉넉지 않았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밭의 크기를 점점 키웠고, 심는 작물의 수가 늘어났으며 텃밭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김장거리를 자급자족할 만큼 되었다.
물론, 그러는 동안 너무 일찍 심어 눈을 맞히는 바람에 고추 모종을 얼게 했고, 작물을 심어놓고는 추가 영양을 전혀 주지 않아 알맹이가 없는 빈 콩 꼬투리만 달리게 한 적도 있었고, 봄 가뭄에 대처하지 못해 시금치 잎이 허옇게 말라죽은 일도 있었다. 새로운 작물을 시도하기 전에는 묻고 또 물어야 했으며, 도시 사람으로 몇십 년 살았던 탓에 땅을 파기 전에 인터넷을 먼저 파야 했다.
그렇게 밭을 가꾸며 산 지 8년이 되었다. 비록 주말에만 나가는 밭이지만 이제 웬만큼은 농사일이 몸에 뱄다. 철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요령도 생겨 힘이 덜 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아직도 새봄에 땅파기나 6~7월 한참 때 풀 뽑기는 힘이 무척 든다. 봄 농사 첫 일인 땅파기를 하고 나면 며칠은 허리며 다리가 쑤시고, 늦봄 이후 맹렬한 풀은 한바탕 붙잡고 씨름을 하다가 벌러덩 나자빠질 정도로 거세다. 땀을 한 말 흘리는 것은 다반사이다.
어느 해인가, 김장 배추와 무를 모두 수확하고 난 텅 빈 밭을 돌아보며 그가 말했다.
“이 무성하던 밭의 작물을 무리가 다 먹은 거야?”
부모님과 동생에게도 아는 분에게도 보내드렸으니 우리가 다 먹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꽤 많이 그리고 열심히 먹긴 했다. 역시 텃밭은 기르는 것도 기르는 것이지만 잘 먹고 잘 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