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삶은 가벼운 것인가, 혹은 그래서 무거운 것인가.
영원회귀란 영원히 동일한 것이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니체의 이론이다.
사실 영혼회귀 자체가 해석이 워낙 다양하고 비유와 은유를 사용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크게는 세 가지 설이 있다.
1) 똑같은 현재가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2) 똑같은 현재가 영원히 되돌아온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는 부분인데
현재의 삶이 계속 무한 반복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몇 번이고 지금 살았던 삶을 반복해서 살게 된다는 의미이다.
3) 이 현실세계 현재 순간이 영원하다.
이 해석은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며
과거는 지나간 것이라 현재의 순간이 영원한 것이다라는 관점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보면
시공간을 초월했을 때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비디오테이프를 늘어놓은 것처럼 공존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세 해석들을 모두 다 다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재가 지니는 가치는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 소개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밀란쿤데라는 이 니체의 사상을 받아들여 재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 우리 인생이란 초벌그림은 완성작 없는 밑그림,
무용한 초벌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5pg)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현재를
최근에 '공허감'이란 주제로 한
조남호의 라이프코드 콘서트를 우연한 계기로 보게 되었다.
조남호는 '공허감'이라는 감정을 두 가지로 분석했다.
1) 공허감이란 빈 느낌을 이야기하며
반대급부에는 충만감이 있고
이것을 느끼려면 '지금 현재'에 머물러
오감을 사용해 완전히 충실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미친 듯이 노력해야 했던 때를 떠올려보자. 그것이 고3 수험생 시절일 수도 있고 취업준비를 하던 어떤 한 하루일 수도 있다.
그런 날 힘들었지만 하루가 충만했던 날을 기억해 보자.
이런 충만감으로 삶 전체를 채운다면 공허감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이러한 공허감의 간격이 짧은 사람이라고. 즉 반나절만 충만하게 쓰지 않아도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공허감의 간격이 길어서 나이 70쯤 되어서 그제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공허감을 느낄 수도 있다고.
해서 공허감이 짧은 사람은 결핍감과 괴로움을 느끼겠지만 이런 사람들이 훨씬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충만하게 채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목표,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아이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는데 한 어른이 다가가 묻는다.
"너 그 게임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목적이 뭐니?"
그럼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재밌어서 하는 건데요."
현재를 충만하게 산다는 개념은 아이들의 삶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추진해 가는 동기는 크게
‘외적동기'와 '내적동기'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외적동기'는 어떠한 보상을 위해 그것을 하는 것이다.
서울대를 가기 위해 공부를 하고 , 좋은 회사를 들어가기 위해 취업준비를 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외적 동기’이다.
'내적동기'는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껴서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어렵지만 공부가 재미있어서? 하는 것들. (이해가 되진 않지만 ㅎ)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가 목표를 성취할 때
사실은 재미있는 순간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김연아가 스케이트를 타는 것, 고3 수험생들이 치열하게 공부하는 것 들은 반드시 힘듦과 고통을 수반한다.
이러한 것들, 즉 고통스러운 것을 버티게 하는 것이 내적동기라고 이야기하는데.
아까 말했던 공허함의 주기가 짧은 사람들이 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오늘 해내야 할 것들을 충만하게 밀도 있게 해내지 않으면 공허함이 들고 이것을 해 냈을 때 충만함이 드는 것. 이것이 행복의 일종이며 내적 동기라고 이야기한다.
목적, 목표가 있는 것은 대부분 외적 동기에 해당하며 많은 한국인들은 이를 달성하면 허무함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때때로 목적과 목표가 현재의 충만함을 방해할 때가 있다고.
따라서 현재의 충만함, 오감을 활용해 살아야 하며 어떤 거대한 목표를 향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의문을 갖고 이 책을 정말 오랜만에 펼치게 되었다.
바로 이 질문에 대답을 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책이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밀란쿤데라는 체코인으로 작년에 9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는 체코인으로 체코에서 태어났으나 체코에서 거주할 때에는 '마르크스 주의자'였다. 1948년 체코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으나, 1950년 당에 반하는 행위를 했다고 하여 출당당한다. 이후 몇 번 다시 당에 들어갔다가 출당당하는 일을 겪기도 하며 그의 첫 장편소설 [농담]에는 이처럼 농담을 할 수 없는 이러한 경직된 사회적인 분위기를 풍자하는 듯한 소설을 쓰기도 한다.
