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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 프리지어

조각#1

by 일상 여행자


새 벽시계가 도착했다. 시계를 걸 마땅한 자리를 물색했다. 올해 봄 이사 오면서 나는 중요한 삶의 방식 하나를 선택했다. 가구를 들이지 않는 것부터 최소한의 짐만으로 살아보겠다는, 미니멀 라이프 실천을 선언한 것이다. 여름 끝자락인 지금까지 지켜내려고 나름 애쓰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살림을 늘리지 않겠다는 결심은 무색하게도, 손으로 막아도 새어 나오는 하품처럼 세간은 야곰야곰 늘어나고 있었다.

그간 여러 번의 이주 속에서도 고수하는 것 중 하나는, 벽에 못을 박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히 이곳에서도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박아놓은 못을 얻어 쓰고 있다. 여직 내 집으로 소유해 본 적 없는 공간을 옮겨다닌 까닭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못을 박는 게 내게는 이사만큼이나 무거운 일로 느껴졌다. 멀끔한 벽에 남기는 오점 같은 흔적, 이라는 나만의 결벽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못을 박지 못하는 핑계를 찾아 둘러대는 게 못을 박는 것보다 쉬운 일이 되어 버렸다.

새 시계의 자리로 정한 공간인 거실벽을 훑어보았다. 시계를 걸 수 있는 곳은 꼬꼬핀이 꽂혀 있는 지점으로 한정되었다. 마침 거실벽 정면에 혀 있는 핀이 적당해 보였다.

오후 3시 32분, 바늘을 돌려 현재 시간을 맞추고 막 첫걸음을 떼는 원형 벽시계를 매달았다. 그 자리에 걸려있던 말린 프리지어는 정상의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는 지난해 수상자처럼 쓸쓸히 내려왔다. 꼬꼬핀 자리는 하나밖에 없고, 융통머리 없는 나는 그 벽에 더 이상의 못자리를 박지 않을 예정이어서 벽시계와 프리지어는 나란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해졌다.

새 보금자리를 다시 마련한 기쁨으로 설레었던 노란 봄빛도 생기를 잃고 퇴색되어 갔다. 시들어간다, 보다는 싱싱한 풋내가 익어간다고 말하고 싶었다. 프리지어가 살아낸 시간만큼 메마른 다발을 그러모았다. 매어둔 빵끈이 헐렁해져 한 번 더 감아 조였다. 야위어가는 봄을 한 바퀴 감싸고 여름을 휘돌아 도달한 가을, 다시 꿰맨 세 계절은 새 시계가 터주는 걸음을 따라 겨울 지나 다시 새봄에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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