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시작은, 사무적으로 말하자면 일과의 시작은 노트북의 절전기능이 해제되면서부터다. 필요한 프로그램들이 몽롱함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면 곧 방송할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클로징을 작성한다. 기가 막힌 문장력을 자랑하는 담당작가가 그날의 주요 내용 예고가 포함된 오프닝과 본문을 전달해 주기 때문에, 시간조절용으로 혹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마무리 쿠션용 원고를 쓰는 것이다. 날씨와 어울리고 지역의 이슈와 어울리는 구어체 문장을 한 줄 한 줄 입력하다 보면 결국 일상을 여는 건 대화고 소통이구나. 그래서 작고 잦은 설득들이 오늘도 오고 가겠구나. 희뿌연 늦가을 공기가 푸르스름한 장막을 걷어가는 늑대와 개의 시간이 갈수록 무뎌지는 머리를 서늘하게 자극한다.
다음은 사내 인트라넷망 접속. 결재할 것이 있는지, 업무 메일이 몇 개나 도착해 있는지 확인한다. 그러고 나서는 게시판을 휘 둘러보는데, 경조사란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각별한 선후배, 동기들의 경사에는 축하할 준비를 갖춰야 하고, 애사나 조사에는 안타까움을 나눌 태세를 갖추기 위해서다. 간격은 불과 한 줄이지만 기쁨과 슬픔의 격차는 하늘과 땅이다. 모르는 사내 커플의 결혼식 청첩장이 첨부된 한없이 밝은 공고가 들떠있고, 바로 아랫줄에는 불치병으로 부인을 상실했다는 단장의 고통이 절절한 부고가 무겁게 눌려있다. 하루에도 몇 건의 경사와 조사가 노트북 화면 속에서 업데이트되면서 시덥지 않은 뉴스 단신의 활자들이 무심하게 대체되는 느낌이다. 누가 방송국 아니랄까 봐.
한낮의 태양이 더 맥을 못 추기 전에 가을의 꼬리를 잡아채야겠다. 강원도 가을의 꼬리는 빛으로 충만하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의 초입
인제로 간다. 참 넓은 강원도다. 강릉에서 출발해 원대리까지는 한 시간 반. 그것도 막힘없이 내달려서 걸리는 시간이다. 소양강과 한 몸이 될 운명인 내린천과 더불어 인제의 상징이 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계절에 관계없이 상림객(賞林客)을 유혹하고 있다. 자작나무의 숲은 입구에서 꽤 거리가 있는 편이다. 위 사진의 오른쪽이 원정임도 윗길인데 포장도로를 따라 원대봉 정상부까지 오를 수 있는 비교적 편한 코스다. 그렇다 해도 자작나무들이 군집을 이루는 별바라기 숲까지 한 시간은 족히 걸리기 때문에 분명 등산은 등산이다. 겨울에는 아이젠 장착을 하지 않으면 입산이 아예 금지될 정도니 만만하지 만은 않은 탐방이다. 임도 윗길이 그나마 축복인 것은, 가열차게 이어지는 오르막은 별바라기 숲까지의 전체 코스 중 3분의 2 정도. 이 지점의 깔딱 고개를 지나고 나면 완전한 평지에 가까운 숲길이 종착지 별바라기 숲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고통을 겪은 무릎과 장딴지는 경사도 제로의 행복에 겨워 그간의 중력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상쾌할 수밖에 없는 나머지 3분의 1을 내달리면 마침내 그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자작나무의 흰 수피와 설경의 순백이 시너지를 방출하는 겨울의 숲은 이승을 망각할 정도의 환상을 주지만 11월 앞머리의 숲에는 순박하게 응축된 빛이 자잘거린다. 상록의 나무들과 대비되는 자작나무의 우윳빛은 믿음직스럽다. 이젠 나무의 꼭대기 부분 가지에서만 팔랑거리는 노란 잎들이 대견하다. 샛노랑이 아닌 연둣빛이 섞인 차분한 톤의 노랑이다. 이름부터 적적한 '페일-옐로(Pale-Yellow)'인 것인가. 가라앉은 노랑의 잎들이 바닷속 정어리떼의 비늘처럼 제각기 빛을 반사한다. 경추를 최대한 늘려 나무의 정상을 바라본다. 헤실거리는 바람에 노랑잎들은 각도를 달리하며 춤을 추고 있어서 망막이 간지러울 정도다. 눈이 부시다가 부시지 않다. 곧 없던 것이 되어버릴 빛의 장난이다. 땅 속 거름이 되어버릴 무력한 존재들의 간지러움이다. 이 무력한 것들의 가녀린 군무를 감상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시련의 계절인 순백의 겨울에 존재감을 내뿜게 될 존재, 주인공으로의 등극을 앞두고 극도로 움츠리고 있을 늦가을의 자작나무를 쓰다듬는다.