이후 1968년 '프라하의 봄'을 겪으며 많은 평론가들은 이러한 쿤데라의 생각과 사상이 소설에 비유적으로 녹아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소설은 소설일 뿐 그 자체로 봐달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사생활을 노출하기 꺼려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래서 그가 프랑스에 건너와 프랑스어로 먼저 발표한 책이다.
이 책은 프랑스어, 체코어 두 가지로 쓰였으며 먼저 발표된 것은 프랑스어로 그는 소설이 언어적 제약이 없어야 한다며 심지어는 프랑스 소설로 봐달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해서 프라하의 봄 같은 정치적인 해석은 배제하려 한다.
이 소설에서 던지는 질문은 크게 세 가지인데
1) 당신은 무거운 사람입니까? 가벼운 사람입니까?
실제로 작중 인물들은 네 명으로 무거운 것으로 대표되는 인물 둘과 가벼운 것으로 대표되는 인물 둘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서사는 시간관계가 복잡하게 섞여있고
관점도 여러 가지로 나와 있어 사실 읽기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시간 순으로 이 이야기를 나열하자면
# 토마시 (가벼움)는 아버지가 없이 자라 외과의사가 된다. 그는 이혼남으로 전처는 무거운 사람으로 대표되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 접견마저 적극적으로 하지 않자 어머니와의 사이도 멀어지고 철저히 혼자가 된다. 2년간의 결혼이 끝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가벼운 사랑을 추구한다. 그에게 있어 여자는 두려운 대상이지만 동시에 갈망하는 대상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그는 '에로틱한 우정'이라고 설명하며 그러한 관계를 합리화한다.
이런 토마시는 많은 여자들과 육체적 사랑을 즐겼다. 가벼운 사랑만을 추구하던 그의 가치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 여자와 사랑은 할 수 있지만 같이 절대 잠을 자지는 않는 그의 태도였다. 그는 사랑과 성행위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반면 테레자는 (무거움) 사람으로 대표되는 인물이다. 테레자는 이혼한 엄마 밑에서 자라게 되는데, 엄마는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다양한 사람과의 관계를 즐기며 더 나은 사람을 물색하던 도중, 테레자의 아빠가 되는 , 즉 엄마가 보기에는 조건이 하염없이 형편없는 남자와 우연한 하룻밤으로 인해 테레자를 갖게 되고 어영부영 테레자의 아빠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엄마아빠 둘은 이혼하고 엄마 밑에서 자라게 된 테레자는 엄마에게 갖은 고난과 수모를 당한다. 엄마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아름답지 않고 자신의 가치가 상실된다고 여기자 자신의 딸의 젊음을 질투하며 15살부터 공부를 잘하는 테레자를 학교에 못 가게 하고 각종 일을 시키며 그 돈을 착취하는 등 그녀를 못살게 군다. 이러한 테레자가 유일하게 하는 일은 호텔의 카페에서 일하면서 시간이 날 때 책을 보는 것.
그녀는 자신을 구원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필연을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2) 삶의 결정적인 것은 우연에 의해서 일어날까? 필연에 의한 것일까?
이러한 토마시는 우연한 계기에 다른 외과 의사를 대신하여 일을 하러 보헤미아에 가게 된다. 여기서 우연히 테레자가 일하는 카페에 가게 된다.
하지만 테레자는 늘 보던 시시덕한 이야기만 늘어놓던 남자들과 다르게 책을 읽고 있는 토마시를 보며 운명임을 느낀다. 그녀는 토마시와 한 시간 남짓 같이 있었을 뿐이지만 그에게서 운명을 느끼며 열흘 뒤 그가 있는 프라하에 짐을 싸서 갔다.
그녀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토마시의 집에서 사랑을 나눈 테레자는 또 우연한 계기에 아팠다. 토마시는 사랑을 나눈 이후 같이 자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아파서 잠에 든 테레자를 보며 강가에 떠내려온 아이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재워주기로 하며 둘은 결국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토마시의 에로틱한 우정, 즉 가벼운 사랑들은 계속되며 이 과정에서 이 과정에서 테레자는 괴로워한다.
