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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큼 털털 초여름의 기억

잊힌 겨울의 맛, 묵은지 볶음

by 일상 여행자

5월 하순과 6월 초순에 접어든 계절, 바야흐로 요란한 봄꽃들의 향연이 수그러들며 여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른 봄부터 입맛을 돋워주던 봄나물도 서서히 열기를 더해가는 볕에 마디가 굵어져 질겨지기 시작했다. 싱싱한 봄나물의 상큼함이 사라진 이후라 물기를 머금은 오이가 그나마 채소의 자리를 메우고 있었고, 호박은 이제 막 영글기 시작할 무렵이어서 마땅한 채소 찬이 잠깐 휴지기에 접어들 때였다.

냉장고와 세트를 이루게 된 김치냉장고가 주방 한편에 자리 잡아 여름 초입에도 적당히 익어 온전한 김장 김치의 아삭아삭함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김치냉장고라는 신문물이 필수품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지난해 겨울 집안 양식으로 잔치를 벌이며 담근 김장 김치는 이미 뜨거워지는 열기에 폭폭 시어지고 있었다. 아쉬운 대로 열무 겉절이나 열무 물김치가 김장 김치의 아삭아삭함을 대신하고 있으니 시어 빠진 묵은 김치는 자연히 뒷전으로 밀려났다.

달궈지는 장독 안에서 피어나는 하얀 골마지에 싸여 있던 김장 김치는 뚜껑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매콤함을 휘어잡은 신내가 눈앞으로 훅 끼쳐 올라왔다. 고춧가루 양념은 배추가 물러지면서 내놓은 빨간 김치 국물에 이미 완전히 녹아났다. 콤콤한 골마지를 걷어내고 꺼낸 배추 줄기의 선명한 노란빛은 애초에 붉은 양념에 절여졌다. 숙성의 시간을 지나 부패의 시간에 도달한 묵은지는 붉은빛을 넘어서 골병이 들은 듯 바래디 바랜 속살을 드려냈다.

복더위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지만 열기에 서서히 입맛이 잃어갈 무렵이었다. 흐르는 물에 바락바락 주물러 짜기와 양념 기를 죄다 뺀 배추는 제대로 익지 않은 어린 풋내로는 채울 수 없는 우물 같은 깊은 맛을 품고 있었다. 짠기와 물기를 쫙 뺀 김장김치의 태를 완전히 벗어던진 배추를 쫑쫑 썰어 들기름에 휘리릭 버무렸다. 이어 찧은 마늘까지 넣어 들들들 볶기 시작하면 부드러운 기름에 배추가 나긋하게 쳐지기 시작했다. 사이사이 물을 한 번씩 살짝 끼얹어 가며 졸였다가 다시 불이기를 반복하는 동안 묵은 김치는 물을 머금었다가 기름을 머금었다. 섞이기가 천지차이인 물과 기름 사이에서 정신없이 시달리던 묵은지는 지난해부터 품어온 곰삭은 시간의 맛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시큼한 양념과 고소한 들기름이 어우러진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면 입안에 침이 가득 고여왔다.


무던히도 묵은 맛을 좋아했다. 일명 단번에 입맛을 사로잡는 쌈박한 요즘 먹거리들은 단번에 홀리는 순간만큼이나 금세 질려버렸다. 반면 온전히 빠지지 않은 시큼털털함에다 고소한 들기름에 싸여 벗지 못한 콤콤함까지 덧입은 묵은지는 이도 저도 아닌 맛이었다. 맹탕인 듯 흐릿하면서도 묵직한 심지가 박힌 듯한 뿌리 깊은 맛을 붙들고 지친 입맛을 사로잡았다. 품고 있던 양념의 자극을 훑어낸 순둥 한 묵은지는 계속 계속 입안으로 들어갔다. 한입은 두입을 두입은 세입을 연이어 계속 끌어당겼다. 대개 쫑쫑 썰린 자태였지만 때로는 커다란 접시에 포기채로 올려지기도 했다. 손으로 쭉쭉 짖어가며 물에 만 밥에 척척 얹히기도 하고, 젓가락에 돌돌 말려가며 접시가 비워지는 건 분간 없이 순식간이었다. 한 접시가 당연히 일 인분 인양 분담되었고, 첫 묵은지가 오르는 날엔 밥상 위에서 금방금방 동이 났다.


더위의 이력이 쌓이지 않은 초여름 저녁, 입맛도 집밖으로 나갈 참이고, 찬거리도 마땅찮다. 냉장고를 뒤적이다가 냉골짜기 안쪽에서 잊히고 있는 김치통을 꺼냈다. 얇은 골마지 속에서 포근히 잠들어 있는 김치 한 포기를 깨워 말끔히 씻기고 찬물에 담가두었다.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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