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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Jul 26. 2022

Chapter1 오멍가멍
-비록 정신없는 산책일지라도

애월읍 수산리







  느긋한 산책이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웃에 사는 후배의 집으로 느지막이 맥주 한잔하러 가는 기분 좋은 걸음을 제외하면, 시골에 터를 잡은 뒤 일상이 될 것 같았던 유유자적한 산책은 자주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퇴근 후 기진맥진한 몸뚱이를 건사하지 못해 항상 집 안에만 웅크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 꼴로는 산책을 나갔으니까. 무슨 말장난인가 싶어도, 그 산책이 느긋하지 않고 정신 사나웠다는 점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 모든 건 사람을 제외하고 내가 가장 미안해하는 대상인 이 녀석 때문이었다.    

입양되기 직전인 2016년 8월쯤의 리내.     


제대로 훈련을 시키지 못해 리드줄을 연결하자마자 냅다 뛰곤 하는 녀석이다. 리내의 속도를 따라가기 힘든 건 당연했지만 급정거하는 순간이 어찌나 곤혹스럽던지. 개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멈추는 이유는 순간적으로 집중할 냄새를 포착해서라고 한다. 냄새를 맡는 행위 자체가 견공들의 스트레스 해소에 큰 역할을 한다고 하니, 왜 갑자기 그쪽으로 가냐고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제주의 5월은 감귤꽃 향기가 넘실거리는, 황홀하기 그지없는 시간이다. 정신없던 우리 둘의 산책이 더없이 행복해지는 계절이다. 봄날 제주에서는 과수원으로 들어찬 시골의 마을길을 걸어보시라. 아무리 숨이 헐떡이는 고속의 산책일지라도 감귤꽃의 감미로움을 들이마시며 가는 길은 충분히 낭만적이다.    

향기를 뿜어내는 감귤꽃      


냄새를 맡는 것, 향기를 감지하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최소 10만 배에 이르는 탐지 능력을 가진 개의 후각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사람의 후각은 아련한 ‘기억’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오감의 하나라고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분명 어떤 냄새나 향기를 맡고 기억 속 공간이나 사람을 떠올린 경험이 있을진대, 시각,청각과 달리, 세밀하고 원초적인 감정들을 속속들이 재생해주는 기능은 후각만이 가진 능력이 아닐까. 뇌과학자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다른 감각들은 중간 뇌의 앞부분에 위치한 시상하부를 거쳐 외부의 정보를 전달하는 데 비해, 특정한 냄새와 향기는 유일하게 시상하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후각 상피세포로 향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후각 상피는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가까이에 있어 해당 냄새와 관련된 특정 기억을 환기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뇌 속의 이런 복잡한 감각 처리 과정을 알지 못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후각은 추억을 살려내고 추억은 그날의 감성을 동반하며, 감성은 또 다른 상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우리 모두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후각이 추억을 살려내는 동시에 감성과 직결된 감각이라면, 향기가 동반된 산책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힐링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향기는 꼭 달콤한 꽃의 향기일 필요는 없다. 나무가 뿜어내는 청량한 향기일 수도 있고, 낙엽을 태우는 깊이감 있는 냄새여도 좋을 것이다.     

가을에는 세상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은 냄새가 난다. 낙엽, 불타는 나뭇가지 더미, 즉 영원하다고 생각했지만 끝나가는 것들에게서 나는 냄새 말이다.-프리모 레비     

이탈리아의 화학자이자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긴 동서양을 막론하고 낙엽 더미를 걸으며 들이마시는 향기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도 같다. 후각의 소용돌이 후 둥둥 떠오르는 감성과 상념에도 공통분모가 있지 않을까. 역사 속에서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향기의 종류를 정리해보는 것도 매력적인 작업일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저런, 일 년 내내 태양이 작열하는 적도 지방과 떨어질 나뭇잎조차 없는 극지방에서는 낙엽 태우는 냄새를 설명하기가 만만치 않을 성싶기도 하다.      

