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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국 Oct 09. 2021

다시 이 얼음의 세상에서

올가 토카르추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라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을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에서 끝은 곧 시작이며, 시작하는 순간은 끝나는 순간과 일치하므로 이야기는 자신의 꼬리를 물면서 끝없이 이어진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 다 카포, 동그란 모양새로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 우로보로스. 서로의 손목에 송곳니를 박아 문 두 흡혈귀.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탄생과 죽음. 씨앗을 심기 위해 겨울의 잔해를 치우는 인간들의 쟁기질. 다시 그들의 잔해를 치우기 위해 불어오는 가을의 바람. 쟁기질한 들판 위로 쌓이는 눈.      


  그러므로 어떤 죽음을 좇는 추리소설은 결말부터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야기는 결말로 끝나지 않으며 우리는 몇 번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기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다루는 이 글은 소설의 결말과 범인의 정체, 말하자면 스포일러를 포함한다. 결말을 미리 알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 분은 부디 이 글을 읽지 마시기를.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결말을 알면서도 매일 살아가듯이, 이 소설 또한 결말을 알면서도 – 아니,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더욱 – 읽을 이유가 충분한 책이다.      


  한번 사는 일은 아쉬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곁에는 책들이 있지 않은가. 다시 살아보고 싶다면 우리는 이제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     


  겨울 


  소설의 주인공은 폴란드와 체코의 국경, 고원 지대의 마을에 혼자 사는 60대 여자 야니나 두셰이코. 어느 겨울의 깊은 밤, 주인공은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잠을 깨운 이는 이웃 주민 괴짜. 괴짜는 그들의 다른 이웃, 왕발이 자신의 집에서 죽어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왕발의 시신을 수습하러 간 괴짜와 두셰이코는 왕발의 목구멍에 사슴의 뼈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두셰이코는 왕발의 집으로 오는 길에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눈밭의 사슴들을 떠올린다. 그가 사냥한 사슴들이 그를 죽인 것일까? 이것은 사냥당하던 사슴들의 복수일까? 바닥에 누워 죽어 있는 왕발의 모습은 무척 특이하다. 토카르추크는 소설의 첫 장, <자, 주목하세요!>에서 왕발의 이 죽음에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왕발은 죽고 소설은 시작되는 이 순간의 오두막에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다.     


  “단, 그의 오른쪽 집게손가락만은 공손하게 손을 포개는 전통적인 자세를 거부하며 위쪽으로 뻗어 있었다. (...) "자, 주목하세요!"라고 손가락은 말하고 있었다. “주목! 여기 당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습니다. 당신들에게 감춰졌던 단계의 중요한 시작점이며, 특별히 주목할 만한 그런 것입니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 시각 이곳에 모여 있는 겁니다. 눈 내리는 겨울밤, 이 고원의 작은 오두막에 말이죠. 나는 죽은 몸뚱이로, 당신들은 하찮은 늙은 인간으로 말이죠.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인걸요. 바로 지금부터 모든 게 시작됩니다.”(p.26)     


  밀렵꾼이었던 왕발의 집을 정리하면서 두셰이코는 사진을 한 장 발견한다. 거기에 찍혀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두셰이코는 순간적인 적막감에 휩싸인다. 그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의 “몸은 팽팽하게 긴장했고, 나는 싸울 준비를 마쳤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면서 귓가에 음울한 통곡이 들렸다. 마치 지평선 너머 어딘가에서 수천 명의 병사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 나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들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계가 시동을 걸고 기계가 작동을 시작하는 소리. 문이 삐걱거리고 포크가 바닥에 떨어졌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p.29-30)

  사진에 무엇이 찍혀 있었는지 알게 되는 건 소설의 대단원에서다. 지금으로선 그것이 무엇이든 이제 두셰이코의 삶이 궤도를 벗어나려 시동을 걸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고원 마을에서의 죽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두셰이코와 함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번역하는 그의 제자, 디지오가 집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두 번째 살인 현장을 마주한다. 죽은 이는 마을의 경찰서장. 그는 두셰이코의 집 근처 고갯길의 오래된 우물에 깨진 머리를 처박은 채 죽어 있다. 그의 주변, 아직 녹지 않은 눈 위로 이번에는 무수한 사슴 발굽 자국이 새겨져 있다.

