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해삼의 기억

# 해삼

by 일상 여행자

“해삼을 먹는다구요?”

20여 년 평생 해삼은 식재료가 아니었다. 먹을 수 있는 수산물이라는 것도 생소한 데 ‘바다의 산삼’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기가 막혔다. 이렇게 거창한 별명이 붙는 고급 식재료를 우리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던 거다.

귀한 것은 맞았다. 돌아보면 그때도 해삼은 값비싼 생물 대접을 받았으니까. 그러나 내 기억 속 해삼은 징그러운 생김새는 물론이고, 온갖 나쁜 냄새를 모아놓은 혐오로 똘똘 뭉친 하나의 오물 덩어리였다. 도저히 먹을 수 있는 것이 못되었을뿐더러 먹어서도 안 되는 거였다.

그 시절 겨울은 왜 그리도 추웠던지 천장에는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고,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물걸레가 꽁꽁 얼어있던 셋방살이었단다. 서너 살의 동생과 대여섯 살의 나는 겨우내 동상을 달고 지냈다. 그때 동상이야 대수롭지도 않은 증상이기도 했거니와 아무리 방에다 묶어 놓아도 어느새 바깥 모래밭에서 뒹굴고 있는 애들을 붙들고만 있을 처지도 아니었다. 그렇게 종일 한데 바람에 얼은 우리의 손과 발은 추위에 물질하는 손들처럼 단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디서 듣고 우리에게 그런 처방을 했는지 모르겠다. 바다가 가까운 도시여서 시도할 만한 방책이었는지, 어쨌든 작정한 어느 날에 해삼은 우리의 두 손과 양발에 얹혀 면수건으로 칭칭 감겼다. 그렇게 해삼과 동체가 되어 하룻밤을 지나고 난 아침이면 해삼은 그나마 물컹한 형체도 흐물흐물해져 거의 물처럼 풀어져 있었다.

원래도 곱지 않은 해삼의 몸뚱이가 완전히 해체되어 더욱 징그러워졌고, 부패한 것처럼 보이는 외형은 저리 가랄 정도의 악취가 진동했다. 밤새 동상 부위의 냉기를 뽑아낸 해삼의 송장은 썩은 냄새를 풍기며 면수건에 얼룩덜룩 절여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해삼 붕대에 감긴 이상한 감촉을 참는 것도 곤욕이었지만, 다음날의 고약한 냄새는 진정 잊히지 않아서 그때의 동상이 말끔히 나았는지 어땠는지는 아예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뭐 그런 별난 처방이 다 있나?”라는 물음이 돌아왔기에 새삼 기억을 들춰 보지도 않았다.


그 고약한 해삼을 고급 일식집에서 다시 마주했으니 이 얼마나 극적인 재회인가. 진정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어찌나 귀한지 한 마리를 작은 토막으로 얄팍얄팍 썰어서 기미만 할 정도로 소량 제공되었다. 오독오독한 식감에서부터 귀한 영양성분이 읊어지고, 급기야 항암에 이르는 효능까지 줄줄이 이어졌다.

그러나 내 기억 속 해삼은 애초에 탁월한 효능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도저히 제자리로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해삼과 나 사이에 놓여 있었던 거다.

사람의 기억이란 게 어찌나 짙은 흔적을 남기는지 아무리 도리질을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오래도록 해삼은 나의 식재료 리스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자리에서 한두 번 맛보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본래의 값어치를 찾아가는 해삼이 되었다. 차츰 익숙해진 입맛은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냈다. 지금은, 아는 맛이 무섭다고 없어서 못 먹는, 그야말로 귀하신 ‘해삼’이 되었다.


keyword
이전 17화슬픈 타협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