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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국 Dec 20. 2020

모든 만남의 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별자리 소설     


  이 책을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번호를 붙여 정리하고 줄거리를 요약하여 <방랑자들>을 A4 용지 두 장으로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두는 일은 불가능하리라. 단 몇 줄짜리부터 중편 소설의 길이까지 이르는 116개의 ‘이야기 조각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붙잡을 수 없는 존재다. 그나마 줄거리가 존재하는 몇몇 에피소드에서 간신히 서사의 가닥을 잡는가 싶으면 이내 작가는 서사를 마무리하지 않고 다음 조각으로 건너뛴다.

  이 소설의 주된 화자는 폴란드 출신의 방랑벽이 있는 어느 무명의 작가다. 하지만 소설이 진행되고 조각들이 각자 자기의 길을 가기 시작하면서 이야기의 초점 또한 크로아티아의 어느 섬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어버린 어느 남자로, 그리스 섬들을 돌아다니는 유람선에서 역사 강의를 하는 노교수로, 장애가 있는 아이와 외상후스트레스 증후군을 앓는 남편을 돌보는 러시아인 여자로, 여자의 질에 집착해 사진을 찍어서 수집하는, 인체 표본 제작의 권위자인 외과 의사 등으로 옮겨 다닌다.

  이들은 그나마 내부적으로는 줄거리가 존재하는 조각들이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조각 중 대부분은 여행 중 떠오른 상념들을 기록한 짤막한 메모로 보인다. 파편화된 서사들, 조각들. 일견 마구잡이로 보이는 순서와 뚝뚝 끊어지는 흐름 속에서도 조각들 사이에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까이, 종종 아주 먼 자리에서 반짝이는 조각들이 있는데 이들과 다른 어떤 조각들 사이에는 독자의 눈에만 보이는 점선이 그려져 있다.

  <방랑자들>은 독자들에게 스스로 선을 이어 보도록 부추긴다. 예를 들면 109번째 조각, <꿈속의 원형 극장>에서 화자는 꿈속에서 뉴욕의 거리를 헤매며 그곳을 “수직과 수평의 거리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서로 교차하는 덤불 속”(p.550)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조각인 110번째 조각의 제목은 <그리스 지도>다. 화자는 발칸 반도와 그 주변의 바다, 섬들이 그려진 지도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대지와 바다가 서로 대등하게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 나는 펠로폰네소스 해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손이 아닌, 위대한 어머니의 손 모양을 닮았다. 자식을 씻길 목욕물의 온도가 적당한지 확인하기 위해 물속에 담근 어머니의 손.” (p.552)     


  그리고 다시 책장을 넘겼을 때 한 페이지 가득 들어오는 것은 격자형의 도로들이 섬을 빈틈없이 메운 맨해튼의 지도다. 거미줄 모양의 삭막한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맨해튼과 다정한 펠로폰네소스 해협의 해도. 인간이 만든 지형과 스스로 만들어진 지형의 대비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순간 반짝이는 두 조각 사이에 선이 그어진다. 이것은 두 조각이 이어져서 만든 아주 작은 별자리다.

  조각들이 이처럼 가까이 있을 때는 이들을 잇는 일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116개나 되는 조각들 사이에서는 얼마나 많은 연결이 가능할까. 거기서 비롯하는 가능성의 개수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따라서 <방랑자들>을 읽은 어느 두 독자도 이것을 똑같이 읽을 수는 없다. 이 책은 조각들 사이를 자신만의 선으로 채워 만든 별자리로 수 놓인 밤하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상상해낸 연결들이 너무 자의적이진 않은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방랑자들>의 한 대목에서 말하듯 대상을 바라보는 데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토카르추크는 우리에게 자신만의 선을 이어 보라고 부추긴다.     