  경찰서에서 목격자 심문을 받고 풀려난 두셰이코는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두셰이코는 무슨 병의 증세인지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그는 반쯤 잠든 상태에서 꿈을 꾼다. 꿈은 그의 어린 딸들, 그리고 이미 죽은 그의 어머니에 관한 것이다. 또한 이곳이 아닌 국경 너머의 저곳, 아름답고 온화한 나라, 저녁이면 블레이크의 시를 읽는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인 체코에 관한 것이다.     

 

  두셰이코가 다음 마주하는 죽음은 동물의 죽음이다. 왕년에는 해머던지기로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따기도 했으며 사막의 강을 건너는 다리들을 설계하는 일을 한 두셰이코는 이곳 고원 마을에서는 초등학교 영어 교사와 도시 사람들의 별장을 겨우내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순찰 중 체코 국경 부근에서 죽은 어린 멧돼지 한 마리를 발견한다. 멧돼지는 사냥꾼의 총에 맞고는 도망치려 했을 테지만, 국경 너머에서 죽은 바람에 회수되지도, 도망치지도 못한 채 버려졌다.      


  “먹먹한 슬픔과 비탄. 매번 동물이 죽을 때마다 느껴지는 이러한 회한과 애도의 감정은 아마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나의 애도가 끝나면, 또 다른 애도가 이어지므로 나는 끊임없이 상중(喪中)이다.”(p.148)     


  두셰이코는 멧돼지의 죽음을 밀렵으로 신고하려 경찰서에 방문한다. 두셰이코의 공식적인 저항의 방식은 탄원서 쓰기다. 그를 응대하는 경찰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분노한 두셰이코가 사냥꾼들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향해 함부로 총을 쏜다고 외치며 심지어 그들은 개들한테도 총을 쏜다고 지적하자 경찰은 개들도 동물을 물어 죽인다고 말하며, 오히려 두셰이코가 기르던 개 두 마리에 대해 불만이 접수된 적이 있음을 언급한다. 두셰이코는 그가 딸들이라 부르던 개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얼어붙는다. 그는 지금은 개를 기르지 않고 있다.


  경찰서를 나오며 두셰이코는 개들의 영혼에 관해 생각한다. 영혼이 없는 동물을 죽이는 일은 범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에 관해서도. 그는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범죄를 저지른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표준이 된 세상, 아무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지 못하게 된 세상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가? 두셰이코의 목소리를, 우리는 같은 종(種)임에도 어째서 아무도 듣지 못하는가? 그에 의하면 어떤 인간의 심장도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도록 만들어져 있어 우리의 심장에 고통이 직접 전달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인간의 심장도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견딜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복잡한 정신세계는 인간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생겨난 것입니다. 진실을 환상이나 덧없는 말장난으로 포장해서 그것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는 것이죠.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찬 감옥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자에게 고통을 가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었습니다.”(p.157)     


  고통으로 가득 찬 감옥이란 이 세상 자체이기도, 그리고 우리가 갇힌 바로 이 육체이기도 하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에 등장하는 감옥의 비유는 여러 층계를 넘나 든다. 두셰이코가 죽은 이들의 운명을 되짚고 자신의 운명을 점치는 용도로 사용하는 점성술은 말하자면 땅에 발을 디딘 자가 별들을 바라보며 감옥의 구조와 질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개개인의 삶에 천체가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 그것은 문신으로 새긴 수감 번호처럼 우리를 우주 공간에 투옥한다. 거기서 탈출할 방법은 없으므로 나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여기고, 언제든 자신을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삶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기에 천체와 같이 위대하고 엄청난 대상과의 연관성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차라리 미물이 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러면 우리가 저지른 사소한 죄들도 용서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므로 나는 우리의 감옥에 대해 매우 잘 알아야 한다고 확신한다.”(p.163)     

  그래야만 우리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계절의 오고 감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진다. 시대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계절만큼은 선명하게 그려낸 이유는 아마도 이야기 속에 영원성을 포착하기 위해서 이리라. 이를테면 이것은 언제든 가능한 이야기. 인류가 있기 전에도, 있고 난 뒤에도 반복될 어떤 영원히 순환하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는 지금이라는 찰나에 만나 함께 사는 매일을 쌓는다는 것. 소설이란 그 사이에 고원처럼 솟아 있는 무대다. 우리가 사는 지평선보다 조금 더 하늘에 가까운 이 국경의 고원 마을에 봄이 찾아온다.