아래에서 위로 감상을 하다 보니 세로로 찍힌 사진이 많다. 쇼츠에서 보던 그 구도다. 인제의 자작나무 숲에서는 모두가 MZ가 된다. 수피의 질감에 정신을 빼앗기다가 무작위로 흩뿌려진 빛의 흔적을 탐색한다. 세로의 구도는 나무의 수직성을 해치지 않는다. 세로로 서 있던 나와 자작나무, 그리고 사진은 한 몸이다. 냉정하고 폐쇄적인 세로의 이미지는 별바라기 숲에서 세련되고 세밀한 풍경화로 바뀌는 것이다.
세상 어떤 나무가 이렇게 감성적일 수 있을까. 감성적인 사람만이 상대방을 공감의 연못에 빠지게 할 수 있다면 자작나무의 몸통 속엔 엄청난 감성 고갱이가 박혀있음이 틀림없다. 수피를 문지르면 묻어 나오는 하얀 가루는 그 증거다. 포화된 감성을 감당하지 못한 자작나무는 단단한 껍질의 바깥으로 자신의 응어리를 떨쳐내는 것이다.
원래 소나무로 가득했던 정상부의 숲은 솔잎혹파리 피해가 극심해지자 자작나무로 대체되었다. 1995년까지 끈기 있게 심어진 자작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뻗어가며 지금의 환상적인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냉대기후에서 번성하는 자작나무의 특성으로, 국내에서 군락지를 형성할 수 있는 곳은 강원도밖에 없다. 다른 곳에서 따라 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수종을 조림목으로 결정한 산림청과 자치단체에 경의를 표한다.
자작나무는 관상의 기쁨과 별개로 쓰임새도 월등한 수종이다. 기름기가 많아 습기에 강하고 불이 수월하게 붙는다. 오죽하면 '자작자작'하고 야무지게 타들어가는 소리가 나무의 이름이 되었을까. 껍질에 함유된 성분은 진해, 거담제에 탁월한 효과가 있어 빻아서 약으로도 쓴다고 한다. 그뿐인가, 삼국시대에는 껍질을 종이 대용으로 삼았다. 국보를 품은 신라 천마총의 천마도도 자작나무 껍질 위에 그려진 것이다. 신라의 말은 자작나무 껍질의 표면에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었다. 높은 강도와 내구성을 가진 목재로 사랑받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러니까 자작나무 숲에선 감사하고 또 감사해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자작자작. 늦가을의 감성과 감사가 타들어가고 있다.
인제 기적의 도서관
짧아진 해가 그림자의 방향 전환을 재촉한다. 아직은 쨍한 남빛 하늘이지만 곧 주홍의 띠가 지평선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지난 여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주홍은 진보라색으로, 보라는 먹빛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사람의 공간이지만 자작나무 숲의 감동 직후라 해도 정서의 이물감이 희박할 곳으로 간다.
인제읍내 기적의 도서관은 진입하는 걸음부터 해방감 가득이다. 내부에서도 그대로 드러날 원형 구조 건물은 배경의 산세와 다툼이 없다. 천마도를 담지한 자작나무 아닌가. 자작나무빛 도서관 속 자작나무 종이의 후예들은 어떤 대열로 놓여 나를 영접해 줄지 심장이 쿵쾅거린다. 안으로 들어가자.
인제 기적의 도서관 내부
놀랍다. 둥글 둘러선 수많은 책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나에게 비춘다. 이어서.
여기는 우리 책들의 우주선이오, 어서 탑승해 저 멀리 태양계 너머로 같이 독서 여행을 떠나지 않겠소?
살벌한 버전.
용기가 가상하군. 책들의 콜로세움에 감히 들어오다니, 당신 수준으로 감당 안 될 책들이 많을 텐데, 어디 한번 겨뤄보시겠소?
