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속도에 맞춰 걷게 해준 미술관 여행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일이다.
나는 터키 여행을 통해
아이의 자리와 나의 자리를 보았다...
(중략)
나는 더 떠돌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中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매일 내게 주어진 학업량을 끝낸 후 못나 보여도 내 방, 그 방 한구석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의 작은 희망을 지푸라기 잡듯 기대하며 잠드는 일상이 좋았다. 아니, 편했다. 나의 이십대는 대체로 일터와 도서관, 교회, 집이었고, 그리고, 그리고 이따금씩 알코올을 섭취할 수 있는 곳에 영혼을 잠시 기대는 걸 즐겼다.
내게 공간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던 것 같다. 늘어나는 책 한 권을 꽂을 책장 없이, 잠시 논문을 리딩할 작은 책상 없이 학부와 석사 시절을 보낸 것이 조금 서러웠을 뿐, 멋있고 품격있는 공간이라든지 공간을 이동해 일상을 벗어나 휴식을 취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떤 멋진 곳을 다녀왔다고 누군가에게 속삭이기 위해서, 혹은 멋진 풍광을 마음이나 머릿속에 눌러담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는 건 정말이지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게 여행과 무관해 보이는 내게도 여행의 기쁨이 있었으니, 일을 하러 떠난 일본과 제주 출장, 바르셀로나의 건축물과 자유로운 영혼을 탐구하고자 떠난 스페인 여행이다.
주제를 정해 탐구하고,
현지의 사회문화적인 상황을 느끼고,
그 곳의 길 위에서 그저 나다운 시간들을 누리는 것.
1인 기업 분야의 위대한 통찰가 찰스 핸디의 말을 빌려 나는 사회학적인 시각을 가진 여행자였다. 사회과학 전공자인데다 졸업 직전까지 국제정치 분야를 파고 들었던 탓에, 여행지를 떠올리면 그 국가의 사회경제적인 상황들이 가장 먼저 궁금했고 그 국가에서 여성의 지위라든지, 젊은이들이 관심 갖는 분야가 무엇인지, 노년의 행복지수는 어떠한지 이런 것들이 궁금했다. 경치 좋은 곳, 세계적인 핫플레이스, 꼭 가볼 맛집 같은 정보는 적어도 내게는 유용하지 않았다.
이런 궁금증을 잘 해결해 주는 여행이 '출장' 형식이었기에 일터에서 가끔씩 보내주는 출장(이라 말하고 속으로는 사회학적 관점의 여행이라 했다)은 마다하지 않고 갔다. 출장지와 나의 일의 주제를 연결시켜 그 곳의 숨은 역사 그리고 교과서에서 차마 적히지 않은 슬픔들을 읽는 것이 참 좋았다. 어쩌다 현지인과 10분 이상의 대화할 기회가 생기면 박수치며 좋아했다.
가끔의 여행이더라도, 이렇게 사뭇 진지하고 인문사회적인 여행을 즐겼던 내게 가족이 생겼으니 바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휴가에 혼을 쏟는 여행가' 남편이 바로 그였다. 팬티 수영복 한 장 입고 모래에 누워 맥주 한 캔 시원하게 마시는 그의 해변 여행은 정말이지 내게 최악이었다. 부부의 여행 스타일이 이렇게나 다르니 여행은 자연스럽게 우리 부부와 점점 멀어졌는데, 이렇게 여행이라는 것에 무감해질 무렵..
아이가 태어났고 곧 가족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따금씩 여행이 생각날 정도로, 육아는 진실로 고되었다.
전날 야무지게 계획하고 똑부러지게 마음 먹은 것들이 다음 날 아이의 울음소리나 칭얼댐 따위에 하릴 없이 무너지곤 했다. 그렇게 짓밟힌 계획들을 재차 실행할라치면 자신감과 의욕이 처절하리 만큼 뭉개져서 고개를 들 줄 몰랐다.
육아와 살림의 더미로 가득한 이 집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어디든 떠나고 싶었다.