“그러다 갑자기 깨달았다. 대상을 바라보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걸. 첫 번째 방법은 사물, 즉 인간이 사용하는 물건을 있는 그대로, 구체적으로 보는 방법이다. (...) 또 다른 방법은 파노라마로, 더 일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경우 개체 사이의 연관성과 서로에 대한 반응을 네트워크로 파악하게 된다. (...) 신호나 기호가 되어 사진 속에 없는 뭔가를 지칭하면서, 사진의 테두리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암시한다.”(p.520)  


  단 하나의 주인공     


  <방랑자들>에는 맨해튼의 지도를 비롯하여 동서고금의 여러 지도가 소설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있다. 대부분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어느 대륙, 어느 도시의 지도인지 알 수가 없다. 가까이 들이댄 눈에서 힘을 풀고 허리를 펴서 지면과 거리를 둔다. 이들을 하나의 그림, 혹은 패턴으로 생각하고 보면 마치 점과 선, 면으로 이루어진 어떤 연체동물, 혹은 오래된 의학서적에 나올 법한 인체 신경계통의 모식도처럼 보인다.

  이 지도들은 어린이를 위한 수학 문제집 중간중간에 눈을 쉬어주기 위해 연두색 페이지들을 섞어둔 것처럼, 혹은 근시를 야기하는 독서 행위 자체에서 거리를 두고 마치 아주 높은 하늘에서 지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의 초점을 흔든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육체 또한 그런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방랑자들>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고 반짝이는 별들 또한 무수하지만 그중에서도 늑대별, 밤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라면 그것은 ‘인간의 육체’일 것이다. <방랑자들>의 화자는 각 조각의 첫머리를 다음과 같은 말로 자주 시작한다.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p.37)     


그리고 이를 잇는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만난 순례자는 조각조각 부서진 상태였다.”(p.37)
“이번에 만난 순례자는 밀랍 인형이었다.”(p.191)
“이번 여행에서 나는 샬로타의 섬세한 손길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p.402)
“이번에는 아름다운 필체로 쓰인 글귀가 참나무 선반을 장식하고 있었다.”(p.481)
“오늘 나는 드디어 도착했다. 또 다른 순례자는 지금 플렉스 글라스 속에 담겨 있거나, 아니면 다른 방에서 플라스티네이션 처리가 된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p.593)     


  이 문장들은 모두 박제되거나 고정된 인체 표본을 가리킨다. 이들은 사망한 이의 시신을 특정 화학약품을 사용하여 고정함으로써 오래 보존할 용도로 만들어진 인체 표본들이다. 어째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죽은 이의 시신에 이토록 관심을 가지는가, 그들이 왜 화자가 찾아다니는 순례자들이라는 것인가, 처음부터 왜 사람들은 인체를 부패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그토록 애썼는가 하는 문제들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다.

  블라우 박사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육체의 불멸을 염원하는 한 인간을 볼 수 있다. 블라우 박사는 만약 그에게 세상을 창조하라고 했다면 “우리에게 별 필요도 없는 영혼은 필멸로 만들고, 아마도 육체에 불멸을 허용했을” 외과 의사다. 그는 함께 잔 여자(주로 학생들)의 나체 사진(주로 질)을 찍어서 이케아 상자에다 보관하는 플라스티네이션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완벽한 기계로서의 신체를 숭배하며 그를 완벽한 상태로 보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다.

  블라우 박사는 기적적인 보존술의 발명자였던, 하지만 얼마 전 보트 사고로 사망한 몰 교수의 집을 방문한다. 거기서 그는 몰 교수의 아내를 만나고, 그녀가 유혹해오는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그는 거친 바다에서 수영하며 주름살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그녀의 태도, 햇빛으로 상해 있는 피부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는 매일 디오더런트를 뿌리고 면도를 깔끔히 하며 보습 크림까지 바르는, 늙음을 최대한 멀리하려는 사람인 것이다.

  몰 박사의 집에서 그는 놀라운 표본을 접한다. 마치 살아있는 듯이 박제된 고양이다. 배의 거죽을 열면 그 속에는 겉모습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생생한 장기들이 자리 잡고 있다. 몰 박사의 부인은 그더러 가슴의 흉곽도 열어보라고 말한다. 그가 흉곽을 열자 갑자기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소설에서 그 노래는 퀸의 유명한 히트곡 <나는 영원히 살고 싶어(I want to live forever)>라고 나온다.     


  실제로 퀸이 부른 노래의 제목과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마도 토카르추크는 이것을 알고서도 제목을 저렇게 붙였을 것이다.     


<Queen – Who Wants to Live Forever>

<퀸 – 누가 영원히 살기를 바라나요>     


There’s no time for us.

