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증을 겪는 내내 모순적이게도 나는 항상 굶주려 있었다.
식사일기를 기록하며 깨달은 것은 내가 밥을 먹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밥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모순적이게도 '살이 찔까 봐'였다(결과적으로는 밥을 먹지 않고 다른 군것질로 폭식해서 살이 쪘기 때문이다). 흰쌀밥 한 공기의 칼로리는 대략 300kcal라고 한다. 부정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다이어트 중이었고 그런 내게 탄수화물의 결정체인 밥은 '피해야 할 음식'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칼로리로 따졌을 때 300 kca l면 빵 하나를 먹는 것과 비슷했고, 무(無) 맛의 맨밥을 먹느니 달콤한 빵으로 일일 칼로리를 채우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칼로리로 음식을 계산했고, 내가 먹은 음식의 양도 몇 칼로리를 섭취했는지로 따지곤 했다. 그래서 내게 밥은 굳이 먹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쓸데없이 칼로리를 채우는 불필요한 음식이라고 생각되었다.
대부분의 일주일 간 밥으로 식사를 한 것을 따져보면 거의 3~4번에 불과했다. 밥 대신 고구마 말랭이나 빵, 달콤한 과자 등으로 끼니를 대신했는데 이러한 자극적이고 단 음식들을 찾는 것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더 심해졌다. 그렇게 나는 밥 외의 모든 달고 짠 음식들로 스트레스를 풀고, 효율적으로 일일 칼로리를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다(일일 칼로리를 초과해 폭식할 때가 더 많았지만). 그런 잘못된 식습관 속에서 나는 항상 굶주리고 있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영양소를 갖춘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아 충분히 포만감을 느낀 적이 없었고,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은 계속해 단 음식을 찾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이것이 반복되자 매점으로 달려가 빵이나 초콜릿을 입에 넣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것을 끊을 수 없었다. 매일 아침 먹던 커다란 밀크 초콜릿 하나의 칼로리는 390kcal였다. 칼로리는 높았지만 배를 채워주는 음식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다른 음식들에 대한 갈증만 증폭시켰다. 그러나 나는 밥 한 끼에 달하는 칼로리를 초콜릿으로 이미 섭취했으니 밥을 먹으면 더 살찔 것이라는 두려움에 식사를 걸렀다. 그렇게 나는 밥을 거부해왔다.
폭식증 자가치료의 둘째 주에 식사일기를 기록함과 동시에 시작한 것은 밥을 먹는 것이었다. 가공식품과 단 과자로만 사흘을 내리 먹고 나면 정말 토할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 몸이 정상적인 기능을 못하는 상태로 망가질까 봐 두려워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자가치료를 시작한 첫 주의 식사일기가 이 결심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첫 주를 연단 폭식으로 완벽히 망쳐버린 후 나는 그 원인이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하며 지난 일기들을 읽었다. 내가 항상 고구마 말랭이나 컵라면, 과자 등으로 식사를 때우고 있었다는 것을 일기를 통해 처음 깨달았다. 이 때문에 그동안 포만감으로부터 오는 만족이나 평안함을 얻지 못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밥을 먹기 시작했고 그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폭식하는 또 하나의 원인을 발견했다.
다음은 저번에 이은 둘째 주의 남은 식사일기다. 이 날 나는 내가 그동안 밥을 거부해왔다는 것과 그것이 폭식의 큰 원인이었음을 깨닫는다.
2018.4.6
아침
아침에 일어나 어제 남겨둔 빵을 먹었다. 꼭꼭 씹어서 삼켰다. 달지 않은 빵으로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부터 단 것을 먹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 폭식하는 날이 많았다. 빵과 함께 양배추 브로콜리즙 한 팩을 먹고 기숙사를 나섰다. 빵으로 때운 부실한 아침식사 때문에 금세 배가 고파졌다. 그래서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점심
12시까지 참고 정해놓은 시간에 먹을까 생각했지만 배고픔을 참는 것은 이제 넌더리가 나있었다. 그래서 11시가 조금 넘어 점심 학식이 시작되는 시간이 되자마자 식당으로 갔다. 오늘 메뉴는 달걀 소시지 볶음, 김치, 돌나물 무침, 밥, 짭조름한 국물. 집밥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반찬도 국도 모두 맛있었다. 항상 밥은 햇반 1.5 정도의 양을 주시곤 했는데 내게는 조금 많았다. 항상 남기는 것이 아까워 꾸역꾸역 비웠지만 오늘은 먹을 만큼 미리 밥을 나누어놓고 먹기 시작했다. 급하게 먹는 습관을 온전히 고치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천천히 먹고 음식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달걀 소시지 볶음이 맛있어서 한번 더 받아먹었다. 밥이 주는 편안한 배부름에 기분이 좋아졌다.
