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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조이 Mar 03. 2022

내가 미술관 다니는 엄마가 된 이유

미술관 육아의 시작



마치 빅뱅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달라지는 것처럼.
엄마가 되는 일 역시 내 삶의 성질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었다.
-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 中




아이가 나의 우주이자 전부가 되기 전 나의 세계, 그러니까 나만의 세계, 그 세계는 늘 정돈되어 있었고 논리정연했고 합리적이고 지극히 세련되어 있었다. 하고자 하면 거의 그렇게 했고 언행을 번복하는 일은 매우 적었다. 청춘의 불안이 있기는 했지만, 그 불안은 언제나 내가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님께 부비적대는 것도 가능) 이 단단한 삶을 방해하는 요소가 삶에 등장할 때면 항상 그래왔듯, 논리, 이성, 합리, 실용, 지식, 쓸모 등으로 무장해 적절히 제거해 나갈 수 있었다.


10대, 20대를 통틀어 미래를 꿈꾸거나 상상할 때 단 한 번도 '아이 있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이를 돌보거나 아이 손을 잡고 거닐거나 하는 삶은 물론 없었다. 나의 상상 속 결혼생활에는 남편과 내가 각자의 서재에서 읽고 쓰다가 나와서 자연식을 단정하게 먹고 산책을 다녀와 웰빙 디저트를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모습, 부부의 대화에는 지성과 건강 관련 주제가 주로 오르내리고 종종 우리가 어느 분야에 헌신하고 봉사해야 노년이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하며 사는 것이 있었다. 


내 젊은 나날은 '아이 없는 세계' 다시 말해서 돌봄, 희생, 인내, 보호, 안내, 인도, 차세대, 모성, 양육, 육아, 학부모 이런 단어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방식으로 흘러왔다. 그 날들에 내가 쌓아온 모든 지식, 언어, 문화, 관계, 신앙은 아이 없는 세계에서는 유용한 경험들이었지만 아이 하나라도 이 삶에 들어오게 되는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리는 아주 연약한 경험이었던 셈이다.  




2017년 8월 16일 오전 8시 42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밑에서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성령이 임하신 건지 천사인지 악마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실신해 있는 내 귓가에 이렇게 말했다. 


"너의 세계는 티끌이었어. 아니, 먼지였어. 아니, 아무 것도 아니였어. 아.무.것.도."


태명을 불러주자 내 가슴 위에 누워있던 아이가 힘겹게 실눈을 뜨고 나와 눈맞춤하려 애썼다. 주변에 유난히 출산한 지인이 없었다. 임신 출산 육아 3종 셋트 경험기를 들어본 적이 없던 난, 아이와 눈을 맞춘 후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이로운 충격, 다리를 벌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된 나, 그리고 벌거벗은 팔뚝 만한 어떤 존재. 너와 나는 뭘까. 무엇이 된 걸까. 그러니까 난 너의 엄마, 넌 나의 아가, 생명, 전부? 일부? 분신? 소유? 그냥 소중한 어떤 것? 


어디서 말하면 비웃음 당할까봐 못한 이야기, 나는 분만실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태어난지 1~2주가 지나면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줄 알았다. 분유는 간식이고 태어나자마자 어른 밥을 먹는 줄 알았다. '엄마'라고 언어 훈련을 하면 한 달 이내로 '엄마'라고 부르는 줄 알았다. 블로거와 유튜버 산모들이 출산 후기 올려줄 때 열심히 볼걸, 때 되면 걷고 말할텐데 후기 같은 건 뭐하러 찾아보나 했다. (임신 중 열심히 했던 건 순산을 위한 요가와 숲 산책뿐. 동물처럼 잠만 잤더랬다) 




엄마만의 언어가 필요해


새벽 3시 일어나 낮처럼 떠있는 눈


감히 산모들의 천국이라는 산후조리원에 들어가지 않고 태어난지 3일차 핏덩이를 (출산 준비가 전혀 안된)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이 곳이 너의 집이니 편히 뛰어 놀렴, 했다. 아이는 누워만 있었고 웃지도 않았고 눈도 거의 뜨지 않고 오랫동안 잠만 잤다. 잠만 자는 아이가, 웃지도 않는 아이가, 생명체 느낌이 나지 않아 하 이상해서 산부인과에 전화상담하고야 신생아 육아와 관련한 여러 단어들을 접하게 되었다. 


모유, 분유, 유축, 애착, 통잠, 밤낮 구분, 원더윅스, 젖몸살, 황달, 체온계, 겉싸개, 속싸개, 베냇옷, 거즈수건, 기저귀 발진, 태지, 신생아 목욕, 트림....


아! 난 지금 어떤 강을 건너왔구나, 오묘한 세계로 들어왔구나.