말을 걸어온다. 희미한 어지럼증이 도진다. 내가 인제에서 꿈을 꾸고 있나. 원으로 나를 감싸는 형국이라 더 몽롱한 것인지. 눈을 힘껏 감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삶의 노을이 손톱만큼은 보이는 나이가 되면서 물리적으로 무얼 꼭 가져야겠다는 집착은 적잖이 내려놓게 되었다. 말과 글에도 책임을 져야 하니 예외는 둬야겠다. 책만 빼고는 그렇다는 거다. 빨간 줄을 쳐놓았으니 언젠가 다시 찾아보겠지. 글을 쓸 때 참고하려면 옛날 책들도 다 가지고 있어야 해. 그럴듯한 이유를 들먹거리며 소유욕을 꽃피우고 있다. 실은 거실 한 면에 늘어서 있는 박제된 도서들을 바라보는 포만감이다. 쉽게 말해 자기만족.
그래서 도서관을 찾는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깨닫는 것이다. 빌린 뒤 반납해야 하는 걸 질색하는 버릇은 마치 머릿속에 들어온 지식까지도 반납하는 기분이 들어서가 아닐까. 그만큼 제대로 꾹꾹 눌러, 꼭꼭 씹어 읽지 못했다는 뜻이다. 기적의 도서관 서가를 채운 수많은 책들이 어리석은 소유욕의 화신을 나무라는 듯하다. 자작나무 군락을 연상케 하는 도서관의 기둥 연합은 읽기의 엄중함을 수직으로 눌러 경고하고 있다.
인제 기적의 도서관 심민석 관장
공간의 충격에서 벗어나니 거스러미 같던 불편함이 도진다. 여기가 기적의 도서관이라고? 설마 한참 전 MBC 예능 프로그램 <느낌표>의 코너「책 책 책을 읽읍시다」에 등장했던 그 기적의 도서관? 굳이 그 이름을 따라 붙였어야 하나? 검색해 보니 첫 방송이 2001년이다. 국민 독서 장려 혹은 '계몽'의 일환으로 매주 권장도서를 선정하고, 기금을 모아 문화의 혜택이 절실한 지역에 도서관을 건립해 주었던 프로그램. 예능과 교양이 버무려진 「책 책 책을 읽읍시다」의 임팩트는 상당해서 '기적의 도서관'이란 말은 지금 들어도 친숙하다.
그래도 그렇지, 그건 그거고. 언제 적 기적의 도서관이란 말인가. 예능의 청동기 시대 소산인걸. 2023년에 완공된 도서관에 그런 추억의 이름이 붙었다는 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물어봐야지 그럼.
인제 기적의 도서관 2층의 사무실에서 심민석 관장을 만났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 기적의 도서관이 맞았다. MBC와 건립사업을 함께 했던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이 방송 폐지 이후에도 지역의 자치단체와 협력해 기적의 도서관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2003년 11월 전남 순천에 처음 탄생한 기적의 도서관은 인제에 2023년, 부산에 2024년 설립되었다. 21년 동안 18곳이 지어졌으니 거의 해를 거르지 않고 사업이 지속된 셈이다. 캠페인 방송과 함께 슬쩍 사라지는 공익사업이 얼마나 많았던가. 기적의 도서관 건립사업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다만 예전처럼 전방위적 도움은 받지 못한다고 한다. 인제의 경우는 연세대학교 건축과 이상윤 교수팀의 설계 기부가 있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3천 제곱미터 작품의 설계에는 얼마나 값진 품이 들어갔을까. 그것만으로도 한량없는 보탬이었겠다. 교수님에게 명예군민증을! (이미 수여했다면 강원도민증을!)
설립은 그렇다 치고, 내심 불안한 마음에 접촉불량으로 오작동이 난 듯 머뭇거리던 입술이 마침내 떨어진다.
"다 좋은데... 인제군민으로 이 넓은 공간이 유지가 될까요?"
진실로 기적의 도서관이 영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조심스러운 질문에 돌아오는 거침없는 답변.
"많이들 오세요, 오늘은 많이 안 계시지만 주말엔 최소한 80퍼센트는 자리가 차고, 동아리실은 들어가기도 쉽지 않아요."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어서 빈자리가 많았던 것일 뿐 평소 도서관은 인제에 사는 MZ들로 채워진다는 설명이다. 거기에 지역의 군인들도 제법 눈에 띈다고 하니 이 멋들어진 장서의 보고가 쇠락할 위험성은 커 보이지 않았다. 탄력을 받아 기적의 도서관이 세워진 뒤 가장 뿌듯할 때가 언제냐 물었다.