우리를 위한 시간은 없어요.

There’s no place for us.

우리를 위한 장소도 없어요.

(...)

Who wants to live forever?

누가 영원히 살기를 바라나요?

Who wants to live forever?

누가 영원히 살기를 바라나요?

(...)

Who dares to love forever?

누가 감히 영원히 사랑하려고 하는가요?     


  선분의 삶, 반짝이는 점, 닳아가는 우리의 연필     


  <방랑자들> 읽기의 막바지에 이르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연필을 들어 종이에 선분을 하나 긋는다. 시작점과 끝점을 상상하고 그 사이를 잇는다. 시선은 흰 종이 위로 걸어가는 가느다란 검정색 선을 따라간다. 없었다가, 있었다가, 다시 없다. 선분은 1차원을 따라서 움직인다. 그 차원의 단위는 시간으로 표시된다. 하나의 선분은 하나의 짧거나 긴 시간이다. 우리는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처럼 하나의 선분으로 표시될 것이다.

  한편 세상의 시간은 직선적이지 않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비롯한 계절은 순환하고, 해가 뜨고 지는 하루는 반복된다. 그것은 원형의 시간이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 원을 아까의 종이에다 몇 개 그려 보자.

  그러면 이제 종이에는 세상과 내가 있다. 그뿐인가?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나와 같은 시간을 사는 가까운 이들을 떠올려보고 선분을 긋자. 이들의 선분은 나와 어느 지점에서든 만나도록 긋는다. 한 지점에 선분 여러 개가 만나기도 하고 어떤 선분들은 평행하게 그려져서 나를 통하지 않고는 이어지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나와 만나지 않는 선분들도 있을 것이다. 근처에 그려 보자. 저 멀리에는 아예 다른 대륙, 다른 시간을 살았던 이들의 선분도 그려 보자. 이제 거대한 원들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는 별자리와 같은 그림이 나타난다. <방랑자들>의 111번째 조각, <카이로스>에서 그리는 것은 이와 같은 그림일 것이다.     


“카이로스의 경우를 보자. 그는 늘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 즉 다시 오지 않을 유일한 기회, 적절한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아주 짧게 열리는 순간이다. 또한 무에서 무로 달려가는 직선이 원과 맞닥뜨리는 바로 그 지점이기도 하다.” (p.579)


  카이로스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 신화의 신이다. 그의 앞머리는 눈을 가릴 정도로 길지만, 뒷머리는 하나도 없다. 그는 적절한 순간, 적절한 장소를 상징한다. 긴 앞머리는 정면으로 마주치는 사람이 붙잡을 수 있도록 해주지만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는 달아나 버리고 뒤에서는 도저히 그를 붙잡을 수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적절한 순간, 적절한 장소를 꿈꾸며 연필을 들고 자신만의 선분을 긋는다. 중간에 마주치는 모든 만남은 점으로 남아서 빛난다. 크기를 가지지도 않고 공간을 점유하지도 않는 이 점들이 사실은 우리가 기억하는 전부다. 우리는 선형적 시간을 살지만 비선형적 기억을 남긴다. 그 사이에 우리가 쓰던 연필은 점차 닳아서 짧아진다. 연필은 종이의 표면에서 자신을 갈아내어 흔적을 남긴다. 우리의 육체 또한 소모품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저곳으로 우리를 옮겨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위태롭고 사라지는 육체뿐이다.

  영원한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블라우 박사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부패하지 않고 질병에 걸리지 않는 육체를 염원하는 것은 만년필을 만들고 볼펜을 만들어 낸 인간의 염원과 본질에서 같다. 그러나 큰 그림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한 필의 연필, 하나의 육체, 한 번의 기회뿐이며 우리는 퀸의 노래 가사처럼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글을 쓴다. 언젠가 그 글을 읽어줄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2020년, 우리들의 육체는 바이러스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연필을 움직이는 일에는 이와 같은 방법도 있을 것이다. 비록 완벽히 성공하지는 못할지라도, <방랑자들>의 마지막 장에서처럼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서로를 기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 기록할 것이다. (...) 종이 위에 서로를 불멸로 남기고, 서로를 플라스티네이션 처리하고, 문장의 포름알데히드 속에 서로를 담글 것이다.” (p.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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