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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쿠키 Nov 21. 2020

8. 내가 먹은 것을 매일 휴대폰에 기록했던 이유

폭식증 치료에서 '식사일기를 적는 것'의 필요성

 같은 폭식증 환자라고 할지라도 개인마다 폭식하는 패턴이나 그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기록을 바탕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폭식증 자가치료의 둘째 주, 나는 자유롭게 내가 '먹어야 하는 음식' 대신에 '먹고 싶은 음식'을 선택해 먹었고 그 모든 것에 대해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했다. 먹은 음식이 무엇인지, 언제 먹었는지, 그리고 그 음식을 선택해 먹은 이유 및 그 순간의 감정을 최대한 솔직하게 담아보고자 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감 없이 모든 순간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후 폭식증으로 인해 정신과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 선생님께서 처음 주신 숙제도 나의 식사를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이었다.


 꾸준히 식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까먹을 때도 있고 기록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도 있다. 또 정상적으로 식사를 마친 후에는 뿌듯하게 먹은 음식을 기록하지만 폭식을 하고 나면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라는 생각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식사습관을 꼼꼼히 적어볼 것을 추천하는 이유는 내가 먹은 것에 대해 인지하는 것, 이 왜곡 없는 자기 이해가 폭식증 치료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잊고 싶은 순간을 기록하고 마주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때는 폭식 후의 나를 다독이고 그 감정을 풀어내는 수단으로 식사일기를 이용해보자.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말들을 토해내고 그 감정을 차분히 적는 일에서 내일을 살아가는 힘을 얻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도 식사 기록을 꾸준히 적다가 며칠씩 빼먹는 일이 많았다. 폭식하고 나면 먹은 것을 되새기며 다시 적는 것이 정말 싫었다. 일기를 적으면 많이 먹은 음식량이 파악돼 더 우울해질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식사 기록을 꾸역꾸역 적어냈던 이유는 그때의 감정과, 당시의 고통을 쉽게 망각하고 싶지 않다는 '오기'에서였다. 이렇게 많이 아팠는데 나중에 괜찮아지고 다 잊어버리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그렇게 '오기'에서 시작된 식사일기는 나의 폭식증을 치료하는 데 좋은 지침서가 되어주었다.

 

 다음은 자가치료 둘째 주의 식사 기록이다.



2018.4.3


AM 8:15 양배추 브로콜리즙 1팩(야채를 잘 안 챙겨 먹는다고 엄마가 택배로 부쳐주셨다), 큰 토마토 3개, 금귤 5~6개, 아침 공복을 깨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준 아침식사였다. 습관적으로 단 것을 찾는 까닭에 배가 불렀지만 매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빵을 사서 먹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건강하게 아침을 잘 먹고 난 후여서 절제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AM 11:30 멜론맛 캐러멜 1개, 크라운 산도 1 봉지, 평소보다 늦은 점심을 기다리며 먹었다. 배가 고파서 먹었다. 과자를 한 봉지 더 먹을까 생각했지만 나중에 밥맛이 떨어질 것 같아 참았다.


정오 12:30 학식을 맛있게 먹었다. 오늘의 메뉴는 소고기 뭇국, 김자반, 김치, 밥, 두부조림. 시장이 반찬이라고 잘 안 먹던 국물에 밥을 말아서 제대로 먹었다. 엄마가 빵, 샌드위치, 오트밀 같은 것 말고 점심을 밥으로 제대로 챙겨 먹으라고 당부하셨다. 제대로 안 먹으니 저녁에 폭식하는 거라면서. 오래간만에 밥을 든든히 먹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PM 3:00 수업 중 당 떨어져서 캐러멜 1개


PM 6:30 수업 중 또 당 떨어져서 사탕 1개.


PM 8:30 학생회의 중 또 당 저하 현상으로 캐러멜 1개


PM 10:00 회의 때문에 늦은 저녁을 먹게 되었다. 저녁에 먹는 것이 속에 거북하기도 했고, 피곤해서 빨리 쉬고 싶었는데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해서 따라나섰다. 중국요리점에 가서 다양한 요리를 시켜먹었다. 깐쇼새우, 우육면, 가지 튀김, 두부튀김, 울면, 꿔바로우까지 모두 맛있었다. 이렇게 원래의 계획에 어긋난 식사를 할 때면 실패라는 생각에 항상 '에이 모르겠다' 하면서 마구 먹어댔는데 이번에는 꼭꼭 씹어서 '어차피 먹을 것 더 맛있고 건강하게 먹자'는 생각으로 식사를 했다. 조금 배불렀지만 기분 좋은 식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박증을 깨준 경험이었다. 항상 폭식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면 '저녁 9시 이후 물만 먹기', 이런 식으로 제한하고 그 시간 이후 뭐든 하나 먹으면 실패라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식욕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언제 먹든 꼭꼭 맛있게 먹기. 이전의 규칙을 버리고 새로 추가한 항목이다. 늦은 시간 먹을 수도 있어. 항상 그런 것도 아니잖아. 맛있게 먹고 내일도 또 맛있고 건강하게 오늘처럼 먹으면 돼. 스스로를 다독였다.