단 하나, 여행을 고려할 때 마음에서 심히 거부했던 것. '키즈 OO'라 하면서 아이 데리고 갈만한 곳이라고 온라인에서 떠들썩하게 조명되고 있는 곳들은 왜인지 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의 재미를 주고자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더라도, 우리 가족만의 속도로 걷고 우리 가족만의 시선이 닿는 곳들을 걸으며 웃을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아이에게 좋은 여행 아닐까? 아이는 관심도 없는 프로그램에 체험료를 지불해 여행 일정을 채우고 포토존이라는 곳에 아이를 세워두고 사진을 가득 찍어야 좋은 여행일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봐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한 엄마의 말이 기억난다. 선배 엄마 말 들어서 안 좋을 거 없다지만, 내 여행의 목적은 너무나 분명했다.
육아라는 현실 문제로 예민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내게 쉼이 될 여행. 물론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 아이가 즐겁게 몰입할 여행이라면 좋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의 '쉼'이었다. 엄마의 쉼 안에 아이가 들어와 함께 평온함을 누려주길. 기껏 여행지의 키즈 OO에 놀러와서까지 파김치 모양으로 축 처져있는 엄마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키즈 OO에만 가면 에너지가 급다운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분기별 가족여행의 경유지에는 늘 미술관이 자리잡게 되었다.
여행지의 미술관에서 꽤 오랜 시간 지체하는 건, 아이와 내가 여행지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마음에 품기 위해 꼭 거쳐야할 우리만의 여행 루틴이 되었다. 우리만의 여행 방식. 산을 타는 여행이든 바다 여행이든 계곡 여행이든 그 어떤 여행 중에라도 그 지역의 미술관을 들르는 건, 내가 경험했던 공간 이동 방식 중 최고이자 최상이었다. 나다움이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 내가 추구했던 여행 스타일과 완전히 같은 건 아니었지만 일부 맞닿아 있었다. 그 지역의 사회이슈를 탐구하는 건 아니었지만 미술관에 걸린 작품 하나 하나를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작가들이 고찰한 세계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육아라는 현실은 내 머리를 사정 없이 때렸지만, 작품 속 예술은 '지금으로도 충분히 괜찮다'고 또 '이렇게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아주 조금일지라도 더 좋은 내면을 갖게 될 거'라고 일러줬다.
이렇게 엄마가 작품 몇 점 주위로 천천히 걷고 있으면, 기저귀를 차고 있어 아직 뒤뚱거리며 걷는 두세 살 배기 딸 아이가 미술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엄마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기가 막히게 귀엽게 웃었다. 속도 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빠른 내가 아이와 유일하게 속도를 맞추어 걷는 곳이 미술관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미술관은, 초보 엄마인 나와 딸 아이가 같은 속도로 걷고 눈높이를 맞추며 서로를 품게 해준 고마운 곳이었다.
여행 중에 들른 미술관에서는 아이와 내가 작품을 함께 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이와 내가 같은 곳을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같은 여행을 해도 여행 구성원들은 모두 다른 곳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을 이룬다. 말 못하는 아이라고 엄마만의 느낌과 경험을 강요하거나 주입할 필요 있을까 싶었다. 말문도 안 튼 아이가 엄마 치마를 잡아 끌어 이 그림 좀 같이 보자고 하지 않는 한 미술관에서 아이와 나는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아이는 아이. 가끔씩 미술관 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싶어했다. 전시실 몇 군데를 둘러보면 어른도 허리가 아프거나 다리가 저려온다. 아이가 힘들어 하면 유모차에 태우거나 남편이 안고서 전시를 관람했는데 유모차도, 아빠도 아니고 '엄마, 너가 나 좀 안아라.' 하면 그 때는 군말 없이 아이를 안고 그림을 봤다. 그제까지 참아준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여행과 멀어있던 우리 부부에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엄마인 나에게 '아이와의 여행'이 결코 스트레스가 아닌 설렘과 재미 가득한 길이라는 것을 알려준, 여행의 찐찐찐맛을 알려준 미술관의 존재에 감사하다.
2022.03.17
아이의 걷는 속도에 맞추어
걷게 해준 작품들에 많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