  두셰이코는 봄이 되어 곤충을 연구하러 찾아온 보로스라는 곤충학자를 만난다. 그는 두셰이코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인데, 두셰이코가 어떤 곤충이 유용하냐는 질문을 그에게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한다.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 어떤 생물도 유용하거나 무용하지 않아요.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적용하는 어리석은 구별일 뿐입니다.”(p.223)     


  그러므로 자연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인간이 더욱 유용하고 무용한 지 구별하는 일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두셰이코 주변의 사람들. 괴짜, 보로스, 디지오, 구제 옷집의 아가씨 ‘기쁜 소식’ 등은 변두리에 살면서 세상에 득이 되는 일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마을의 사냥꾼들, 벌목꾼, 경찰서장, 바스락 신부 같은 사람들은 이들을 무시하고 외면한다. 이들은 박쥐를 닮아서 밝은 대낮보다는 땅거미가 지는 어스름에 활동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이들은 거꾸로 매달려 있으므로 세상을 거꾸로 본다. 이들이 보는 세상은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육식은 박쥐의 시선에서 보면 너무나 이상하다. 동물의 삶 또한 중요하다는 두셰이코의 외침은 그 역(逆)이 너무나 강하게 우리의 의식 속에 뿌리 박혀 있기에 시선을 뒤집는 것만으로도 소설은 환상적 이채를 띤다.     


  어린 멧돼지의 죽음에 이어 다음 죽음은 사람의 것이다. 여우 농장과 도살장 등을 운영하던 브넹트샥이라는 사내의 시신이 숲 속에서 흰 곰팡이에 뒤덮인 채 발견된다. 브넹트샥이 모피를 얻기 위해 키우던 여우들의 털도 흰색이었다.     


  여름     


  괴짜가 속한 버섯 채집가 협회라는 곳에서 축제를 연다. 그곳에 참석하기 위해 가면을 고르던 두셰이코는 늑대의 탈을 고른다. 괴짜는 그에 맞추어 빨간 망토 분장을 한다. 축제에서 그는 채집가 협회 회장이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를 만난다. 회장은 말을 시작할 때마다 ‘사실,’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후덕한 몸에 일견 훌륭해 보이는 연설을 하는 그였지만, 두셰이코는 ‘사실’이라는 말을 남발한다는 점에서 그가 거짓말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두셰이코는 회장의 아내와 얘기를 나누다 ‘한밤의 궁수’ 전설에 대해 듣는다. 한밤의 궁수는 검은 황새를 타고 개들을 데리고 다니며 나쁜 사람들을 사냥하는 인물이다. 그는 어느 날 사람을 사냥해달라는 소년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네 토막이 난 사람을 차례차례 소년에게 돌려준다. 소년의 가족이 네 토막을 모아서 땅에 묻자 한밤의 궁수는 사라지고 개들은 이끼가 된다. 개들이 이끼로 변했다는 대목에서 두셰이코는 몸을 부르르 떤다. 두셰이코는 자신의 딸들 얘기를 들려주며 동물들의 본능적인 감각, 정의감에 관해 말한다.     


  “동물들은 정의감이 매우 강하거든요. 내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아니면 부당하게 꾸짖거나 약속을 어길 때마다 나를 바라보던 그 애들의 눈빛이 기억나요. 내가 도대체 왜 신성한 법칙을 어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렇게 지독히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곤 했죠. (...) 우리에겐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있지만, 동물들에게는 ‘세상을 느끼는 감각’이 있답니다.”(p.281)     


  축제가 끝나고 며칠 후, 두셰이코는 회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의 시체는 입과 폐, 위, 그리고 귀까지 온통 벌레들로 뒤덮여 있었으며 그는 왕풍뎅이들에 질식해 죽었다고 한다.     


  가을     


  축제에서 회장과 마지막에 함께 있던 것이 목격된 두셰이코는 진술을 위해 경찰서로 불려 간다. 이번에 그는 유치장에 구금되며 자택은 압수 수색을 당한다. 감옥 안에서, 두셰이코는 벽 너머 별들의 시선을 떠올린다. 별들은 여기에 갇힌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영원을 사는 그들은 우리를 불쌍히 여길까. 그러나 우리가 없다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것이다. 시간은 오히려 지금, 이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영원한 순환이란 무(無)와 동의어다.

