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척 없이 내리던 비가 어느새 창문의 은빛 난간에 통통한 물방울로 맺혀 또르르 흘러내립니다. 우수관에서 개울물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제법 거세게 내릴 참인가 봅니다. 어렴풋이 흐려지는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아련한 옛 기억들을 데려옵니다.
“나는 저기 세워놓은 우산과 같아. 비가 그치면 다들 까맣게 잊어버리지.”
그때의 제게는 도무지 닿지 않던 말이었지요. 당신의 처지를 우산에 빗대어 털어놓으시던 그 한탄이 여간 새삼스럽지 않더군요. 비가 올 때 요긴한 우산이 비 그치면 세상 성가신 짐이 되는 건 당연지사. 그 한탄이 유난스럽다 싶었지요. ‘우산 같은 존재’의 서글픔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답니다.
받는 데만 익숙하던 철없는 시절을 지나 주변을 챙기고 나눠가는 삶을 받아들이는 나이가 되고 나서였지요. 사람이 내 아픔에서 벗어나 타인의 슬픔에 시선이 닿게 되면 어른이 된다더니 삶의 중반이 되고 보니 사람의 앞과 뒤가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그제야 당신이 말씀하시던 우산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인생의 세찬 비를 맞고 있던 시절 당신이 제 앞에 내놓으셨던 밥 한 그릇의 온기는 지금의 어떤 진수성찬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는 것도요. 닥쳐오는 일들이 해답 없는 문제처럼 마구 쏟아질 때 숨겨놓은 힌트처럼 슬쩍 건네주셨던 조언들은 지금도 찾기 힘든 귀한 지혜였지요.
힘들고 어려울 때 받은 도움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여유 있을 때와는 견줄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는 걸 알아보지 못했던 시절이었답니다. 거친 비가 내리는 한가운데서 든든한 우산이 되어 준 당신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도 갖추지 못했다는 게 아쉬운 지금입니다. 그 너른 그늘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철이 들었더라면 당신이 비 그친 이후 천덕꾸러기가 된 처지를 서글퍼하지 않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집니다. 올해 비는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방금까지도 말간 하늘이 어느새 어두워지고 순식간에 들이붓는 비가 흠뻑 내립니다. 덕분에 들고 나서면 수시로 깜박하기가 십상이던 우산을 두고 다닐 일이 줄었습니다. 언제 또 세찬 비가 내릴지 좀 잡을 수가 없는 까닭이겠지요.
어제는 횡단보도에서 우산도 없이 속수무책 비를 맞고 있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저랑 같은 방향이길래 한 우산 아래에서 잠시 함께 걸었답니다. 이제는 제 어깨보다 나란히 선 상대의 어깨가 덜 젖도록 우산을 넓히는 법을 알게 되었네요. 제 우산을 기꺼이 건네주는 넉넉한 아량도 생겼고요. 이렇게라도 당신에게 빚진 우산 같은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된 것만 같아 조금은 훈훈해집니다.
그사이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합니다. 서로 도와주고 받으며 산다는 것에 대해 은인과 도움에 대한 아귀가 맞지 않는 생각으로 쓸쓸한 걸음이 되어 돌아오는 길입니다. 문득 당신의 환하고 안온했던 얼굴이 그리워집니다. 이제는 갚을 길이 사라진 우산을 잃어버린 마음의 정처 없음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