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 겨울_마음껏 안아주세요.

그저 그런 작고 가볍고 좋은 것들을 찾아서.

by Juco



왜, 그런 날 있잖아.

햇빛은 유난히 쨍쨍하고, 팀은 승리를 거두고, 만나는 선수마다 자신의 성장을 나의 몫으로 돌리며, 코칭은 물 흐르듯 흐르니, 콧노래가 절로 나는.

젠장. 그래, 어쩐지 그런 날.



어느덧, 시즌의 끝을 코앞에 둔 지금. 약 4년 전, 어느 날의 기록이 지금의 나에게, 그보다 너에게, 그래서 우리에게. 더없는 따뜻함과 용기를 나눠준다면.




'20. 7. xx. 금. 지나치게 맑음.


지난 몇 번의 코칭에서 우리는 대부분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들을 나눴고, 오늘도 다르진 않았다. 너는 여전히 야구를 함에 있어,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들과 수많은 말들로 인해 힘겨워하고 있었다.


유독 너와의 코칭을 앞두고, 나는 늘 고민했다. 이렇게 하면 될까? 저렇게 하는 게 더 나을까? 헌데 그게 모두 너를 위한 고민이 아닌, 어떻게든 코칭을 잘 해내야 한다는 내 걱정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난 왜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이런 알아차림도 성장이라면, 성장하니 미련함을 덤으로 깨닫는다.


처음에는 자신감 있게 덤벼들었다. 뭔가 해내 보이겠다며, 지쳐있는 너는 안중에도 없이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들이밀며 너를 괴롭히던.... 나만 기억했으면 하는 것들. 많이 미안해서, 많이 부끄러운.


그렇게 주제넘은 발버둥을 겪고 나서야 간신히 깨달을 수 있었다. 네가 그 모든 것들을 타개해 나갈 수 있도록 돕기란, 나에게 벅찬 일이라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잠시라도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이 되어주는 것뿐이라는 것을. 고속도로 졸음 쉼터, 아빠들의 분리 수거장, 학교 앞 편의점 의자.


그러고 나서는 조금 편해졌던 것 같다. 너와의 코칭을 앞두고 늘 머리를 쥐어뜯던 내가 순수한 기대감과 호기심만으로 널 기다리기 시작했으니까. 이게 진짜 성장이지!



오늘은 어땠을까? 조금은 기운 나는 하루였을까? 저 문이 열리고 환한 미소를 함께 볼 수 있을까?



신기하게도 내가 편해진 시점부터 너도 조금씩 기운을 차린 듯 보였고, 머리 위를 미끄러지는 구름처럼 한시도 멈추지 않는 시간 덕분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너는 지긋한 웃음을 이따금, 수줍은 말들은 하나, 용기가 담긴 의지는 둘, 그렇게 천천히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내 녀석에게 실례일지 모르겠으나 이 표현 밖에 없다, 정말 예뻤다. 언제나 고단한 얼굴로 아무런 의욕도 보이지 않았던 네가, 어느샌가 슬며시 너를 보이니 드디어 너의 예쁨을 알았다.


오늘도 너는 크고 길게 숨을 내쉬며 몇 번인가 몸을 늘어뜨렸고, 들썩거리던 어깨와 가슴은 절로 제 너비를 찾아갔으며 또, 몇 번인가를 웃었다. 게다가 오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뭔가를 해보겠다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코칭은 전에 없이 활기가 넘쳤고, 나는 그간의 노고가 드디어 빛을 발한다고 느꼈다. 코칭이 순조롭게 마무리되며 마지막 인사만을 남겼을 때,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꽃잎이 아침 바람에 새벽이슬 털어내듯 흐드러지게 기기재를 피며 말했다. 그리고 천연덕스런 너의 마지막 한마디가 나의 모든 것을 부정하며, 빼앗아가 버렸다.




아, 경기장 나가기 싫다.
저 그냥 여기 계속 있으면 안 되요?




시합 시간에 잡힌 스케줄이었고, 코칭이 끝나면 바로 경기장에 합류해야 하는 상황에서.

해야 할 것에 집중하는 마음가짐과 그에 따른 작은 실천 행동을 도전과제로 방금 수립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내가 한껏 들뜨고 벅차오르던 상황에서.


너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시간 때우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러니 괘씸했다.


나의 표정과 태도는 바닷가 날씨처럼 돌변했다. 눈부시던 햇살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바뀌니, 곧 모두 지웠다고 생각한 '내'가 마구 쏟아져 내렸다.