"아이들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키워보려고 대도시 학부모님들이 이곳저곳 탐방하시는데요, 기적의 도서관을 보시고 나서 인제에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실 때죠."
이 정도면 잘 키운 도서관 하나가 마을의 형태를 바꿀 수도 있겠다 싶다. 괜스레 질투가 나 공격적인 질문으로 도발을 했다.
"그래도 인제군민만 이용하기엔 너무 아까운 시설인 것 같은데요?"
오늘 공격 성공률은 제로다.
"아뇨, 대부분 도서관들은 책이음서비스에 등록돼 있거든요, 거기 가입하신 분들은 모두 이용 가능하세요."
오케이. 인정.
인문학 강연, 마술 공연 등의 문화 프로그램 개최와 미디어아트실 설치, 무엇보다 고루하지 않은 장서의 구비는 기적의 도서관이 인제의 새로운 명물로서 하등의 부족함이 없음을 증명한다. 강원도의 모든 시, 군에 개성 넘치는 대표 도서관이 하나씩 서 있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울 것인가. 이곳에서 빌린 책에는 자작나무의 서늘한 향기가 담겨있을 듯하다. 공유의 선한 본능이 소유욕의 어리석음을 내리누른다. 도서관은 아름답다.
인제 기적의 도서관 내부, 미디어아트실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한 냄새가 몇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절반 꼴로 공감할 거고, 절반 꼴로 고개를 저을 것이다. 코끝이 까매지도록 킁킁거리며 맡던 종이신문의 화학적인 냄새, 이와 비슷한 계열의 분자가 후각을 자극하는 주유소의 기름 냄새가 있고, 갓 발행된 책에서 나는 묘사하기 힘든 강박적인 향기가 그것이다. 중독은 폐해를 가져오기 마련이어서 단어 자체에서 공포가 엄습하지만 인쇄된 종이 냄새로의 중독은 스스로 만들어낸 달콤한 늪에 기꺼이 빠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냄새는 자기 자신이다. 기적의 도서관은 가슴 설레는 종이 중독의 총합이고 활자 중독자들의 성전이다.
내린천의 정서는 독보적이다. 강의 지류 중에서는 가장 거침없는 이미지라고 할까. 머뭇거림이 없어 되레 처연한 흐름이다. 원시의 고통을 담고 운명을 따라 치고 내려갈 뿐이다. 차고 넘치는 이야기가 수면 아래에 있지만 일언반구도 없이 지나쳐버린다. 궁색한 구석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고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인제의 내린천은 굽이치는 곡면도 직선으로 돌파해 버리는 비장함이다. 강원도는 내린천을 버릴 수 없다.
쇄서포의(曬書胞衣).
책과 옷을 볕에 말리고 싶은 하늘이다. 더구나 가을 햇살이다. 눅눅해진 표지는 소독이 되어 풀 먹인 듯 빳빳함을 자랑할 것이다. 책에 물이 튀면 안 되니 내린천변은 피해야겠다. 산을 올라 자작나무 숲에서라면 좋겠다. 늦가을의 성긴 나뭇가지들은 선물 같은 햇줄기를 가로막지 않을 것이다. 자작이 담지한 북국(北國)의 향기가 들큰한 페이지마다 콕콕 들어찰 것이다. 나무는 책이 되고 책은 나무가 된다. 그러니 책 말리기의 유토피아는 여기, 인제가 틀림없지 않은가.
내린천을 내려다보고 책을 스캔하느라 거북목이 되었다. 깊어진 하늘을 다시 올려다본다. 은근한 통증은 경추의 피로가 풀어지고 있다는 신호다. 통각이 사라질 때쯤 각도를 내려 시야를 넓힌다. 겹으로 구분된 숲들이 전경을 풍요롭게 한다. 저 자작나무 숲 깊숙이엔 사슴이 뛰어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매하고도 탄성 있는 그들의 도약은 나무껍질에 반사돼 반짝거릴 것이다. 애당초 이곳은 사슴의 땅이었다.
'인제(麟蹄)'는 사슴의 발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