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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굴레 13화

달맞이꽃

by 슬기





삼일만월당에 봄이 왔다. 만월당의 봄은, 지난 가을 내가 처음 에밀리와 왔을 때와 크게 다를게 없다. 바에 앉아 일주일간의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이 나와, 말이 시작되면 끝이 나지 않는 수다쟁이 사장님의 조합이 데구르르 굴러가는 장면으로 여전하다. 달라진게 있다면, 금목서가 고개를 내밀던 벽 위로, 다른 노란 꽃이 작은 화분에 심겨져 올라가 있다는 것이다. 어스름한 저녁 시간인데도 조명을 켠듯 밝았는데, 이 꽃 때문이었다.


가을엔 물씬한 주황빛으로, 봄엔 살랑이는 노랑빛 꽃으로 물들어있다. 이 가게의 구경거리는 꽃인 듯하다. 따스한 색깔의 꽃이 삼일만월당의 벽에 어울리기도 했다.


“꽃이 귀여워서 몇 개는 화병에 담아놨어. 가게 안으로 들어와.”

“얘는 이름이 뭐예요?”

“달맞이꽃. 얘네들이 밤에 만개를 한단 말이지. 달을 향해서. 해바라기는 낮에 태양을 향해 찾아가잖아? 달맞이꽃은 달빛을 향해 활짝 펴. 놀라운 놈들이야.”


달맞이 꽃이 작은 화병에 잔잔히 꽂혀 있는 모습이 예뻐보였다. 만지고 싶을만큼 귀여워서, 꽃을 손뼘으로 잡아대니 사장님이 우스꽝스럽게 놀랜다.


“아오 루나씨! 꽃을 누가 손으로 그렇게 잡아요?”

“생화 느낌이 좋아서 그만…”

“그렇다고 꽃을 그렇게 만지나. 허허. 근데, 이 꽃 그 방명록에 글 쓰신 분이 선물준거야. 작년에 주고 갔는데, 시간 지나면 더 잘 필거라면서. 이만큼 잘 폈다는 건, 그 분이 올 때가 되었다는건데, 아직 안 오시네.”

“때가 되면 오시겠죠. 시간이 되면 달이 뜨고, 계절이 되면 꽃이 피는 것 처럼. 근데, 달맟이꽃은 꽃말이 뭐예요?”

“기다림.”

“기다림…. 뭘 기다리는건데요?”

“달맞이 꽃 이름을 봐. 딱봐도 달이 뜨길 기다리는 거지 뭐. 매일 달이 떠오르는데도, 계속 기다리는거지.”

“꽃말 한 번 더럽게 슬프네. 기다리는 것도 힘들텐데. 낮에도 펴있으면 좋잖아.”

“슬프긴 뭐가 슬퍼. 얘는 기다리는 걸 슬프다고 생각 안할걸? 오히려 달을 볼 수 있어서 설레어 할 거 같은데. 그리고 달맞이꽃은 밤에 달빛을 받아야 확실히 더 예뻐. 자기 계절을 만난 꽃이 가장 예쁜 거잖아.”

“그런가? 실컷 펴있어야겠네요. 달빛이 더 길면 좋으려나.”


떫은 와인 한 잔에 나초를 집어 먹으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창밖너머엔 하염없이 달을 바라보는 노란 달맞이꽃이 있다.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렸다가 기다린 존재를 만난 꽃의 계절은 그게 겨울일지라도 춥지 않을 것이다.


“취하네요. 오늘은 이만 갈게요.”

“언제 또 올겨?”

“글쎄요. 뭐, 좋은 술이라도 들어오면 그 때 올까?”

“좋은 술이라. 목요일 저녁에 칼칼한 위스키 하나 들여올건데, 오픈하는 영광을 줄 수는 있겠다!”

“아이고, 기대되네요.”

“진짜야. 루나 씨가 한 잔 딱! 하면 좋을거 같아.”

“비싸겠네. 알겠어요. 뜯지말고 기다려요.”

“진짜지? 루나 씨 목요일에 꼭 와야해!”


위스키든 칵테일이든, 평소에 술을 권하지 않는 양반이 갑자기 술을 권할 때가 한 번씩 있었다. 그럴 때는 나름 좋은 술을 구해올 때이다. 삼일만월당에 에일리와 함께 온 그날 이후로, 커피를 마시러, 브런치를 먹으러, 차를 마시러, 술을 마시러 갈 때면 항상 이곳으로 왔다.


사장님과는 진지하지 않고 유쾌하며, 잔잔한 유머를 곁들이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로 지낸다. 가벼운 거리감에서 나를 방어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으로, 서로 오래 안되면 뭐하는지는 궁금하여 가게를 들리게 되는 친구사이가 되었다. 목요일에 꼭 오라는 걸 보니, 구하려고 했던 위스키를 구한 것 같다. 최근에 아란 25년 산을 엄청 찾아다니던데 그 술일 수도 있겠다며, 나가는 길에 달맞이 꽃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이틀 뒤, 나는 요가를 하고 글을 편집하며 하루를 보낸 날이었다. 요즘의 나는 그저 이루나로 산다. 다른 이루나가 아니라 그냥 이루나로 말이다.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목표에 나를 던지지 않고 그냥 하루를 보내는 이루라고 숨을 쉬고 있다. 스무살의 외침으로 시작된, 그리고 오늘에서 바라본 어떠한 사명들은 과거의 사건이 되었다. 그간의 모든 것들은 지금의 나를 만나기 위한 숙제이자, 풀어내야 할 의무였을 것이다. 나는 더이상 무언가를 채워내며 해야할 일을 만들어가는 삶에 살고 있지 않다. 어린 이루나는 어린 이루나의 외침을 따라 살아왔고, 만났어야 할 인연을 만났고, 직면해야 했던 감정을 모두 소진해왔다. 일을 잘하는 이루나, 뭐든 해내는 이루나, 사랑에 겁이 많은 이루나, 쓰임이 다양하여 불려가는 곳이 많았던 이루나는 모두 전생의 일이 되었다. 부르는 이름이 수만가지였던 과거의 나는 나를 알아내기 위한 시도였다.


