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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 여행자 Jan 01. 2024

그해 여름 추어탕은 뜨거웠다

추어탕


  “형님 뭐하는교, 추어탕을 끓였는데 아주 맛있다. 이따 드시러 오소.”

  아침부터 엄마의 전화기가 불이 난다. 목욕탕 동기들을 비롯해 주변 지인들까지 동네방네 사람들을 죄다 끌어모을 기세다.

  올해 초 어깨 수술을 하신 엄마는 좀처럼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셨다. 약해진 면역 탓인지 끊이지 않는 잔병들을 달고 지내셨다. 엄마의 건강 상태는 밥상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흘이 멀다고 밭의 푸성귀들을 모아다가 조몰락거린 찬들이, 철철이 올라오던 밥상의 계절이 멈추었다. 이른 봄이면 냉이 나물, 달래장, 쑥버무리가 돋아났고 민들레 겉절이, 쑥부쟁이 나물, 부추전이 뒤따랐다. 봄 끝 무렵부터는 돌나물 물김치, 제피 장아찌, 풋콩잎 물김치, 마늘종 볶음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여름으로 이어지던 식탁이 올해는 영 기운을 못 차리고 시들했다. 유난히 지독하다는 여름 감기는 한 달 내내 엄마를 붙들고 늘어져 드러누울 자리만 찾게 했다. 당신 밥도 귀찮은 사람한테 국수를 삶아 내놓으라던 눈치 없는 아버지께서 대신 라면을 얻어 드셨다는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어머, 엄마가 살아나셨네요.”

  마침내 밥상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 아침이었다. 한가운데서 먹음직스럽게 끓고 있는 감자 된장찌개를 중심으로 열무 겉절이와 얼갈이 물김치, 깻잎 절임이 동그랗게 차려졌다. 멈추지 않던 기침이 가라앉아 한결 나아지셨단다. 어느새 마당 수돗가에는 밭에서 뽑혀 나온 열무와 얼갈이배추가 양푼이 마다 넘치게 담겨 있었다.

  “장마철 채소가 얼마나 귀한데 밭에서 물러지면 아깝잖아. 누워 있자니 잠이 안 오더라고.”

  값비싼 몸이 되기 전에 서둘러 담그셨다는 열무김치는 차고 넘치게 넉넉했다. 얼갈이김치를 차곡차곡 김치통에 넣는 엄마의 얼굴은 겨울 김장을 마친 듯 뿌듯함으로 가득했다. 후텁지근 무더운 날이었다. 부엌에는 종일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푹푹 찌는 찜통 속에서 축축 늘어진 얼갈이배추가 하염없이 건져 올려졌다. 이때만 해도 데친 얼갈이는 당연히 냉동실로 직행해 두고두고 꺼내먹을 비축용 나물거리가 될 줄로만 알았다.

  “이게 다 뭐예요?”

  복날 아침 부엌에 영업집 주방을 방불케 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주방 가스레인지에 얹혀 있는 집에서 가장 큰 곰솥을 비롯해 바깥의 화덕에는 대용량 솥까지 합세해 펄펄 끓여내고 있었다. 추어탕이었다. 이 많은 얼갈이배추로 뭘 할까를 고민하며 배추전, 얼갈이 물김치, 배추 된장국과 함께 꽂혀 있던 그 추어탕. 미꾸라지가 얼마나 들어갔는지는 몰라도 국물 위에서 너울너울 춤추고 있는, 얼갈이는 못 해도 몇 양푼이가 들어갔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얼갈이를 끝없이 데쳐낼 때부터 엄마는 계산이 다 있었던 거다. 복날 생각나는 얼굴들을 불러 모으는 엄마는 그동안 잃었던 활기를 되찾은 듯 그야말로 신명이 넘쳤다.

  아침 밥술을 놓자마자 삼삼오오 불러모은 사람들에게 추어탕을 한 그릇씩 대접하며 못다 나눈 회포를 풀고 그 손에 추어탕 한 냄비와 열무김치 봉지를 들러서 보내셨다. 그동안 나는 자전거로 혼자 계시는 동네 어르신들과 이웃 동네 친척댁 등 집집이 추어탕을 배달했다.

  “아이고 더운데 뭘 이래 챙기노. 덕분에 잘 묵겠다고 전해라.”

  복날 때마다 잊지 않고 삼계탕을 전하며 듣는 인사가 어느새 나에게도 익숙해졌다. 적적하던 집이 오랜만에 추어탕 손님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왁자지껄 들썩였다. 언제 다 먹나 싶을 만큼 한가득 이던 추어탕 솥도 하루 사이 동이 났다. 말끔하게 비워진 추어탕 대신에 엄마 얼굴엔 고단한 뿌듯함이 그득하게 차올랐다.

  “엄마는 복날에 생각나는 사람도 많아, 그만하면 됐어요. 이제 적당히 하세요.”

  직접 지은 음식으로 지인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그 보람을 모르지 않지만, 어느새 몸 사리지 않는 열정적인 나눔을 나무라는 딸이 된다. 점점 사그라지는 몸으로 무한히 퍼주다가 비누 거품처럼 사라질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에서다. 냉탕과 열탕 같은 하루 사이를 오간 복날 저녁, 그럼에도 엄마가 이 뜨거운 나눔을 건강하게 오래도록 이어가시길 바라는 걸 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엄마에 그 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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