  

애월읍 수산리      


애월읍 수산리는 관광객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애월읍 한복판의 이 마을은 바닷가도 아니고 깊은 중산간도 아닌 ‘적당한’ 해발에 자리하고 있다. 제주에선 흔치 않게 저수지를 품고 있는 마을이라, 높은 지대에선 바다와 저수지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물과 산이 좋아 ‘수산리(水山里)’라 부르니 이름만으로도 자연의 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임이 증명되겠고, 옛 이름인 ‘물메골’이 더 정겹게 느껴지는, 전형적인 제주의 시골 마을이다.

관광객들이 수산리라는 곳을 가보았다고 한다면 아마도 ‘성산읍’에 있는 수산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성산일출봉 등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항공기의 하강 소리를 제외하고 조용하기만 한 애월의 수산리와 달리 성산의 수산리는 제2공항 건설 사업에 따른 갈등을 방어막 없이 그대로 맞닥뜨려온 곳이다. 애월이건 성산이건 제주의 아름다운 ‘물’과 ‘뫼’가 온전히 지켜질 수 있는 수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    

수산리 곰솔     


수산리의 자랑인 천연기념물 제441호 수산리 곰솔의 모습이다. 4백 년 이상의 수령에 둘레가 4.7미터에 달하는 당당한 체구의 소나무로, 나무의 껍질이 검기 때문에 ‘흑송’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소나무가 유명해진 이유는 무엇보다 저수지를 향해 뻗어 있는 수형(樹形) 때문이다. 수면을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는 곰솔의 밑동보다 2미터나 낮게 처져 있으니 독특한 형태를 가진 것은 분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곰솔’이란 이름의 유래.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백곰의 형상과 비슷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전체적인 모양은 그럴듯해 보이는데 왜 하필 ‘백곰’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제주에 곰이 번식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만약 그랬어도 반달곰 정도가 아니었을까. 북극에 살며 코카콜라를 마시던 폴라베어가 제주 애월에 갑자기 출현했다고 상상하니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다. 그나저나 만약 산책 도중에 북극곰과 마주친다면 리내 이 녀석이 주인을 보호해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기대하는 것이 잘못이겠다. 재빠르게 도망가 버리길. 나는...엎드려 죽은 척해야겠다. 옛날 그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산책을 하며 벌어진 명사의 에피소드들도 있다. 그중 인상적인 것은 괴테와 베토벤의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던 체코의 북서부 온천 휴양지, 테플리체에서의 일화다. 서로를 향한 가득한 존경으로 어느 날 이 아름다운 도시를 함께 거닐게 된 괴테와 베토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비가 시녀들을 대동하고 그들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괴테는 공손히 모자를 벗고 허리를 굽혀 황비에게 인사를 한 반면, 베토벤은 뒷짐을 진 채 허공을 바라보며 지나갔다고 한다. 나중에 괴테가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묻자 베토벤은 “그 사람들이 나에게 인사를 해야지 왜 내가 인사를 해야 하느냐”라고 답했다는 후문이다. 베토벤은 특유의 뻣뻣함으로 괴테의 속물성을 비판했고, 괴테는 베토벤의 유연하지 못한 일면을 나무라며 이후에 둘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고 하니, 산책도 이처럼 동반자를 잘못 만나게 되면 해악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겠다.

테플리체에서의 일화, 괴테와 베토벤의 대조적인 모습    


익숙해진 동네의 길들이 늘어남을 실감한다. 올레길 16코스와도 겹칠뿐더러 사찰 순례길과도 접해 있는 구간임에도, 순례객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잦지는 않아 더 호젓한 산책길이다. 개와 함께 내달리지 않고 찬찬히 걸어도 된다면, 상념과 사색에 꽤나 안성맞춤인 공간의 연속인 것이다.

리내와의 산책을 거르지 않으려 애를 써보아도 퇴근 후 몸이 피곤할 때는 포기할 때가 많았다. 꿈꾸던 전원생활을 해나가려 하니 그만큼 신경 쓸 일도 많다는 변명을 하곤 하지만, 든든하게 집을 지켜주는 리내에게는 핑계 댈 구석이 없는 것이다. 요즘 들어 주인의 체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지,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속도 조절을 해주는 듯 보인다. 얼마나 대견한 녀석인가. 배려에는 배려로 답을 해주는 수밖에.     

그래, 뛰어야겠다, 오늘도.     

적어도 우린 괴테와 베토벤보다 훨씬 각별한 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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