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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터박스 Jul 02. 2021

이번 생은 8남매의 둘째입니다

#2 What's eating Gilbert Grape (첫째 이야기)

길버트 그레이프  

영화 제목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보는 내내 답답함을 느꼈지만 캠핑카 타고 떠나는 걸 보면서 누구라도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걸 꿀꺽 침 삼키듯  받아들였던 영화입니다.


8남매의 첫째인 우리 언니, What's eating 언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아마 그 무렵인 거 같아요.

아침에 언니가 혼자 먼저 학교를 가기 시작했습니다.


초3인 나랑 쌍둥이 셋째

초1인 넷째

유치원을 다니는 다섯째 그리고 아직 미취학 아동인 여섯째와 일곱째 아직 여덟째는 태어나기 전의 일입니다.


아침이 평소와 달랐어요.

언니가 없었습니다. 언니가 없어서 우왕좌왕하다가 지각을 겨우 면했습니다. 하루 종일 식식대다가 저녁 먹기 전 어머니께 징징대고 화를 냈습니다.


언니가 동생들을 안 챙겨서 내가 할 일이 많아져서 뭔가 억울한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매일 해야 할 이달 학습 공부도 채우지 못한 채 동생들을 다 같이 앉혀놓고 숙제를 끝내게 했습니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미루는 쌍둥이 셋째에게 숙제하라고 성질내다가  모르는 부분을 물어보는 넷째에게 설명을 해주다가 급한 성격에 대신 풀어주기를 반복하다가 급기야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평상시 무서운 언니가 싫어서 언니가 동생들에게 화를 내면 가로막고 왜 뭐라 하냐고 방어하던 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것저것에 화만 내고 있는 제가 눈에 보이네요. 지금도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목소리와 표정부터 달라지는데 그때도 똑같았겠죠?


이때 어렴풋이 알았던 거 같아요

동생인 우리가 첫째인 언니를 갉아먹고 있다는 걸.(그때는 이 정도로 직접적으로 느끼진 않았고 언니가 7남매의 첫째라서 창피하고 힘들다는 거 정도만 알았어요)

그래서 다음날부터는 언니가 먼저 가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대신 동생들과 규칙을 정했어요. 물론 안 지키는 게 부지기수였지만요.


하교 후 집에 오면 가방 던져놓고 놀이터에 가서 신나게 동생들이 놀다 오면 일단 옷을 벗고 씻은 다음 마루와 주방에 놓인 모든 물건을 가운데로 모은 뒤 각자 자기 물건 찾아서 제 자리로 가져가게 했어요. 미취학 아동들은 제가 챙겼고요. 티브이에서 만화영화 시작 전에 이 모든 게 끝나야 했어요. 동생들과 역할 놀이를 통해 나름 재미있게 했지요.


아직도 가끔 넷째가 이야기해요

제가 콩나물국을 끓이면서  숟가락을 이용해 고춧가루를 퍼 넣자는 넷째의 이야긴 무시하고 엄마도 이렇게 하잖아라고 하면서 통을 들고  슉슉 뿌리다가 고춧가루를 통째로 국에 쏟은 적이 있어요. 아직 국물이 젖지 않은 고춧가루를 걷어냈지만 국이 너무 매웠습니다. 다 같이 먹기 시작했는데 마지막엔 넷째와 저 둘만 먹었던 이야길 아직도 이야기해요. 지금은 추억이지만 그때는 암담했죠.


어린 시절 추억에 언니가 뜨문뜨문 없습니다. 우리보다 친구와 더 어울렸던 시간이 꽤 되죠. 그때는 언니가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어요.


영화를 보았고, 맏이의 책임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하면서 우리 언니를 갉아먹은 건 누구인가가 제 마음속에 체한 거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언니는 제 대학교 1학년 시절 생활비를 보내주었습니다.

한 달 20만 원, 언니가 무엇을 포기하고 준 것인지 말을 안 해도 압니다. 가난은 씨앗을 뿌리고 성장하여 다시 씨앗을 뿌립니다. 무슨 종의 기원인 거 같아요. 20대 초반 자기가 벌어서 자기를 책임지는 것만도 벅찬데 동생을 거두어야 하는 첫째의 책임은 무거웠을 겁니다. 서울에 부모님과 같이 사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던 시절입니다.


저는 계속 언니의 도움만 받을 수는 없어 학교 공고문을 보고 시험을 치러 고시반에 입 반하였습니다. 고시반에서 매월 시험을 잘 보면 혜택이 꽤 많아 시험 준비도 열심히 했죠.


사법시험 준비를 하겠다고 학교 휴학을 했지만 저는 학원강사 알바를 했습니다.

언니는 완강하게  말렸습니다. 하지만 화사를 그만두고 가게 써빙 일을 하는 이유가 생활비보다 급여가 적어서라는 걸 아는데 그럴 수 없었습니다. 당시 언니는 한정식 집 서빙과 초밥 집 두 군데서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는데 그것도 부족하여 한 군데 일을 더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공부가 당장의 생계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23살이었는데 2년 동안 학원강사를 하면서 매월에 180만 원 남짓 벌었을 때 엄청 행복하고 뿌듯했습니다. 언니의 책임을 나눠줄 수 있다는 만족감, 매월 정해진 시기에 홈플러스 가서 주간 장보기 해올 때 늘 제일 싸고 1+1을 사 왔지만 그걸 가져와서 정리할 때의 뿌듯함이 있었습니다.

현실의 벽은 참담함을 느끼기에 늘 충분할 만큼 높고 높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들을 느끼며 지냈던 거 같아요.


언니가 결혼을 하고 자기 가정을 일구고

우리도 각자 자기 삶을 살면서 고군분투하고 많이 싸우고 인연을 끊고 살겠다고 싸운 적도 많지만 결국 우리는 화해하고 다시 삽니다.


3년 동안 아버지 어머니 장남이 운영하는 농장이 망하고 살던 아파트가 경매로 사라지고... 그 와중에 그나마 지금의 상태를 유지한 건 언니가 주축이 되어 가족 펀딩(제가 그렇게 부릅니다)을 했기 때문입니다.


기계 제작비, 밀린 월세와 공과금, 농장 차 리스비, 지입 된 차량들이 계약해지하고 나갈 때 줘야 하는 보증금, 매월 쓰는 카드값 등... 농장이 전면 중단되니 이 모든 게 너무 버거운 짐이 되었고 아버지는 중병으로 아프시고 남동생은 너무 버거워 집안에서 칩거하다시피 하며 포기하는 듯했습니다


작년 겨울 남동생이 소송을 치르면서

언니가 단톡 방에서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몇천만 원을 대출을 받을 테니 가족들이 매월 십만 원씩 갚아나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그렇게 가족 펀딩으로 위기를 극복해가는 중입니다. 여러 건의 가족 펀딩으로 이제 지칠 대로 지쳤지만 아직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가족 펀딩을 할 때도 다시 물어봅니다.

What's eating 언니?

언니는 대답합니다. 포기하지 말자. 언젠가는 농장이 잘될 거야. 힘 내보자.


오늘도 농장에선 버겁고 무거운 일들로 가족 단톡 방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작년보다는 지난달보다는 더 나아지고 있는 게 보입니다.


내 바람은 언니가 가족들에게 갉아먹히지 않게 우리가 잘 성장하는 것과 언니에게 뭐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언니와 함께 먼 훗날 다시 회상할 때 8남매라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오늘도 바라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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