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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국 Nov 21. 2019

외로운 여행의 의미

오로라를 찾아서



  산맥 너머 강들은 북극해로 흘렀다. 오래전 평야를 갈아엎던 빙하는 군데군데 호수로만 남았다. 페어뱅크스는 강들과 빙하호 사이에 있었다. 여기서는 이틀을 머물 터라 도시 구경은 내일로 미뤄두고 우선 캠핑장을 찾았다. 나는 혹시나 밤에 오로라가 나타난다면 오로라가 호수에 비치는 반영을 보고 싶었다. 체나 호수라는 페어뱅크스 근교 빙하호 호숫가에 차를 대고 텐트를 쳤다. 어제 크서이 켄 캠핑장에서 옆 텐트에 있던 사람들 말에 따르면 오로라는  언제 펼쳐질 수 있어서 오로라를 제대로 보려면 낮에 미리 자 두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찬 호숫물 급한 빨래만 몇 개 빨아 햇볕에 널어두고는 낮잠에 들었다.



  해 저무는 호숫가. 텐트 안은 아늑하고 따뜻했다. 바깥에는 아이들이 호숫가에서 첨벙첨벙 뛰노는 소리가 들렸다.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시계를 보니 이미 시은 일곱 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으러 호숫가로 나갔다. 옆 피크닉 테이블에서 한 가족이 바비큐를 준비하고 있었다. 분홍빛 석양으로 물드는 호수 위에서는 길어지는 아이들의 그림자가 뛰어다녔다.


 저녁 식사로 소금 간을 한 아스파라거스와 훈제 소시지를 구워 먹었다. 북쪽 하늘로 떠오르는 오리온자리와 함께 어스름이 몰려들었다. 쌀쌀해지는 저녁 바람에 패딩을 겹쳐 입으며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 오로라를 보려면 도시의 빛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탁 트인 곳이 좋을 것 같았다. 삼각대와 카메라, 두꺼운 털모자와 손난로, 오로라를 기다릴 의자를 챙긴 후 나는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혼자 하는 여행이 즐겁냐고 누군가 물어온 적이 있다. 나는 즐거울 일은 없다고 답했다. 다만 무척 외로울 수는 있다고 했다. 순수한 외로움은 드물다. 한국에서 마음은 외로울지언정 몸까지 외롭긴 어렵다. 친구와 가족이 있고 해야 할 일들과 마음을 분산시키는 일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거리는 언제나 중요하다. 여행을 멀리 떠나올수록 육체는 외로움을 절절하게 외친다. 누구와 무엇이라도 얘기하고 싶다. 한 마디도 안 한지 며칠이나 되었다. 음식이 느끼하다. 매콤한 음식을 먹게 해 달라. 외로운 육체는 몸부림친다.


 외로움을 느끼는 육체는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오감을 개방한다. 느끼기 쉬운 몸이 되는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자연이 내는 아주 낮은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해변으로 쓸려오는 파도와 우윳빛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이 건네는 말. 날카로운 산맥에 찔려 피 흘리는 태양과 캠핑장의 새들이며 나무들이 건네는 속삭임. 자연의 속삭임 깊은 곳에는 낮고 슬픈 선율이 흐른다. 살아있는 것들의 운명을 담담히 읊는 고요하고 슬픈 음악이다. 인간의 역사는 작은 일부분뿐일, 아주 오래된 음악이다.


 도로 어느새 비포장으로 바뀌어 차가 위아래로 덜컹거렸다. 깜깜한 고갯길을 기어올라가자 목적지였던 올스 연못이 나왔다. 빈 캠핑장 터는 나지막한 산마루 연못을 둘러앉았다. 오로라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물결치듯 간다고 했다. 나는 연못가에 의자를 펴고 동쪽을 바라보며 삼각대를 세웠다.


 핫팩을 만지작거리며 하염없이 동쪽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가까운 별들 사이로 아까는 없었던 빛무리가 아른거렸다. 처음에는 구름 같은 희끄무레한 빛이어서 오로라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빛무리가 조금씩 움직이는 듯했다. 혹시나 싶어 사진기로 노출을 길게 해서 사진을 찍었다. 칠흑의 밤하늘, 삐죽삐죽한 가문비나무 실루엣 너머로 선명한 초록빛 커튼이 물결치며 흐르고 있었다.


 

 오로라는 지평선 부근에서 한 시간 정도 빛을 뿜어내다가 사그라들었다. 오들오들 떨며 조금 더 기다려보았지만 다시 오로라가 시작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못내 아쉬웠지만 오로라 보기, 라는 항목을 지운 것에 만족하고 텐트를 쳐둔 곳으로 차를 돌렸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오로라의 춤사위는 차창 밖 먼 하늘에서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초록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어두운 밤길을 은은히 비추며 빛무리는 남쪽으로 흘러갔다.


 체나 호숫가에 도착했을 때도 오로라는 여전히 그 우주적인 유영을 계속하고 있었다. 호수의 물결이 밀려오듯 우주 저쪽에서 밀려오는 파도들은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이어졌다. 나는 추위도, 시간도 잊은 채 수심 깊은 곳에 웅크려 앉았다. 머리를 들어 반대편 해안으로 이어지는 파문을 쳐다보았다. 부서지는 파도, 굴러내리는 음표들 사이로 잔잔한 선율이 천사처럼 내려왔다. 거장이 무반주로 연주하는 부드러운 첼로 소리가 알래스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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