#사비나(가벼움)의 상징으로 토마시의 오래된 에로틱한 우정을 즐기는 여인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예술적 감각을 지닌 화가 여인이다.
상징적 의미를 지닌 모자와 속옷을 즐겨 입던 사람으로 모자는 높은 직위(남성성)를 상징하고 속옷은 원초적인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그녀의 자유로움을 보여준다.
그녀는 공산주의자로 대표되는 아버지와 조국을 버리고 떠나온 사람으로 스위스로 망명한다. 그녀에게 배신이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진지한 것을 버리고 늘 흥분되는 것과 열정을 쫓는 가벼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 마지막으로 프란츠는(무거움)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학문을 업으로 하는 대학 교수이다. 그는 사바나를 만나기 전에는 모범적인 가장이자 남편이었으나 사비나를 만나고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깨달으며 자신이 배운 학문적 철학은 이론에 있지 않고 삶에서 실천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그는 부인을 오랫동안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 사실을 속이고 살고 있다는 모순된 생각을 버리고자 부인에게 이별을 고하고 사비나와 미래를 꿈꾸며 집을 나오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사비나는 자신을 떠나고 방황하며 괴로워하게 된다. 그는 이후 어린 제자와 함께 살게 되지만 마음속으로 사비나를 계속 그리워한다.
그는 늘 꿈꾸어왔던 세계의 평화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캄보디아에서 열리는 평화 행진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비나가 공산주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기에 그녀가 알면 좋아하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곳에서 강도의 습격을 받고 목숨을 잃게 된다.
이 소설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데 결과만 말하면 토마시와 테레자는 공산주의를 피해 시골로 내려오게 되고 토마시는 의사직을 그만두고 창문 닦는 일을 하면서 진정한 자유와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 테레자와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란 걸 깨닫지만 읍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둘은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이 또한 저자가 가진 삶의 무거우면서도 반대로 어쩌면 허망해 보이는, 삶의 가벼운 측면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새드 엔딩 같은 이 소설의 마지막은 사실 시점이 왔다 갔다 하며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책 자체의 마지막장은 그리 슬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해피엔딩과 이들의 성숙 과정이라고 볼 수 도 있겠다.
# 테레자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갯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이란 우리는 마지막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 358pg)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영화 '클로저'와 '헤어질 결심'이 생각났다. 가벼움을 추구하는 토마시는 삶의 폭풍 안에서 누구보다 무거운 삶을 살게 되고 우연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의지 (테레자의 인내나 사랑)으로 필연이 되기도 하는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 흑과 백, 회색지대는 없는 것인가?
그가 말하는 '키치'라는 것.
현대의 키치는 싸구려의 , 혹은 진짜를 따라 하는 모조 내지는 b급 그러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말하려고 하는 키치는 '우리가 무조건 당연하다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키치라고 정의한다.
예술에서도 고상하고 숭고한 것만 이야기해야 하고
사랑이나 그 밖의 것을 이야기하면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키치라고 생각하거나 권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을 키치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포장, 위선, 가식 들을 키치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비틀어서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현실을 충실히 살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거짓말 같은 것이 키치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 건강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거나 하는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 마저도 우리의 고정관념이고 이 역시 키치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술은 고통스럽더라도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모두 같은 생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키치라는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전체주의에서 심는 신념 같은 것들일 수 있다. 그들은 보여주고 싶은 것은 확대해서 보여주고 숨기고자 하는 것은 감추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키치는 다양성을 무시하고 이분법적 사고를 심어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옳은 것과 그른 것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얻고 싶었던 해답.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삶의 목적을 설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인가?
이토록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이 되기도 하며 가벼운 것이 무겁게 되기도 하는 것.
우연이 필연이 되고 필연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우연일 수 있는 것.
이것이 삶이라면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한번 선택한 삶이 계속 반복될 때최상의 선택을 하는 것.
그것은 앞뒤 안 보고 지금 안에 치열하게 사는 것.
오감으로 온몸을 세상에 내던지는 것.
오로지 그것일 수 있겠다.
아니,
어쩌면 삶의 목적을 설정해야 한다, 아니다도
이분법 적인 논리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삶의 파도에 의해 지속적으로 바뀔 수 있는 유연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또한 키치 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