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고기전골
본가에서 독립했다. 귀향해서 다시 한 지붕 아래 산 지 5년 만이었다. 홀로 상경한 이십 대의 첫 독립이 아버지와 척을 지고 세운 깃발이었듯 부녀의 똑같은 기질은 25년 만에 다시 부딪혔다. 한편으로 거울 같은 서로의 모습을 못 견뎌하던 부녀(父女)가 5년의 못다 한 시간 동안 용케 잘 유지하고 있었던 평화였다.
손주를 보듬어야 할 시간을 엮지 못한 자식과 부대끼던 부모의 마음만큼이나 답답한 자식의 형편이었다. 어차피 독립할 거라면 빠른 게 상책이었다. 사자가 새끼를 벼랑으로 내몰 듯 앞으로의 생존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삶의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듯 독립은 부녀간의 충돌 사이에서 유성처럼 갑작스레 떨어져 나왔다. 각자의 꼬장꼬장한 자존심을 고수한 채 비틀대는 시간을 수습하고,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척 각자 제자리를 회복했다.
“여기 불고기가 맛있다던데 점심 드시고 가실래요?”
근처 은해사 나들이차 나선 어느 가을날이었다. 두 분이 함께 나선 드문 외출이기도 했고, 집 근처까지 오신 걸음에 점심을 대접해야겠다, 싶었다. 다행히 집 앞에 제법 번듯한 가족 모임에 적당한 고깃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본 찬 서너 가지가 정갈하게 차려지고 불고기 전골이 버너에 얹혔다. 명색이 쇠고기 전골이었건만 메뉴판에 푸짐하게 차려진 상차림과는 달리 빈약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여느 음식점의 점심 특선이 그렇듯 저녁 만찬으로 유인하려는 디딤돌 같은 메뉴에 걸맞게 구색만 겨우 갖춘 상이었다. 고기를 덮고도 남을 푸짐한 당면과 양파, 몇 가닥 버섯 같은 채소로 채운 전골이 끓기 시작하고, 고기의 선홍색이 가시는 즉시 재빨리 두 분의 앞접시에 덜어 드렸다.
“그만 덜고 너도 한 점 먹어라.”
집게를 든 내 마음은 익을수록 빈약해지는 고기처럼 너덜해지고 있었다. 번듯한 내 집도 아니고 적잖은 나이를 초라하게 하는 월세 빌라. 옹색한 원룸에 모시지도 못하는 처지 마냥 허울만 그럴싸한 특선 메뉴. 한 끼 점심에 명분도 서지 않는 집들이를 갖다 붙인 게 후회스러웠다. 자식에게 부담 없는 밥 한 끼 못 얻어 드시는 부모님, 그보다 푸짐한 정식 메뉴를 대접하지 못하는 형편이 한스러웠던 자식의 가난한 심정이었다. 뒤늦게 선택한 나의 삶이 당신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는지를 문득문득 되묻던 시기, 우리가 함께 맞이할 가을이 얼마나 남았을까,라는 질문에 마음은 수시로 침잠했다.
“어쩌면 단풍이 이리도 고울까?”
“나오길 잘했죠? 일만 하시지 말고 가끔 이렇게 바람도 쐬고 그러자고요.”
그날 은해사 입구는 못 가 본 여느 해를 상쇄하고도 남을 단풍과 가을 햇살에 흠뻑 물들어 있었다. 낙엽처럼 쭈그러지는 자식의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단풍나무 그늘 아래에 나란히 세운 두 분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환했다.
어느 해 봄 창경원 벚꽃 사진에서 보았던 두 분의 신혼 시절이 겹쳐 보였다. 앞으로 놓일 거친 길을 알리 없는, 젊고 젊은 부부는 50년 세월을 지나 어느덧 인생의 늦가을에 도착해 있었다. 일흔 노년의 걸음은 굽어져 휘청였고 주름진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사람의 일생이란 왜 이리도 슬픈 것인지, 어느 때보다 짙은 단풍 앞에 선 두 분의 물든 표정을 찍는 순간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젖어들었다.
변덕스러운 봄의 바람과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견뎌낸 푸르른 잎들은 주어진 소임을 다하는 듯 막바지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어느 계절보다 열정적이고 어떤 황혼보다 눈부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