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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모두 그곳에 흐른다

올갱이국

by 일상 여행자

“올갱이도 민물 생물이라 비린내가 나거든. 이렇게 밀가루를 된장이랑 개어서 풀어주면 국물이 개운해져.”

이모는 김을 펄펄 피워 올리는 올갱이국에 양념장을 풀고 국자로 휘휘 저었다. 여름 끝자락 지나 처서 문턱을 넘었는데도 한낮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건재함을 과시했다. 요란하게 돌아가는 선풍기가 무색하게 이모의 목 아래로 땀이 흘러내렸다.

“언니는 우리가 얼마나 먹는다고 이 더운 날에 불 앞에서 땀을 빼고 있노.”

동생과 조카를 위해 시장에서 다슬기를 사다가 손질하고 채소를 다듬었을 이모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 소리만 분주한 선풍기 고개를 돌려 이모 쪽으로 바짝 당겼다. 양념을 찹찹하게 넣어 입에 짝짝 붙게 간하는 엄마와는 달리 이모 음식은 슴슴하면서도 깊은 맛이 났다. 당신의 시원한 손맛을 좋아하는 걸 잊지 않고 챙겨주려 아침부터 동분서주했을 마음이 황송했다.


지금은 안동시에 편입된 외가가 자리했던 길안은 사과와 함께 다슬기로 이름난 청정지역이었다. 다슬기가 많았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지천’을 넘어서 ‘천지’만큼 수두룩했다. 명성에 걸맞게 계곡 이름도 ‘천지갑산’이었다. 숨겨진 무릉도원 같던 산 좋고 물 맑은 비경의 골짜기에 첫발을 딛게 된 것은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였다.

비포장 자갈길을 덜컹거리며 3시간여를 달린 끝에 도착한 엄마의 고향은 그때까지도 개발의 때가 묻지 않은 오지였다. 동네는 전형적인 산촌 형세의 정석을 보여주듯 가파르게 치솟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사이를 가로지르며 강이 흘렀다. 엄마가 시집오기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그때까지 사진으로도 뵌 적이 없었고, 외갓집이 객지인 서울로 옮겨간 지 이미 오래였다. 그런 내게 고향으로만 남은 외가와의 첫 대면은 이름도 생소한 ‘꼴부리’였다.

동네 전망을 독차지하던 산 너머로 해가 저물고 무더위가 가신 저녁, “꼴부리 잡으러 가자”는 선동에 양동이를 들고 냇가로 따라나섰다. 망둥이만큼이나 희한하게 들리는 낯선 사냥감이 ‘뭔가 귀한 것을 잡으려나 보다’는 기대에 부풀게 했다. 수정이 나온다 해도 믿을 만큼 말디 맑은 강이었다.

물가에 내려가 보니 테두리가 둘러쳐진 듯 새까만 것들이 잔뜩 나와 있었다. 들여다보니 강바닥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다슬기였다! 그렇게 빼곡한 다슬기를 본 것은 열여덟 생애 처음이었다. 흐르는 맑은 시냇가만 골라 돌을 들춰가며 한참 헤집고 다녀야 겨우 몇 개 주울 수 있었던 다슬기가 빽빽하게 깔려 있었다. 내내 궁금하던 꼴부리의 정체가 그저 다슬기였다는 실망감을 상쇄하고도 남을 엄청난 물량공세였다.

“와~” 감탄사를 끝으로 더 할 말도 잊고 바로 엎드렸다. 잡을 필요도 없이 두 손으로 퍼담았다. 그야말로 물 반 다슬기 반이었다. 산삼을 찾아낸 심마니처럼 정신없이 다슬기를 주워 담았다. 친척 할아버지는 그런 우리가 더 신기한지 손을 보탤 생각도 않고 그냥 웃으며 서 계셨다. 물가를 따라 훑어가는 동안 순식간에 채워진 양동이가 묵직하게 처졌다. 비닐봉지까지 담을 수 있을 만한 빈자리는 모두 다슬기가 차지했다.

그러나 만선의 어부처럼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던 길에서도, 무럭무럭 김을 품은 다슬기가 채반 한가득 받쳐져 나올 때까지도 우리 앞에 닥칠 시련을 미처 알지 못했다. 자랑스러운 전리품의 양이 고난의 무게게 될 줄 모르고, 다슬기잡이 무용담에 잔뜩 취해 있었다.

마루에 둘러앉아 바늘과 이쑤시개로 알맹이를 꺼내는 정교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돌돌 말린 수줍은 속을 한입씩 빼먹는 맛이 쌉쌀했다. 초록빛 용수철 같은 알맹이가 쏙쏙 빠지는 재미도 시들해지고, 파고 파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다슬기가 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즐거운 놀이가 지루한 노동으로 넘어갈 때까지도 다슬기 무더기는 제 높이를 굳건히 유지했다. 어린 인내심이 감당하기에 여전히 수북한 다슬기는 예기치 못한 복병이었다.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다슬기를 앞에 두고 몸을 비비 꼬며 지쳐갈 즈음 “이제 그만하고 가서 자라”시며 할머니가 자상한 노역 해제령을 내리셨다.

시지프스의 바위 같은 다슬기 까기로부터 해방된 밤이 지나고, 아침이면 다시 밥상에서 다슬기를 마주했다. 우거지 이파리 아래에 깔린 자양강장제 같은 다슬기 알맹이를 숟가락으로 건져 먹고, 들로 강으로 종일 쏘다녔다. 물가에서 첨벙거리며 다슬기를 재미 삼아 주웠다. 흔하면 귀한 것도 잊어버리듯 다슬기가 더는 감탄사가 되지 못했다. 그해 여름 외가의 계곡에서 보낸 일주일은 돌멩이만큼 흔해진 다슬기처럼 천국의 시간을 흥청망청 누린 시절이었다. 이후 개발의 혜택 속에서 계곡의 다슬기도 여느 강처럼 귀한 몸이 되었다. 강바닥에 꽃다발같이 수두룩 모여있는 다슬기를 더는 볼 수 없었다.


재작년 작은 외삼촌마저 돌아가시고 자매만 남게 된 후로 엄마와 이모는 서로 부쩍 의지하게 되었다. 조석으로 안부를 챙기는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 형제의 빈자리를 채워주려 애쓰는 게 안쓰러워 보였다. 떠나온 지 50년이 지났어도 “눈만 감으면 그 골짜기가 훤히 떠오른다”는 이모에게도 고향의 강은 그리운 것들이 흐르는 곳이다. 어릴 적 동무들과 일가친척, 먼저 떠난 언니와 오빠들, 부모님. 보고픈 이들이 모두 거기에 있단다.


여름의 끝자락에 놓인 담담하고 시원한 올갱이국 한 그릇. 이제는 볼 수 없어 사무치는 이모의 그리운 얼굴처럼 기억 언저리로 사라진 나의 천국은 이제 이모의 담담한 올갱이국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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