      

  “별들은 정말로 우리의 미래를 알까? 그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길까? 움직임의 자율성이 배제된 채 이렇게 현재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해서?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우리가 별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작동하는 건 바로 우리 때문이니까.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으로 바꿀 기회 역시 우리에게 있다. 별들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가두었기에 우리를 도울 수 없다. 그들은 그저 그물을 디자인할 뿐이다. 그들이 우주의 베틀로 날실을 짜면 우리는 거기에다 우리의 씨실을 엮어야 한다.”(p.293-294)


  구금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두셰이코는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본다. 적갈색으로 물들어가는 풀밭이 바람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인다. 고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웅성거린다. 풀을 움직이는 것은 바람이다. 두셰이코를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나는 창가에 서서 눈앞에 보이는 풍경으로부터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잔물결을 일으키며 흔들리는 적갈색 풀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속에서 추는 그들의 춤, 그 움직임을 부추긴 대상, 그리고 모든 색조와 음영 안에 깃들어 있는 변화무쌍한 초록빛 자국들.”(p.303)     


  두셰이코의 이웃, 잿빛 안색의 작가는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고원을 떠난다. 그는 이곳에서 목격한 인간들의 – 그리고 동물들의 – 죽음에서 몰아치는 바람을 느낀다. 그 바람은 우리를 끝없이 불편케 하는 바람이다. 그는 자신이 괴물들의 틈새에서 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알고 보니 저는 괴물들 틈에서 살고 있었던 거예요.”(p.308)
  “끊임없이 울부짖는 바람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귓가에서 뭔가가 계속해서 버스럭거리고, 휘파람 소리와 윙윙 거림이 멈추질 않으니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나뭇잎이 나무에서 얼마나 큰 소리를 내는지 아세요?”(p.308)     


  다시 겨울     


쟁기질을 한 들판 위로 눈이 쌓인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두셰이코는 블레이크의 시구를 중얼거린다. 이제 도구들은 거두어질 때가 되었다. 두셰이코는 이즈음 열리는 위베르 성인을 기념하는 행사를 참석하기 위해 마을 성당을 찾는다. 위베르 성인은 사냥꾼의 수호성인으로, 원래 살생을 좋아했지만 어느 날 사슴의 머리 위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나타난 후 회개하게 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사냥꾼의 수호성인이 된 것일까? 위베르 성인을 자신들의 죄를 사하는 성인으로 만들어버린 사냥꾼들의 위선에 두셰이코는 경악한다. 그런 그의 귀로 미사를 집행하는 바스락 신부의 연설이 들려온다.     


  “하느님은 인간을 동지로 삼으셨고, 창조의 과업에 동참하게 하셨으며, 이러한 과업이 완수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냥꾼은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인 자연을 보살피는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p.331-332)     


  두셰이코는 분노한다. 그는 뻣뻣해진 다리를 질질 끄며 연단으로 다가간다. 연단 위의 신부에게 말한다.      


“이봐, 당신, 거기서 내려와. (...) 이제 그만하라고. (...) 지금 당신에게 얘기하는 거야. 내 말 안 들려? 얼른 내려오라고!”      


  동물 분장을 한 아이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축제 공연을 위한 분장이다. 무시무시하게 변한 영어 선생님을 보며 그들은 두려움에 떤다. 과연 희망은 그들에게 있을까. 분장한 아이들의 모습은 반인반수의 새로운 종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물로 분장한 아이들은 이제 막 태어나려는 반인반수의 새로운 종족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p.333)     


  두셰이코는 성당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저녁 무렵, 괴짜와 디지오, 기쁜 소식이 찾아온다. 그들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다. 따뜻한 머스터드 수프를 만들고 있던 두셰이코는 그들의 선량한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짓는다. 창가에 있던 괴짜가 말한다. 마을에서 붉은 기가 보인다. 어딘가에 불이 난 것 같다. 디지오에게 전화가 걸려 오고, 그가 말한다. 사제관이 불타고 있으며 바스락 신부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두셰이코의 친구들이 그를 찾아온 이유는 그를 탈출시키기 위해서다. 친구들은 이제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이 두셰이코임을 안다. 단서는 회장의 몸에 몰려든 벌레들, 그리고 보로스의 짐에서 사라진 벌레를 끌어들이는 페로몬 병이다. 또한 죽은 이들의 공통점, 그들이 사냥꾼이거나 사냥꾼들의 사제라는 사실이었다. 친구들은 두셰이코에게 묻는다. 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소설이 시작한 시작점이자 두셰이코의 시간이 굴러가기 시작한 시점, 그가 걸어가기 시작한 시점은 그가 왕발의 집에서 어느 사진을 본 순간이다. 그 사진에는 끝나지 않는 말줄임표처럼 늘어진 동물들의 시체가 풀밭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들의 머리 위로는 제복을 입은 사냥꾼들이 줄지어 찍혀 있다. 읽어 주기를 바라는 메시지처럼 놓인 동물들의 시신을 따라가다 사진의 한 귀퉁이에서 두셰이코는 뭔가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진다. 새하얀 털과 검은 얼룩, 언제라도 두셰이코가 알아볼 수 있는 그들은 그의 두 딸이었다.

