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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현 Nov 01. 2023

자유의 눈물과 사랑

눈물로 점철된 다섯 번째 10일 명상 코스

열흘 코스 시작하기 전에 이루어지는 나흘 간의 작업봉사에 참여하면서 한 한국계 미국인인 여성과 얘기 나눴다. 60대로 나와 나이 차가 꽤 컸지만, 오래 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아마도 토종 미국인인 앵글로색슨계 남편과 아이 없이 살아서인지 한국 또는 동양 문화나 그 정서에 관한 시각이 나와 통했다. 대표적인 것이 명상하면서 자꾸 신비 경험을 기대한다거나 명상을 신비주의와 연결시키는 경향에 관한 동양권 사람의 특성이다.


이 코스는 시스템화 되어 전세계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방식으로 운영되기에 미국이든 유럽이든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느 곳에서 참여하든 상관 없다. 그래서 한국 센터에서 이루어지는 코스에 늘 외국인 참여자가 있다. 내가 sitting했던 이번 코스에도 금발 머리 여성이 셋, 인도와 일본인 남자 등이 있었다. 봉사에 참여했던 한국계 미국인 여성은 미국에서만 여러 차례 참여했고, 다인종 국가인 덕에 문화적 배경에 따른 태도 차이를 비교적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코스 동안 매일 저녁, 1시간 반에 걸쳐 이루어지는 명상법에 관한 담화에서 내내 이 명상은 종교나 철학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오로지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자기탐구 방법으로서 어떤 종교적 인물의 말씀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믿고 따르는 식의 맹목적 태도를 경계하고, 따라서 일말의 신비주의와도 관련 없음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등 동양권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은 명상 중에 겪게 되는 신비 경험에 의미를 두는 경향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나도 느꼈다. 작년 식당 봉사를 함께 했던 어느 60대 여성은 불자였는데, 센터에서 귀신을 보았다 하기도 하고, 심지어 부처가 자신에게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일체의 침묵 속에서 유일하게 말소리를 듣는 매일 저녁 1시간 반 동안 내내 논리와 합리적 이해를 구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에 스며든 문화적 배경은 그토록 강력하다.


그 한국계 미국인 여성과 통했던 또 다른 관점은 명상하는 동안 우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명상하면서 우는 모습은 유독 한국 여성에게서 많이 발견된다고 지적하면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나 역시 명상하면서, 특히 코스 마지막 날 이루어지는 자비명상 시간 동안 훌쩍훌쩍 우는 여성을 적잖이 보았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하는 그 시간 동안 훌쩍이는 건 제3자 시각에서는 매우 신파적이다. 마치 그동안의 내가 너무 불쌍해서 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 여성은 자기연민 감정에 빠진 것이라는 내 진단에 무릎을 치며 동의했다. 우리는 함께 명상하다가 우는 사람을 흉보고 비웃었다.


코스가 시작되었다. 둘쨋날 아침 단체명상하려고 센터 홀에 털썩 앉았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여러 사람 명상을 방해할 수 없어 자제했지만, 그냥 나뒀으면 엉엉 흐느껴 울었을 것이다. 다섯째 날에는 새벽에 혼자 명상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이어지는 아침 식사도 울면서 숟가락을 떠넣었다. 질문하려고 보좌법사 앞에 앉았을 때에도 눈물을 통제하느라 애 먹었다. 마지막 날 아침 단체명상에서는 훌쩍일 정도는 아니지만, 악어의 눈물처럼 눈물이 눈에서 주르륵 흘렀다. 다섯 번째 참여하는 이번 코스 이전까지, 지난 네 번의 코스 동안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이번에는 거의 내내 코스를 점령했다.


내게는 몇 가지 경험칙이 있는데, 그 하나가 다른 사람을 흉보면 꼭 내가 흉보던 그 모습, 그 입장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도 어김 없었다. 나는 이번 경험으로 명상하다가 우는 것이 반드시 자기연민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눈물에는 자기연민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되려 자기혐오와 분노가 대부분이었다. 마지막 악어의 눈물처럼 흐른 눈물 빼고는 전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나 자신을 못 견디겠어서 터져나온 분통의 성질머리였다. 하지만, 마지막 날 주르륵 흐른 눈물은 처음 맛보는 자유로움의 반응이었다. 일종의 환희랄까? 물론,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데 그동안 나 자신을 속박하면서 괴롭혔던 어리석음에 대한 안타까움도 없을 수는 없었다.


이 명상은 계속해서 알아차림하는 것이다. 최소 열흘 동안, 일체의 말과 글을 차단하고 오로지 알아차리기만 하는 훈련을 한다.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 말은 너무 쉽고 간단하다. 더 이상 달리 어떻게 더 설명할 내용도, 방법도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알아차리기만 하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인지 이해되지도 않는다. 이번 코스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서 나는 비로소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슬쩍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소위 사랑이 감정이 아닌 상태이고, 그 상태란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 본성은 곧 사랑이다. 고린도전서에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이유일 것이다. 코스 마지막 날, 자유로움을 느끼고 나도 모르게 흐른 눈물은 자유가 곧 사랑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해주었다. 사랑은 오직 자유 속에서만 꽃 피울 수 있고, 자유 역시 오직 사랑 속에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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