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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nD Apr 21. 2020

6만 자의 위로 문자를 쓰며

시시한 시작과 미련한 도전

 몇 개월간의 인턴생활 끝에 퇴사했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결국 정규직 전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한가로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인턴 동기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친구는 나와 달리 정규직 전환에 성공하여 현재도 회사에 잘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로부터 안부를 묻는 문자가 왔 반가운 마음에 신나게 답장했다. 그렇게 몇 번 문자를 주고받았을까. 그는 이 네 글자로, 대화의 마무리를 짓는 것이 아닌가.


 [힘내세요]


 순간 당황스러웠다. 무엇을? 왜? 이런 생각도 함께 들었다. 나는 그에게 전혀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퇴사가 속 시원하다는 듯이 말했는데, 그런 내게 힘내라니!

그의 위로를 제대로 못 알아들은 척, 나 역시 '님도 힘내요.'라고 답했다. 메신저 창을 닫고 나서는 조금 머쓱해졌다. 남들이 볼 때 내가 위로가 필요한 사람처럼 보이려나 싶었다. 그렇지 않은데. 나름 잘 살고 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는 만성 소화불량이 나았고, 또 시간이 여유로워지면서 웃음도 늘어났다. 나중에 그를 만나게 되면 요즘 엄청 잘 살고 있다고 말해야지. 그런 실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근데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가 왜 내게 힘내라고 말했는지를.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거짓말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마치 뒤늦게 덥혀진 냄비처럼 말이다. 겉으로 봐서는 괜찮은데, 만지면 뜨거워서 화들짝 놀라고 마는 그런 냄비.


 언제는 화가 치밀어, 자고 있다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기도 했다. 한참을 씩씩-거리다 다시 잠에 들었다. 그런 과정을 새벽에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렇게 울컥거리는 감정이 솟구칠 때,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정신없이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이야기를 썼다. 그러다 더 쓰고 싶어 져서 가족의 이야기를, 친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무작정 적어 내려갔다. 어느새 글은 픽션으로 변해갔고, 나는 곧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얼얼해질 정도로 타이핑했다. 글은 어느새인가 50페이지를 넘겼다. 6만 자의 글자를 적어가며 나는 가보지 못한 곳을 상상했고, 말해본 적 없는 이와 대화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면서, 묘하게 나와 닮은 듯 닮지 않는 주인공을 탄생시켰다. 그는 유약했지만 용감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만, 모험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내 취향 그대로가 담겨 있는 캐릭터였다. 나는 그 주인공이 서서히 변해가는 스토리를 쓰면서, 극을 전개했다.




 사실 나는 날 떨어트린 회사한테 화난 게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났었다. 지난날을 떠올리면서, 자꾸만 자책하고 후회했다. '왜 그것밖에 못했니.'라면서 말이다. 퇴사 직후에는 평온하게 일상을 보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것이 내 알량한 자존심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허세로 감춰진 진심은 뒤늦게 터져 나와 내 일상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글을 써 내려갔다.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속에 담긴 것들을 모조리 꺼내고 정리하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인턴 동기가 내게 보냈던 위로의 문자 같은 것이다. 스스로에게 위로를 보내는, 6만 자에 달하는 장문의 문자였다.


이렇게 시시한 이유로 시작한 '소설 쓰기', 의외로 점점 효과를 발휘했다. 정말로 속이 편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새벽에 이불을 박차고 깨어나게 되면, 그냥 그 시간에 글을 썼다. 스스로가 미워지면, 그때도 그냥 글을 썼다. 정신없이 글에 매달렸더니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 고요가 찾아왔다.


그러다보니 이 소설을 끝까지 써보고 싶단 욕심도 새로 생겼다. 내 손으로, 고난을 두려워하면서도 결국 용감히 모험하는 주인공을 탄생시키지 않았는가. 나도 그런 주인공을 닮고 싶어 졌다. 그래서 작가도 아니면서, 소설 완결을 내보겠다는 다소 미련한 모험을 떠나고 있다.


 정말이지. 시시한 시작과 미련한 도전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기대감을 품어본다. 주인공의 마지막 스토리를 쓸 때 즈음엔,  나 역시 그처럼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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