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안경 줘봐라.”
“안경이요?”
탁자 위에는 활짝 펼쳐진 신문과 소식지가 뒤죽박죽 널려 있었다. 간행물 모퉁이를 속속들이 들춰 보았지만 뒤통수도 보이지 않는 안경이었다. 도움을 구하는 얼굴로 멀뚱히 쳐다보았다. 어이없게도 수색령을 내린 시급한 안경은 마뜩잖은 표정의 코끝에 버젓이 얹혀 있었다.
“거기, 책 밑에.”
“네? 이거요?”
답답해하는 손가락을 휘둘러 콕 짚어 가리킨 ‘그 안경’은 묵직한 사전 밑에 꼼짝없이 깔려 있었다. 빼꼼히 삐져나온 시커먼 테두리가 두꺼운 손거울 같은 ‘돋보기’였다. 학교 과학 시간에서도 본 적 없는 초대형 돋보기는 내 얼굴을 절반 가릴 정도로 커다랬다. 함지박 같은 크기에 질린 나는 가정집에 두기엔 지나치다 싶은 마음을 삐죽거리며 건네드렸다.
아지랑이처럼 어룽대는 안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작은 신문활자를 돋보기로 확대해 보시겠다는 거였다. 내게는 호기심을 확대해 보여주는 관찰용 도구, 정밀한 현미경보다는 덜 광학적인 취급을 받는 돋보기였다. 전문가용이라기에는 아마추어 같고, 일상적인 물건에 속하기엔 마냥 평범치만은 않은 사물이었다.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관심이 발동되었을 때나 방물장수가 호객 몰이하듯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햇빛을 한 점으로 모아주는, 애매하게 범상한 것이었다.
흥청망청 써도 줄어들지 않는 화수분 같은 햇빛처럼 마냥 푸르렀던 시절, 내 시력은 사전 글씨도 간판처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안경을 쓰고도 보이지 않는 신문 속 글자들을 파헤치기 위해서 이맛살을 구겨가며 고군분투하고 계셨다. 안경으로도 읽히지 않는 세상을 돋보기로 덧대어 광부처럼 캐내시던 모습,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곧추세우시던 당신의 안테나 성능이 여전히 건재했다는 걸.
“어머니, 괜찮으세요.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도 보청기 많이들 해요.”
받아 든 보청기 앞에서 후드득 떨구시는 눈물 바람에 대리점 사장의 위로가 다급하게 쏟아졌다.
“엄마, 귀에 쏙 들어가서 보이지도 않아요. 이렇게 머리카락을 내리면 누가 알겠어요? 감쪽같네요.”
허둥대기는 급히 손수건을 꺼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청력은 나날이 높아가는 텔레비전 음량만큼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기차 화통 대여섯 개는 말아 드신 듯한 아버지의 쩌렁쩌렁한 성량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도통 알아듣지 못하셨다. 아니 듣지 않으시는 듯했다. 50여 년 부부의 내공을 다져온 엄마는 아버지의 고함을 소음으로 치부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신 터였다. 어차피 들어봤자 좋은 소리보다는 오히려 안 들어야 편안할, 신경질 일색이라는 거였다. 늘 그래왔던 짜증이려니 예사로 넘기거나 대충 눈치로 대처하며 버티셨다. 아예 신경을 꺼버리거나 엉뚱한 답으로 일관하는 엄마의 난청에 가장 답답해하는 사람은 아버지셨다. 벽창호와 살고 있다는 아버지의 하소연은 나날이 늘어가고, 들리지 않는 말에 무관심해진 엄마는 점점 대화 밖으로 소외되고 있었다. 더는 내버려 두어선 안 될 것 같은 엄마를 모시고 이비인후과와 보청기 대리점을 몇 번 오갔다. 청력 검사와 테스트를 거친 후 마침내 한쪽 보청기를 고른 날이었다.
경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고가의 보청기 가격에만 신경을 쏟았지 정작 엄마의 마음이 어떨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허리와 무릎 수술 후에도 오뚝이처럼 금방 일상으로 복귀하셨던 엄마였다. 부축용으로 건넨 지팡이도 창피하다고 내친 분이었던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보청기를 받아 들고 눈물을 쏟으시는 그제야 세상의 소리로부터 멀어지기 전부터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들이 했던 얘기를 두세 번 반복하는 걸 귀찮아하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타박을 쏟으며 조금씩 엄마를 세상 밖으로 내몰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동안 무릎 통증으로 일상이 절뚝였다. 덜컹대는 무릎으로 힘껏 달렸음에도 바로 앞에서 버스를 놓쳤다. 닫힌 문 앞에서 느꼈던 패배감은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낯선 심정이었다. 정형외과 복도에서 커다래 보이던 다리가 겪는 서러움이 단지 몸의 불편함만은 아니었다는 걸 몸소 겪고서야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그동안의 성숙한 척이었던 내 이해가 온전한 오해였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상황을 바꾸려고 애쓰기보다는 마음을 고쳐먹고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 처세라 했던가. 점점 쪼그라드는 생기에 집중해 의기소침해지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제안한 말이리라. 그런 면에서 돋보기와 보청기의 작동원리는 처세에 능해 보인다. 돋보기는 보고자 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확대해 보여주고, 보청기는 주변의 소음을 제거해 듣고자 하는 소리를 선명하게 잡아준다고 한다.
햇빛을 한 점으로 모으는 돋보기처럼 삶의 그림자보다는 빛에 초점을 맞추는 여생을 영글어가시길 여전히 내게는 미지일 수밖에 없는 당신들의 세상이 불친절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더불어 무심한 자식들을 대신해 낡아가는 감각을 부축해 주는 돋보기와 보청기가 아쉬운 대로 당신과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