출산한지 2주. 난 아무 것도 모르고 엄마가 된 이 현실에 계속 충격 받고 있었고, 그 와중에 유축기로 열심히 모유를 짜면서 나의 전부가 된 이 존재와 내 삶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일상을 글로 기록하는 소소한 취미가 있던 나였는데 아이를 재우고 일기 한 편 쓰자 해서 앉은 노트북 앞에서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충격과 환희의 연속이었던 지난 2주를 글로 표현할 언어가 내 안에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뇌가 정지된 듯했다. 키보드 위의 내 손이 갈 길을 잃었다. 


내가 여태 배우고 써왔던 언어는, 쓴내나는 육아와 함께 피어 오르는 나의 모성을 대변하기에 아주 빈약하고 형편 없었다. 출산 이전 나의 언어는 늘 이성적이고 규칙적이어서 불안한 엄마의 마음, 아이와 눈 맞출 때 몽글몽글 생겨나는 동화 같은 감성, 고된 인내와 희생 끝에 얻는 행복 따위의 것들을 잘 담아내지 못했다. 육아일기도 그 무엇도 아닌 글을 써놓고 삭제하기를 수십 차례 하고서야 깔끔히 글쓰기를 포기했다. 




예술과 아이가 널 치유해 줄 거란다


예술의전당 어린이라운지에서


그리고 예술이 정말 고팠다. 결혼 전에도 힘들 때면 찾았던 미술관이 너무 그리웠다. 글자를 읽을 필요도, 글을 쓸 필요도,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가만히 그림을 보고만 나오면 되는 곳. 엄마된 나의 삶을 설명하고 묘사하고 해명할 필요 없는 곳, 언어라는 체계에서 해방된 곳. 미술이 있는 곳.


색채와 마티에르의 향연. 

직선과 곡선의 황홀한 조화. 

새하얀 벽에 단정하게 걸린 네모난 프레임.

극도의 절제와 자유분방함의 대조.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 추상화.


아이가 태어난지 3주째 되는 토요일. 아이가 먹을 모유를 유축기로 모두 짜놓고 남편에게 맡긴 채 성수동 창고형 갤러리로 무작정 떠났다. 이미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가슴에서는 모유가 분비되고 있었고 성수동에 도착할 때 상의는 젖어 있었다. 갤러리에서 티켓을 살 때 즈음에는 자켓으로 가리지 않으면 안 될만큼 딱한 모습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젖몸살은 물론이었고.  


그래도 굴하지 말자, 했다. 


지금 내 삶에 미술 감상에의 욕구, 이마저도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이와 함께 침대에 눕게 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힘들 것 같았다. 상의는 모유로, 얼굴은 식은 땀으로 흥건한 채 작품들을 둘러봤다. 아이를 벗어나 겨우 도착한 그 곳에서마저 내 눈에 보이는 건 '아이'와 관련된 작품들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아이와 분리해 나만의 감상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그리고서야 겨우 출산 3주간의 격동과 극한의 수면부족, 뇌의 정지상태 이 모든 경험들에 대해 거리를 두고 사색할 수 있었다.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림 앞에서 날 돌보기 시작했다.


자애롭고 따스한 존재가 내게 다가와 엄마가 되어 놀란 내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려 줬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내게 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바로 '예술 안에서 자유를 얻은 엄마' 이야기. 앞으로는 예술과 아이가 나를 치유해 줄 거라고 했다. 그게 진짜 나의 자유가 될 거라고. 




이제, 진짜 육아 시작합니다.


북서울꿈의숲에서


갤러리에서 나와 서둘러 공중 화장실에서 손으로 모유를 모두 짜내어 버렸다. 젖몸살 열 기운이 조금씩 떨어지는 듯했고 몸이 식은 듯 차가워졌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주 꽉 찼다. 3주 전 산통이 시작되었던 날 그 후 처음으로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지금 집에 돌아가면 아이를 안고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은 더 놀다 들어오라고 했지만 (인간아,, 나 가슴 달린 여자여, 어딜 돌아다녀)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어 집으로 서둘러 갔다.


남편은 믿음직스럽게 팔뚝만한 아이를 꼭 안고 있었고 아이는 모유 담긴 젖병을 물고 있었다. 집안의 공기를 가득 채운 동요 음악이 더 이상 소음으로 들리지 않고 괜찮게 느껴졌다. 침실에 있는 기저귀, 공갈 젖꼭지, 거즈 수건, 속싸개, 땅콩베개, 베냇옷들 뭉치... 급히 준비하느라 주인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가만히 존재해 있는 이 물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022.03.03

딸 아이 6세 되는 해

따뜻한 봄 기운이 느껴질 무렵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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