무엇이 되어야만 행복할 것이라며, 몸과 시간을 노력으로 채워간 인간 이루나는, 자신이 만든 끝을 매듭짓고나서야 태초의 자리로 돌아왔다. 내 자리는 그저 여기, 지금일 뿐이다. 바닥에 발을 딛고 있어도 둥둥 떠있는 것처럼 불안했던 어린 이루나를, 그냥 이루나가 되고나서야 위로하고 있다. 그저, 요가를 하고 글을 편집하며 그 외의 시간은 그저 흘려보낼 줄 아는 하루를 보내고있다. 먹는 기쁨을 혀끝에 두는 감각, 즐거운 농담에 웃음을 짓는 감정, 사소로운 대화로 하루를 지탱하는 온전함으로 살아가고 있다. 삼일만월당 사장님이 던진, 목요일에 꼭와-라는 말도 한 번은 지켜볼까 라며, 귀를 기울이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달은 달빛으로 빛나야 달이다. 달은 태양의 빛이 없이는 빛을 낼 수 없는 것이 운명이다. 그게 달의 굴레임을, 받아들일 뿐이다. 삶의 목적은 쓰임에 의한 것이 아니다. 단지 존재로서 숨을 쉬는 것이다. 그게 내 굴레의 결론이다. 어쩌면 지금도, 새로운 굴레를 선택하고 굴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것도 내 운명일 것이다. 정의하기 어려운, 아니 어쩌면 정의 할 수 없는 인간으로 살지라도 이 굴레가 굴러가는 것이 인생이다….



-


이틀 뒤, 저녁시간을 넘은 늦은 밤 10시 목요일. 사장님의 부름에 칼칼한 위스키를 마시러 가기로 했다. 삼일만월당 근처에 오니 달맞이꽃 향기가 은은히 드러난다. 오늘 따라 환하게 핀 꽃의 얼굴을 보니 달빛이 꽤나 밝음을 알 수 있었다. 4월, 음력 15일. 보름달이 떠오른 날이었다. 달이 만월이 되어, 보름달이 되었다.


보름달이 되기전 햇빛은 달을 향해 가까이 차오른다. 해의 빛이 달에 완전히 담겨지는 보름달의 시간, 햇빛이 달을 통해 세상을 훤히 비춰 낼 때, 달맞이꽃은 기다렸다는 듯 달을 향해 찰랑찰랑 잎을 흔들어댄다.

꽃은 이틀 전보다 더 자라있다. 달을 향해 짧은 목을 더 빼내어, 꽃잎을 크게 키워내며 마치 여기 있다고 인사하듯 달빛을 안고 있는 꽃에게 말을 걸었다.


“달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다. 오늘 따라 더 달빛을 반기는 거 같네?”

작은 종소리가 띠링- 울렸다. 사장님이 먼저 문을 연 것이다. 사장님은 내가 올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인사했다. 가게는 언제나 쿰쿰한 나무향기와 묘하게 어울리는 디퓨져 향기로 덮혀있다.


“어서오세요, 손님.”

“예. 오랜만입니다.”

“이틀전에 봐놓고 무슨 오랜만이야.”

“장난이죠. 자, 어서 위스키 보여주세요.”

“루나 씨 점점 성격이 급해진다. 기다려봐, 이 위스키가 만들어 질 때도 25년이 걸렸잖아. 귀한 건 오랫동안 기다려줘야 하고, 참아줘야하고, 기대해줘야하고…”

“사장님, 배고파요.”

“음. 이렇게 말을 돌리네. 내가 이래서 루나씨를 좋아하지.”


시덥지않은 이야기로 펼쳐지는 단골손님과 사장의 주거니받거니가 시작되었다.


“안주 뭐가 좋으려나?”

“글쎄요. 까르보나라 떡볶이 되나요?”


사장님은 없는 걸 만들어달라고 하면 어쩌냐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놀리는 재미가 있다고 받아치던 그 때, 마지못해 주방으로 들어가며 내가 알아서 만들어 올게라며 말하던 그 때였다.


띠링- 하고 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평일 밤이라 손님이 없을 시간을 생각해 온 것도 있었는데 누군가가 들어온 것이다. 사장님은 주방으로 향하던 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방금들어온 손님을 쳐다봤다.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엄청 반가운 목소리를 내며 들어온 손님을 맞이했다.



“와, 오랜만입니다! 얼마만이죠?”

“안녕하세요. 거의 2년 만 같은데. 저 오랜만에 왔습니다.”


이틀전에 온 나도 오랜만이고, 2년 만에 온 그 사람도 오랜만인가보다.

익숙한 오랜만과, 낯선 오랜만. 약간의 어색함이 감도는 분위기.


나는 고개를 돌려 방금 들어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나의 인기척을 느끼곤, 나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이곳에 온 그 사람과

엊그제도 여기 온 나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와 나는,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저 머물러서, 그를 맞이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오늘은 보름.

보름은 달과 해가 정면으로 서로를 마주보는 시간이다.

해는 달을 향해 달려가 기어코 달을 만나 빛을 낸다. 그게 해의 운명이다.

달은 태양빛이 있어야 빛을 낸다. 그게 달의 운명이다.


창 밖엔 달맞이 꽃이

만월로 가득찬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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