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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Oct 04. 2020

니체와의 불친절한, 가공하지 않은 대화

니체 아포리즘, 날 것의 해석

니체; 

어느 날 혹은 어느 밤, 한 악마가 가장 깊은 고독 속에 잠겨 있는 당신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너는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을 다시 한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되살아야 한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이 없을 것이다. 일체의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네 생애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다시 되풀이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동일한 순서로 말이다. 이 거미도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달빛도, 지금의 이 순간까지도 그리고 나 자신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언제까지나 다시 회전하며 그것과 함께 미세한 모래알에 불과한 너 자신 또한 같이 회전할 것이다.”     


나; 

처음 당신의 ‘영원회귀’를 들었을 때 당신에게 매우 큰 반감을 가졌다. 당신은 나에게 머리에 피도 제대로 마르지 않은 애송이가 감히 실패를 언급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실패와 좌절로부터 다음을 잘 해낼 거라는 새파란 생각을 가졌다. 그렇게 긍정하지 않으면 내일의 나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다시 하겠다는 뜻에는 새로움에 대한 긍정이, 이전과는 다른 시간을 살아내겠다는 기대가 있다. 그런데, 겪어온 모든 것들이 회전된다니? 기쁨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의 절규인가. 나는 기쁨도 고통도 이전의 것과 같은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신은 왜, 앞으로 무엇하나 새로운 게 없다고 말하는가. 당신의 말대로라면 이번 생은 영원히 반복되는 것 밖에 없다. 인간의 자유 의지보다 정해진 운명이 더욱 강하다는 뜻인가? 마치 격투를 대결하듯, 당신의 문장은 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당신의 문장마다 나는 “왜”라고 질문을 던진다. 나를 질문하게 하는 당신의 문장을 도무지 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자꾸 읽어보게 된다.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나는 당신의 영원회귀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어차피 실패로 점철된 인생, 다시 해도 다를 바 없을 테니 허무함에 묻혀 삶을 끝내라는 뜻이 아니라 똑같이 살게 되더라도 후회 없을 만큼 자기답게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일깨우는 말”이라고. 당신은 후회하지 말라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불완전한 내가 후회될 때 그것도 그냥 받아들이겠노라 말한다. 당신이 위버멘쉬를 말하지 않았는가.      


니체;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 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고,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나; 

위험하게 살아라(gefährlich leben)고 말한 당신이 위험을 말한다. 당신이 위험을 언급하는 이유는 당신의 삶의 위험을 대변하는 단어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모르파티(amor fati)를 주창한 당신은 그 누구보다 당신의 삶을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고 위버멘쉬(übermensch)가 되기 위해 매일을 심신의 나약함을 마주하며 극복하는 인간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무차별적이고 무의식적인 제도와 관념에 홀로 맞섰다. 당신은 인간의 의지를 나약하게 만드는 전체론적인 지배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 말했다. 당연하다고 믿은 것들은, 당연하게 믿도록 세뇌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 다이너마이트가 맞다. 당신의 언어는 수많은 오해와 거부감, 오용과 남용의 세월을 지나 지금도 읽히고 있다. 수많은 해석으로 읽힐 거라는 당신의 예언은 적중되었다. 너무나 강렬하고,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야말로 다이너마이트이다. 


당신은 강력한 다이너마이트이지만 나는 늘 저편으로 건너가기 무섭다. 뒤 돌아보는 것도 두렵다. 앉아서 떠는 것도, 멈춰서 있는 것도 못하겠다. 걷고는 있는데 조용하게 가지 못하겠다. 엄살을 그렇게 심하게 떨면서, 멋지게는 못 가겠다. 가긴 갔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 당신은 내가 걸어간 사실로 칭찬하지 않을 것을 안다. 당신은 죽음 직전, 당신의 삶을 온전히 이해했는가? 만족했는가? 잘 살았는가?


니체; 

제 때 죽도록 하라. (..) 하긴 결코 제때에 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제때에 죽을 수가 있겠는가?     


나; 

당신은 제때에 잘 살았다. 제 때에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제 때에 죽지 못할 것 같다. 그때가 지금이라고 말해도 나는 믿지 못한다. 당신은 하늘을 믿지 말고 대지에서 더 나아가는 인간이 되라고 했다. 그 인간은 대지에서 경험을 쌓을 것이다. 경험을 품는 자가 '제 때에 사는' 인간인가? 당신이 경험을 중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믿게 해 달라. 

       

니체;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는 없는 법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 가장 단적인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책이, 자주 일어나거나 드물게라도 일어는 경험의 가능성에서 전적으로 벗어나 있는 경험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치자. 어떤 새로운 경험들에 대해 처음으로 말하고 있다고 치자. 이런 경우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없다는 청각적 착각이 있다. 

     

나; 

내가 겪은 일들에 ‘경험’이라는 이름표를 붙이지만, 지금껏 내가 겪은 경험들이 나의 만족감과는 별개일 때가 많았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위로가 필요했다. 그러나 당신의 문장은 위로는커녕 자꾸만 밖으로 나서라니 정말 지독히도 차가웠다. 당신은 햇빛만 도사리는, 본능에 대적하는, 이성적이기만 한 데카당스(decadence)의 삶을 비난했지만 나는 정오의 햇빛으로 그림자가 사라지는 삶을 살길 원했다. 경험에 항상 만족이 들기를 바랐다. 그림자가 없어야 한다고 떼를 썼다. 그러나 이 믿음은 의지(Will)를 힘(power)으로 끌고 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경험을 포기하고 싶었다는 뜻이다. 이제야 당신이 말한 힘(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경험 역치로 이해한다. 생명력을 가진 인간이 삶의 시작과 끝에서 단 한시도 멈출 수 없는 것은 ‘경험’이다. 승리하면 웃고 실패하면 우는 본성을 이해하겠다. 새로운 경험을 듣겠다. 듣고 행동하며 알고 살아가겠다.


니체; 

배워서 지식을 쌓고, 지식을 다시 교양과 지혜로 넓혀가는 사람은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이전보다 한층 더 흥미로워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그 사람은 평범한 것에서 교훈이나 단서를 간단히 찾아내고 사고의 틈새를 메울 그 무언가를 발견한다.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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