점심을 먹고 도서관으로 가는 길, 편의점에서 단 것을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배가 불러서 딱히 다른 것을 더 먹고 싶지 않았는데 뇌는 단 것을 먹으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이를테면 빵이라던가, 젤리라던가, 크림이 듬뿍 든 티라미수 따위 말이다. 하지만 도서관에 가서 재미있는 만화책을 읽으면서 쉬면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이 충동도 가라앉을 것 같아 발길을 돌렸다(밥을 먹고 나니 이러한 충동에 대응하는 것도 전보다 수월했다). 오후 5시에 모든 수업이 마쳤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조금 두려웠다. 내가 항상 폭식했던 시간이 바로 이때부터였기 때문이다. 오후에 모든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에 들어가서 잠들 때까지. 단 것과 밀가루 음식들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시간이었다. 수면바지를 입고 급한 마음에 매점까지 뛰어나와 항상 간식을 한가득 사서 방으로 들어갔던 시간, 다행히 오늘은 친구와 약속이 있었다.
저녁
원래는 혼자 저녁을 간단히 먹고 끝낼 생각이었다. 남은 빵을 먹고, 오트밀을 율무차 가루를 섞은 것에 뜨거운 물을 부어 죽같이 만든 간식을 먹었다. 이것이 저녁 식사였다. 제대로 밥을 먹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학교 근처에 파는 유명한 단팥빵을 사 먹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생크림과 팥앙금이 듬뿍 든 빵, 아침부터 먹고 싶었지만 살찔 것이 분명했다. 두툼하게 크림이 든 팥빵을 남기는 것은 내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빵을 다 먹으면 적어도 600kcal는 족히 넘을 텐데, 그럼 밥을 먹지 말자.'라고 생각했다. 밥 대신 그 빵으로 저녁을 대신하면 먹고 싶었던 빵도 먹을 수 있고 살도 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포만감 없는 단 음식으로 칼로리만 채운 부실한 저녁식사는 늘 폭식으로 이어지곤 했다. 뒷이야기는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친구와의 약속 후 늦은 시간에 기숙사로 돌아와 허기를 느끼고 또 엄청난 폭식을 하겠지. 그럼에도 항상 나는 이 되풀이되는 굴레와 좌절을 망각하곤 했다.
다행히도 버스를 타고 빵집으로 가는 길에 만나기로 약속했던 친구의 전화가 왔다. 저녁을 같이 먹자는 이야기였다. 자주 보지 못하는 친구였기에 같이 저녁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한 팥빵 대신 친구와 저녁을 먹었다. 결과적으로 저녁식사를 제대로 챙겨 먹은 것이다. 우리는 분식집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쫄면, 돈가스 등 수많은 메뉴에 잠시 고민하다가 이번에도 제대로 밥을 먹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므라이스를 시켰다. 얇고 고르게 구워낸 달걀지단에 싸인 볶음밥과 달콤한 소스가 어우러져 참 맛있었다. 배가 불렀다. 편의점에 가서 1+1 하는 타로 버블티 맛 아이스크림 바도 사서 친구와 나눠 먹었다. 보라색 아이스크림의 맛은 오묘했지만 달콤했다. 친구와 든든히 저녁을 먹은 덕분이었을까. 그날 저녁 나는 기숙사에 돌아간 후에도 폭식하지 않고 잠들 수 있었다. 밥을 제대로 먹은 덕분에 과자나 초콜릿을 마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만족스러웠다.
물론 항상 그러했듯이 유혹은 있었다. 저녁을 먹어서 이미 충분히 배불렀고 지금 무언가를 더 먹으면 잘 때 분명 거북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단 것을 먹고 싶은 충동은 여느 때처럼 들이닥쳤다. 파블로프의 개가 된 기분이랄까. 빵, 초콜릿, 과자. 모두 몸은 원하지 않았지만 뇌는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결국 매점에 갔다. 그러나 스스로와 타협했다. 당 충전을 하되 속이 잘 때 거북하지 않도록 사탕 몇 알만 먹기로 결심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은 선택이었다. 썬키스트 사탕 한 봉지를 사서 그중 포도맛 사탕을 한 알 까서 입에 넣었다. 천천히 녹여 먹으니 단 것에 대한 갈망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듯했다.
이 날 식사일기를 쓰며 나는 '밥을 제대로 챙겨 먹으니 폭식을 하지 않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정말 신기했다. 그동안 벗어나지 못한 다이어트 때문에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던 것이 폭식의 원인일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사실 부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폭식의 원인이 맞았던 것이다. 건강하게 한 끼 한 끼 내 몸이 필요한 순간 정직하게 챙겨 먹는 것, 그것이 어쩌면 폭식을 벗어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이 주는 편안한 포만감에 조금 더 익숙해지기로, 밥 먹는 것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기로 나는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