  제복을 차려입은 사내들은 미소를 지으며 자부심 넘치는 포즈를 하고 있다. 거기에는 경찰서장과 회장, 브넹트샥과 바스락 신부가 있으며 그밖에도 병원장과 소방서장, 주유소 사장을 비롯해 우리 모범적인 시민들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의 가장자리에는 왕발의 모습도 있다.

  두 딸이 사라지고 두셰이코는 그들을 얼마나 찾아다녔는가. 그들의 운명을 알면서도 두셰이코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았던(혹은 즐겼을지도 모르는) 왕발은 얼마나 잔인한가. 그 운명적인 밤, 자신이 밀렵한 사슴으로 식사를 만든 왕발이 사슴의 뼈에 질식해 죽었다는 것은, 그가 저지른 죄에 합당한, 당연한 형벌이었다. 적어도 두셰이코에게는 그것이 정당한 일이며 섭리라고 느껴졌으리라. 왕발의 집 앞에서 두셰이코가 사슴들에게서 들은 전언은 이런 것이다. 자신들은 언어가 없으므로, 인간의 의회에서는 발언권이 없으므로 당신이 대신 말해달라. 우리의 도구가 되어 심판을 내려달라. 두셰이코는 꽁꽁 얼어붙은 묵직한 얼음 덩어리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경찰서장과 브넹트샥, 그리고 회장을 은밀히 마주한다. 그는 전국체전에서 해머던지기로 은메달을 딴 적도 있는 여전사다. 그리고 사냥꾼들의 머리를 깨버리는 얼음 덩어리, 차가운 손. ‘디 칼테 토이펠스한트’, 악마의 차가운 손. 그렇다면 사슴의 유혹은 악마의 유혹인가. 그러나 과연 이 소설을 읽고 나서도 우리는 누가 악마인지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악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선은 그 세상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p.353)



       코다     


    “모든 눈망울에 맺힌 눈물이
영원 속에서 다시 갓난아기로 태어난다.
빛나는 처녀에 의해 위로받은 눈물이
기쁨을 돌려주리니.”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中 p.362)


  두셰이코의 친구들이 떠나고 두셰이코는 약을 먹고는 잠이 들었다. 이제 친구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사건의 전말이 무엇인지 안다. 두셰이코가 일어났을 때 현관에는 디지오가 두고 간 블레이크의 <편지>가 있다. 풀잎이 끼워져 있는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블레이크의 글이 적혀 있다.      


  “별의 신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종종 그 별들의 영향력에 압도당한다. 별을 읽지 않거나 읽을 수 없는 뉴턴과 같은 사람은 또한 자신의 추론과 실험에 압도당한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모두 실수와 오류의 대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범죄의 주체가 아니라고 누가 과연 말할 수 있겠는가?”(윌리엄 블레이크, <편지> 中, p.363)     


  따라서 우리의 생이란 죄와 벌 사이에서 지속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디지오가 두셰이코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죄짓지 않은 이 누가 있겠으며 그를 벌하는 이가 따로 있겠는가. 다만 뉘우침과 억울함과 용서와 분노 사이에서 맑은 눈물이 시작과 끝이 없는 것처럼 흐를 뿐이다.

  편지를 읽은 두셰이코는 지금은 죽지 않기로 한다. 우선 그는 경찰이 들이닥치기 직전 지하 보일러실의 구석에 숨는다. 장화 소리가 거칠게 집을 뒤지고 경찰들은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다. 그들은 도대체 두셰이코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물어댄다. 그때 황급히 경찰들을 따라온, 헉헉거리는 괴짜의 목소리가 들린다. “슈제친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어.” 거짓 정보에 헤매던 경찰들이 떠나려 하자, 괴짜가 그들에게 외친다. “그 여자가 감옥에서 출소하면 결혼할 거다.”      