2018.4.4


8:00 양배추 브로콜리즙 1봉,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다른 것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아침 수업을 하는 내내 배가 고팠다.


11:00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11시에 맞추어 요즘 밥을 먹으러 간다. 거의 아침에 먹은 것이 없어서 이것이 첫끼인 셈이다. 오늘은 마파두부 덮밥을 맛있게 먹었다. 밥을 든든히 먹고 나니 다른 것이 딱히 먹고 싶지 않았다. 건강하게 먹은 기분에 뿌듯해져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오늘도 밥 제대로 잘 먹었어! 잘했지?


5:30 오늘의 수업을 모두 마치고 기숙사에 들어와서 휴식. 안에 잼이 든 맛있는 젤리랑 달콤한 망고주스 한 병을 선물 받아서 먹으며 유튜브를 봤다. 절제해서 젤리는 10개만, 음료수는 절반 마셨다. 오트밀과 율무차도 조금 먹었다.


6:30 참치마요 컵라면 진짜 먹고 싶었는데 드디어 먹었다. 맛있게 한 그릇 싹싹 비웠다. 편의점에 파는 김밥이랑 어묵 핫바도 같이 곁들여 먹었다.


7:30 조금 허전하고 부족한 느낌에 남겨둔 젤리를 다시 들었다. 몇 개만 집어 먹으려고 했는데 다 먹고, 남긴 망고주스도 모두 마셨다. 오트밀도 조금 더 먹었다. 폭식이 또 시작될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래도 완전히 이성을 놓지 않고 절제했다. 매점에 가서 빵과 과자를 한가득 사 와서 이어먹던 것은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 정도면 만족한다. 아주 잘했어.




2018.4.5


12:00 청국장찌개. 조금 국물이 찌웠지만 밥에 국물을 적셔 꼭꼭 씹어 맛있게 먹었다. 요즘은 밥이 빵보다 더 맛있는 것 같다. 빵과 면으로 채워지지 않았던 만족감이 밥으로 채워지는 기분이다.


PM 7:00 한솥에서 오래간만에 치킨마요. 마감시간 다돼가서 빨리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 급하게 먹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꼭꼭 씹어먹으려고 노력했다.


PM 9:45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지하철을 타려 하던 참에 발견한 김영모 제과점. 꼭 가보고 싶었던 빵집이 마침 보여서 들어갔다. 치즈와 깨가 든 발효빵 한 덩이를 사서 7조각 중 5조각 먹었다. 빵을 모두 먹지 않고 컨디션에 맞춰 먹을 만큼 먹고 남겼다는 것이 뿌듯했다.


PM 11:00 배에 조금 가스가 찬 듯한 기분에 파인애플 식초를 물에 타서 가볍게 한잔. 엄마는 저녁에 산이 있는 것 먹으면 좋지 않다고 하셨지만. 변비와 가스에 조금 속이 더부룩해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먹고 나니 좋았다. 20분 만에 변비도 해결! 기분 좋게 잘 수 있었다.




 폭식증 자가치료의 둘째 주는 규칙적인 식사를 하려고 노력했고, 빵이나 면 대신 밥을 챙겨 먹으며 이전에 없던 만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식사 후 포만감이 들어도 간식이 혹 먹고 싶으면 원하는 만큼 언제든 먹으며 순조롭게 한 주를 폭식 없이 보냈다. 덕분에 식사일기를 적으며 만족과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하루 발전하는 나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은 즐거웠고, 어제의 폭식 패턴을 참고해 같은 실수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폭식한 후에 식사일기를 적는 것은 고역이 따로 없다. 하루를 완벽하게 망쳤다는 패배감을 되새기는 기분은 마치 엉망인 성적표를 보는 기분이니까.


 식사일기는 결코 나의 성적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끔찍한 폭식밖에 기록할 것이 없는 하루라고 할지라도 괜찮다. 식사일기는 오늘의 나를 평가하는 성적표가 아니라 나를 이해하는 거울이니까. 식사일기를 폭식한 그 순간의 감정과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자 친구라고 생각해보자. 이러한 당부를 덧붙이는 이유는 이 식사일기를 기록하는 것이 내게도 한 때 매우 큰 스트레스를 안겨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나처럼 폭식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용기 낸 누군가가 '나는 역시 안돼.'라는 좌절을 마음에 기록할까 봐 두렵다. 내가 먹어 삼킨 그 수많은 음식을 솔직히 기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며 나 역시 그러했음을 고백함으로써 치료를 위해 용기 낸 당신을 위로하고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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