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unknown 01화

신기루 달리는

우아우아

by kieroon

생각보다 높지 않네. 신기루의 등에 안장을 얹고 오른쪽 다리를 휘둘러 올라타자마자 골반을 바로 하고 엉덩이 꼬리뼈를 안장 뒷 벽에 바짝 밀착시킴과 동시에 허리와 척추를 곧게 세워본다. 신기루의 정수리를 중심으로 내 몸의 왼쪽과 오른쪽이 최대한 대칭을 유지하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자마자 신기루가 걷기 시작한다. 올라 탄 사람이 거대해 보일 수 있는 당나귀를 닮은 말이 나올 것이라는 예감이 빗나가고. 신기루, 큼직한 몸통에 기다랗고 단단한 네다리와 겨드랑이, 땅콩 껍질 색의 반짝이는 털과 밀크 초콜릿 빛이 나는 탐스러운 갈퀴, 윤이 나는 등허리의 원만한 곡선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우아한 말이다. 우아.


양손의 새끼손가락 사이로 고삐는 가볍고 단호하게 흐르고,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상태로 잡는다. 신기루의 양쪽 입꼬리에서 내 양손 사이를 긋는 고삐의 선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다. 탄력적으로. 한쪽 발로 그의 배를 툭하고 건드리면서 가자 하고 목소리를 내면 신기하게도 그는 길고 쭉 뻗은 네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온몸으로 전달되는 흔들리면서 의도되지 않은 순수한 리듬을 최대한 감각하면서 상체와 하체가 자연스러운 본능의 작동을 한다. 재미있다. 몸의 자세를 지속할 수 있도록 안장 위에서의 균형감을 의식하며 말을 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즐겨본다. 다시는 오르지 못하게 될 신기루의 등 언저리에서 어쩐지 연민을 느낀다. 타방타방, 달린다.


신기루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 만발하는 꽃과 바람을 가르며 제법 빠르게 걷다가 목장 숲길의 모퉁이가 나올 때마다 고삐로 툭툭 당겨 방향을 신호해 주면 신기루가 알아챔으로 경쾌한 속보를 한다. 안장과 엉덩이는 친밀감을 유지하고 있으며, 어깨는 한껏 힘이 빠진 상태로 달리는 기분을 위한 훌륭한 기능을 하고 있다. 단정한 기쁨이란 바로 이런 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순수, 커다란 동물의 등에 올라 타 달리는 기쁨이 6월의 멜랑콜리를 닦아낸다. 윤이 나도록.


풀밭에 언뜻언뜻 바위 덩어리들이 박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 갓 태어나 사슴 크기만 한 - 어린 말들이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는 모습이 마치 낯선 이에게 말을 건네는 또 다른 낯선 이의 몸같이 납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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