  이제 두셰이코는 조용히 집을 떠난다. 땅거미가 빽빽하게 내려앉을 즈음 그는 움직인다. 이제 두셰이코는 어둠이 무섭지 않다. 그는 빛나는 처녀 비너스(금성)가 이끄는 곳으로, 국경 너머 체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계선, 지평선 너머에서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가. 지평선 너머, 늦은 시각에 도착한 체코에서 그를 맞이하는 이는 어느 책방의 주인이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두셰이코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제 두셰이코는 무엇이 된 것일까? 체코, 이 너머의 세상에서 그녀는 새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 것일까? 370쪽의 삽화는 두셰이코가 이리저리 서성이며 찍은 발자국들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것이 새의 발자국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두셰이코는 새가 된 것일까. 무엇이든 실은 중요하지 않다. 고향에서 열린 자신의 장례식에 두셰이코는 친구들의 마중을 받으며 참석한다.


  “이 발자국은 누가 만든 거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왠지 좋은 신호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내 연구를 완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첫 번째 연구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의 별자리다. 나는 내 별자리를 해독하기 위해 자주 연구에 몰두한다. 나는 누구인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내 사망 날짜를 알고 있다.”(p.372)


  우리는 자신의 사망 날짜를 알 수 있을까? 이것은 점성술의 테두리를 넘어선다. 끝에서 다시 시작하며 시작하는 순간은 끝나는 순간과 일치하는 어떤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그것을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는 어떤 영혼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자신의 사망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은 날에 다시 태어난다. 우리는 그때 죽었고, 그때 다시 태어났다. 무엇이 사라졌으며, 무엇이 생겨났다. 개는 이끼가 되고 브넹트샥은 곰팡이가, 회장은 벌레가, 두셰이코는 새가 되며 동물은 인간이 된다. 고통의 감옥을 벗어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감옥 안에 – 윤회의 고리 속에 – 함께 있는 이 연약한 생명체들의 무리를 존중해야 한다.      


  알래스카 페어뱅크스에 위치한 북극박물관의 복도에는 일본인 사진가 호시노 미치오가 촬영한 북극곰 두 마리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옆에는 사진가의 책에서 인용한 이누피아트 원주민의 시가 한 편 쓰여 있다. 그 시를 여기에 옮겨 본다.     



“네 할아버지의 마지막 숨결을  
안아간 그 바람은
막 태어난 새끼 늑대의  
첫 호흡으로 생명의 숨을 전해주었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
소년이여, 너는 네가 취하는 생명에 대해 항상 기도하여라 -
너의 할아버지가 기도했듯이.
네 기도의 말들은
곧 우리가 들을 말들이다.
우리는 각자 지구의 한 표현이다.
네가 나의 삶을 위해 기도한다면,
너는 나누크가 되고,
나누크는 인간이 된다.
언젠가 우리는 이 얼음의 세상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거기서 죽는 것이
나일지, 너일지는 중요하지 않으리라.”

이누피아트 설화, 호시노 미치오의 <나누크(북극곰)의 선물> 中          


  다 카포, ‘처음부터 다시’는 코다에 이르러 끝난다. 코다의 표식, 동그라미를 가로지르는 십자가는 두셰이코와 우리가 만난 지금, 바로 이곳이다. 모든 것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알았던 두셰이코. 그러나 괴로움을 폭력으로 승화했던 그를 우리는 이제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 그처럼 우리 또한 눈물을 흘릴 줄 안다면 우리는 두셰이코를 생각하며 애도해야 할까. 그의 복수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저리치고 말 것인가. 그가 겪은 고통과 힘겨웠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면.     


  “모든 건 이렇게 작동하는 거야, 디지오. 하지만 난 알고 있어, 아직 내게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는 걸.”(p.373)


  소설의 마지막 문단은 그런 우리를 위해 두셰이코가 남겨둔 말이다. 울지 마,라고 어느 선한 목소리가 말한다. 우리에겐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어. 끝은 새로운 시작이고 너는 언제든지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으니까. 우린 다시 만날 거야. 한겨울 어느 날, 야심한 밤에 누군가 당신의 문을 두드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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