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남들이 모르는 오솔길을 아는 것이에요._독일 속담
쌓인 눈의 두께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지인들과 점심 약속차 나선 길인데 눈이 오는 바람에 시내까지 가야 할 길이 난감했다. 여느 때 같으면 더없이 반가웠을 눈이 미끄러운 길 위에서 감당해야 할 번잡함과 뒤섞여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번뜩 하루 세 번 운행하는 완행열차가 떠올랐다. 운전해 가려던 방향을 돌려 기차역으로 향했다.
“어디 동네에 살아요, 대구 가나 봐요?”
새로 단장해 말끔해진 역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은 나와 할머니 달랑 두 사람뿐이었다. 대답을 망설이자 할머니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저기 아랫동네에서 왔어요? 나는 큰아들 내외와 같이 사는데 다들 바빠서 오늘은 혼자 병원 검진을 가게 됐다우.”
할머니는 이른 아침 기차역에서 만난 귀한 인적이 반가운 듯 초면인 나를 붙들고 통성명 직전까지의 호구조사에 돌입하셨다. 반은 대답하고 절반은 듣는 것으로 넘어갔다. 부담스러운 대화는 멀리서 기차 앞머리가 나타나면서 겨우 마무리 지어졌다. 정초부터 신상털이 질문들 앞에서 난감하던 차에 도착한 기차 불빛이 때맞춰온 구원의 빛 같았다.
새해 눈 오는 아침 기차역에서 만난 할머니와의 짧은 인연을 서둘러 갈음하고, 기차 앞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우산을 지팡이 삼아 오르시는 엉거주춤한 할머니 모습에 눈길이 잠시 멈추었지만, 그보다는 안도하는 마음으로 줄행랑치듯 객차에 올라탔다.
아침 기차는 눈이 온 탓에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평소보다 붐비었다. 창밖의 새하얀 설원을 눈에 담고 사진으로 찍으면서 새해 첫눈의 감흥을 즐겼다. 설국열차의 풍경을 한껏 만끽하고 나자 기차에 오른 뒤로 잊고 있던 뒤 칸의 할머니가 떠올랐다. 더불어 기다리던 플랫폼에서 전해 들은 오늘 할머니의 동선이 쌓인 눈 위로 그려졌다.
동대구역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반월당역에서 갈아탄 전철로 서대구 방향의 대학병원에 내리신다는, 나로서도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듣기만 해도 복잡다단한 할머니의 병원행은 여든다섯의 촌로가 혼자 찾아가기엔 누가 봐도 걱정부터 앞서는 여정이었다.
‘연세에 비해 총기를 잃지 않은 영민한 눈과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잘 찾아가시겠지, 그러니 용기백배 나셨겠지.’
혼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이 ‘내가 할머니의 자식이라면’이라는 혼잣말 같은 질문에 도착하였다. 순간 뒤로 밀려나는 차창 풍경 위로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해부터 유난히 아픈 곳이 많아지면서 병원 동행이 잦아진 엄마가 할머니와 겹쳐졌다. 아직은 운전이 가능한 일흔 초반의 엄마도 대구 시내까지 대중교통편으로 가는 길은 선뜻 나서지 못한다.
종착역에 도착해 출구 모퉁이에 멈추어 섰다. 할머니의 자그마한 모습이 쏟아지는 인파 속에 파묻힌 채 멀리서 보였다. 용기를 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반가워하는 그 환한 얼굴 앞으로 다가갔다.
“저랑 같은 방향이더라고요. 반월당 전역까지 저랑 같이 가세요.”
“그래요? 어이구, 세상에 반가워라. 이리 고마울 데가.”
누가 먼저인 줄도 모르게 끼워진 팔짱에 할머니가 기대 오셨다. 불과 30분 전에 안면을 튼 얼굴을 이산가족 상봉하듯 반기고 난 할머니의 걸음이 갑자기 급해지셨다.
“저, 바쁘지 않아요. 약속시간이 많이 남아서 천천히 가도 돼요.”
이리저리 얽히고설키는 출근길 지하철 인파 속에서 손을 맞잡고 단단한 우리가 된 할머니와 나는 함께 길을 개척해 나갔다. 평소에는 안중에 두지 않았던 엘리베이터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경로우대권 매표를 안내하면서 다시금 여든 할머니가 혼자 감당하려던 아득한 길의 무게가 느껴졌다. 전철 경로우대석에 자리 잡은 할머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근무 중이라는 걱정 어린 딸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괜찮다, 여기 안내해 주는 고마운 사람을 만났어.”
올려다보시는 눈에 담긴 나는 어느새 믿음직한 길잡이가 되어 있었다. 아침 길에서 만난 할머니와 잠시 동행하는 샛길로 빠진 덕분에 점심 약속에 지각생으로 도착했다. 반가운 점심 한 끼와 맞바꾼, 누군가에게 첫눈처럼 반겨지는 존재가 되는 기분은 솜사탕처럼 금방 녹아버렸다. 외출을 주저하게 했던 아침 눈의 흔적도 감쪽같이 지워져 길은 말끔해졌다.
어차피 녹아 사라지는 눈사람을 만드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지난한 삶이 아닌가. 내 어머니도 어느 길에서 작은 미담의 수혜자가 되기를 바라는 딸의 마음, 그 행로를 따라 선택한 첫걸음을 새해 눈길에 주춧돌처럼 놓았다. 앞으로 걷게 될 길에서도 첫눈 같은 인연으로 함께 갈 수 있다면 기꺼이 샛길로 빠지리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