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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진 May 29. 2020

“강원도로 가자.”

앨리바바의 정원엔 튤립이 가득하다

병원에 입원해서 1차 전신 항암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랫집에 물이 많이 샌대.” 우리 집 보일러가 터지는 바람에 아랫집으로 물이 주룩주룩 쏟아진다고 했다. 아랫집에서는 젊은 부부가 갓난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십 년 가까이 물이 새고 습한 반지하에서 살았던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집주인은 급한 대로 순간온수기를 설치해줄 테니 보일러를 끄는 게 어떻겠냐고 알려왔다. 어쩌지… 실내 온도가 27도 이하로 떨어지면 나는 심하게 기침을 했고, 거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퇴원하는 날 나는 전주 부모님 댁으로 급하게 피신을 했다. 그 사이 철희는 추운 날씨에 냉수로 샤워를 했다. 피신한 일주일 사이 욕실에 순간온수기가 설치되었다. “도진, 그런데 샤워할 때 찌릿찌릿 전기가 올라…” 집주인은 이사비용을 줄 테니 이사를 나가거나, 보일러를 새로 까는 한 달 동안 집을 비워주라고 했다. 이 집을 떠나야 하나? 떠날 수는 있나?


6주년을 맞이해 우리는 속초로 여행을 갔었다. 일출과 설악산, 호수와 바다에 감탄한 우리는 언젠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암 진단을 받고 나서 공기 좋고 물 맑은 그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었지만, 보광동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이 참 좋았다. 한강과 남산, 저 멀리 롯데타워까지 보이는 탁 트인 시야는 나의 경제 수준에 과분한 것이었기에. 그리고… 텃밭이 마음에 걸렸다. 삼 년째부터 식용이 가능하다는 아스파라거스가 두툼하게 싹이 올라왔지만 아까워서 그냥 두었다. 애매한 색의 꽃을 터지듯 피워내는 도라지도 삼 년을 키웠다. 바질과 딜과 타임과 고수, 부추, 상추, 아욱, 방울양배추, 계란가지, 토마토. 또… 그리고… 겨울에 심은 튤립 구근. 두 평이 채 안 되는 이 텃밭이 뭐라고 나는 무기력함과 통증이 올라오면 그 옆에서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함께 광합성과 풍욕을 했다. 친구들조차 만날 수 없는 처지의 면역상태를 버티게 한 건 옥탑의 식물이었다.


튤립은 비료를 많이 줘야 크고 싱싱한 꽃을 피운다.


바이러스가 온 도시를 휩쓸어도 식물을 자신의 생명력으로 봄을 알렸다. 앨리바바 프로젝트가 끝나고 참여해준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심은 튤립이 싹을 내었다. 겨울을 견딘 구근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꽃망울을 밀어냈다. 몇 개의 구근은 피기도 전에 꽃망울이 시들거나 아예 싹을 내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부족한 수를 채우기라도 하듯 두세 개의 꽃망울이 한 구근에서 돋아나기도 했다. 가본 적도 없는 에버랜드를 연상시키던 튤립이 미칠듯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겨울의 고통을 이겨냈기에 이렇게나 채도가 높은 걸까. 모든 꽃이 그러하지만, 각막에 들이박히는 튤립의 색은 ‘지금’이라는 감각을 새로이 일궈내기에 충분했다. 이 아름다움을 친구친구들과 오롯이 나누고 싶었고, 옥상으로 초대해 꽃을 나누는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망할 코로나바이러스와 급격히 저하된 체력이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나마 고집을 부린 친구 몇몇에게만 피지 않은 튤립과 절화한 아이들을 나눠주었다. 이사 전날 남은 꽃들을 품에 안고 사진을 찍었다. 그제야 보광동을 떠나는 게 실감이 났다.


“요즘 서울시 속초구라고 부른대.” 몇 년 사이 속초는 아파트 붐이 불어 분위기가 꽤나 바뀌어 있었다. 나와 철희에게는 좀 더 조용한 곳이 필요했다. 참 많이 다른 우리가 공통적으로 민감해하는 것이 소리였다. 속초 옆 동네 양양, 물치라는 동네는 참 고즈넉한 곳이었다. 물치천에는 은어가 살고, 동네 공원엔 고라니가 뛰어다녔다. 물떼새의 발자국이 남은 해변 너머로 서퍼들이 파도를 누비고 있었다. 양양이라는 이름처럼 해는 몽돌이 깔린 바다에서 날마다 떠오르고, 설악산 꼭대기에 구름이 드리우면 여기가 스위스인가 했다. 호사스러운 자연이, 과분한 행복이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건 친구친구들의 얼굴이었다.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나를 오늘까지 살린 그들과 함께 이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인스타그램에 사진이나 공유하는 정도지만, 좀 더 기운을 차리면 친구친구들을 이곳으로 초대해 오늘을 나누고만 싶다. 사랑과 우정으로 가득한 그 날이 곧 오기를.


보광동에서의 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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