씹어 삼키지도 못할 쓰디쓴 질책의 말들, 간절함이나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려는 동기부여를 빙자한 감정 협박, 더하기 근엄함과 엄격함을 교육의 전부로 삼는 캐묵은 관념을 바탕으로 코칭을 마무리해야 할 그 짧은 시간에 마음껏 선수를 몰아세웠다.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시간이 모자라기는 커녕 남았다.


너를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그러니 나는 너를 통제하며, 철저히 나를 뽐내고 싶었다.


누구도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나와의 코칭으로 네가 달라질까 궁금해하는 시선들을 느꼈다. 때문에 드디어 무언가를 도전하겠다며 변화하려는 네 모습에 나는 잔뜩 들떴고, 짙은 뿌듯함이 차올랐음이 확실하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나에게 그러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사실 나뿐이었다. 그러니 너의 마지막 말은 어리숙한 나에게 너무나 절묘했다.



어둡고 외로운, 그러나 적어도 위험하진 않은 너의 다락으로. 나는 너를 또다시 밀어 넣었다.



고루한 훈계와 다를 바 없이 코칭은 끝나버렸고, 너는 깍듯한 자세로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차갑게 식은 표정에 어울리게 살금살금 돌아섰다. 끝내 나는 너의 고개를 다시 떨구는데 성공했다. 나는 너로 하여금 도로 축 처진 어깨로 문을 나서게 했으며, 나는 내 같잖은 사고방식으로 너의 좋은 것들을 송두리째 헤쳐버렸다. 이제 만족하는가? 웃음을 거두고, 잔뜩 움츠린 몸으로, 굳은 표정 위에 경직된 눈빛을 띄우는 것이 더 나아지려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 맞는가. 네가 떠난 눈앞의 텅 빈 의자를 염치없는 눈물이 매웠다.


너로 인해 나를 뽐내고자 했던 탐욕스런 저의. 선수의 변화와 성장을 감히 내가 이뤄낼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과 우물에 갇힌 편협한 평가. 상황과 결과에 따라 의심하고 저버리는 선수에 대한 얄팍한 믿음. 그리고 유머스럽고, 즐거운 것은 노력이 아니라는 늙은 아집. 애시당초 내가 부정당하고 빼앗겼다고 느낀 것들은 나에게 조금도 있어선 안 되는 것들이었다. 사실은 되려 네가 날 도운 것이다.



좋은 기분, 좋은 마음, 좋은 생각. 그게 가장 중요했는데. 그거면 충분했는데.



행여라도, 네가 결코 반성 따위는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너는 너의 마지막 말을 비롯한 나와 함께한 그 어떤 모습에서도 절대로 후회하거나 미안해해선 안 된다. 너는 끝없이 자유로워야 하며, 나는 그것을 책임감으로 지키며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너를 진정으로 위했다면, 나는 끝까지 너의 좋은 것들을 알아볼 수 있어야 했다. 어리광, 진심, 용기, 도움, 절실, 또 그러한 많은 것들.


깊숙이 숨었던 네가 간신히 용기 내어 찾아와 주었지만 나는 놓쳐버렸다. 가벼운 농담 뒤에 숨어서 수줍게 다가오는 너를 마음껏 안아주지 못했다. 그런 내가 너무 너무 못되고 못나서, 그랬던 네가 너무 너무 대견하고 대단해서. 오늘은 지나치게 맑고, 지나치게 아프고, 지나치게 슬픈 날이었다.




초조함. 날카로움. 예민함. 불안함. 아니면 비움.


시즌의 끝을 코앞에 둔, 이 시기의 우리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너는 지금 무엇을 그리며,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행여라도 지난 내가 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너를 몰아세우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주변들에 치이고 치여, 지금 너의 좋은 것들을 애써 바꾸려 하고 있지는 않을까.


좋은 기분, 좋은 마음, 좋은 생각.


어쩌면 우리는 대단한 각오나 비장한 결심, 원대한 목표로부터가 아니라 그저 그런 작고 가볍고 좋은 것들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힘들고, 지치고, 두렵고, 불안한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다시 그런 것들이지 않을까.



작고 가볍고 좋은 것.



그러니 너와 내가 언제든 서로의 그저 그런 작고 가볍고 좋은 것들을 알아보며, 언제든 마음껏 안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곁의 누가 다시 숨어버리기 전에.







추신.

벌써 몇 년이나 지났건만, 여지껏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하지 못했네. 진심으로 미안해. 하지만 감사히도 다시 만난 너는 훨씬 멋진 선수로 성장해 있었고, 무엇보다 원래의 너를 되찾은 것 같아 정말 기뻐. 언제든 다시 와 줘. 그러니 이번엔 마음껏 안아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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