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가을 비가 지나고, 추위가 깔리는 11월의 첫 날이 되었다. 오랜만에 온 에밀리의 연락이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는 날이기도 했다. 에밀리는 인도에서 일정을 마치고, 얀의 초대를 받아 유럽을 함께 여행했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원에 입학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대학원 입학 준비를 하던 도중 한국으로 여행을 오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며, 열흘 후에 만나면 좋겠다고 메시지를 했다.
에밀리와의 만남을 약속 한 후, 매일 잔잔한 기다림이 설레게 느껴졌다. 에밀리의 미소와, 그녀의 향기가 벌써부터 맴도는 것 같았다. 마치 수호신처럼, 에밀리를 만나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에밀리를 만나러 공항으로 가는 날 아침, 내 모습은 마치 날아가는 새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루나!”
저 멀리서 캐리어마저 집어 던지고 크게 내 이름을 부르며 그녀가 달려온다. 뽀글뽀글 볶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에밀리는 달려와 나를 안았고 우리는 눈물이 짧게 맺힌 눈망울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 루나. 너무 보고 싶었어.”
“에밀리, 너가 한국에 와서 너무 좋아!”
에밀리와 나는 우리집으로 오는 택시에서도, 옷을 갈아입고 길을 나서는 거리에서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는 번화가에서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그간 밀린 안부를 묻느라 목이 쉬어갈 정도였다. 강남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서울의 빌딩을 구경하던 우리는, 오늘의 이야기를 마감할 장소로 해방촌을 택했다. 주택이 곁곁이 쌓여진 장면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석양이 깔린 루프탑에 올랐다. 위세를 자랑하는 고층 빌딩으로 둘러쌓인 장소에서 모든 건물을 내려다보는 장소까지 아주 금방 이동 할 수 있는게 한국의 서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정말, 타임머신을 타고 다니는 우주같아.”
입을 벌리며 사람과 건물을 구경하던 에밀리는, 여전히 행복해보였다. 녹진한 맥주를 들이키며, 얀과의 여행을 풀기시작했다. 인도에서는 자신이 펼치는 여행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는데, 유럽을 여행할 땐 얀이 마치 자신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얀도, 자신이 여행을 이끌 때 그만의 힘과 본성이 커지더라고. 나는 여행에서 얀을 통해 사람의 모습을 배웠어.”
“음. 에밀리 너가 인도에서 우릴 이끌었던 시간에서도 얀은 좋은 힘을 보였어. 무척 건강하고 즐거운.”
“맞아. 근데, 나는 얀에게서 나를 봤어. 내가 비춰지더라고.”
“어떤 모습이었어?”
“선택하는 내 모습이었어. 너가 예전에 나에게 물어봤었잖아. 예약이 마감된 토이트레인을 어떻게 탈 수 있을거라고 아는 건지를.”
“그랬지. 나는 그걸 무척 신기해했어.”
“나는, 내가 당연하게 선택한다고 생각했어. 얀을 보면서, 당연한 선택을 하는 내 모습이 보인거야.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한 적은 없었거든.”
“혹시, 얀이 너무 제멋대로 행동했니?”
에밀리는 푸핫, 하며 내가 던진 농담에 함박웃음을 보였다. 내 농담은 에밀리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웠을까 걱정되는 마음을 환기하고 싶은 가벼움이었다.
“사실 난 부모님의 얼굴을 몰라. 어릴 때 버려진 아이였거든.”
처음 듣는 고백이었다. 마냥 밝고 맑은 어린아이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에밀리일거라는 내 생각에 금이 생겼다. 에밀리는, 누군가 앞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치만, 나는 부모님의 부재에 휩쓸려 살고 싶지 않았어. 그게 내 선택이었어. 너무 어렸을 땐, 그게 선택인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얀이 모든 상황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살아온 선택이 보였지 뭐.”
물끄러미 그녀를 보는 나는, 계속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너의 이야기를 내게 더 말해준다면, 나는 너에게 고마울거야.”
“루나 너가, 내 선택을 신기해했잖아. 나는 얀을 보면서 그 신기하다는 감정을 안거 같아.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신기해하고, 서로를 비춘거지. 내가 유럽을 여행하며, 더 미래로 갔을 때, 너의 시선을 이해한거고.”
누구나 다 각자만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 그 지옥속에서도 사랑을 품는 자가 있는 것이다.
지옥의 형상이 가득 둘러진 곳에 태어났을지라도, 깊은 희망을 안고 끊임없이 천국으로 향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결국, 천국에 살게 된다. 나에겐 그 존재가, 에밀리였다.
“루나. 모든 걸 다 비추려다가, 다 잃어버렸었니?”
“응.”
“이제 진정한 너의 빛을 보았다면 그걸로 다 괜찮아.”
에밀리는 과거에 그녀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고, 내게 드리워진 길을 일찍이 읽어내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각자가 가진 힘과 빛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우리의 세계를 어둡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그 안에서도 빛을 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오늘과 같은 천국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남은 맥주를 짠하며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며 집으로 향했다. 한국으로 온 여행의 첫 날 밤, 잠을 자는 에일리의 표정은 아주 편안해보였다.
다음 날 한강으로 향해 한참을 걷다가, 라면으로 해장을 했다. 맵지만 맛있다며 숟가락으로 라면을 끊어 먹는 에일리가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에일리와 나는 곳곳을 돌아다녔다. 서울에 살면서도 자주 가보지 못한 서울의 거리를, 그녀가 한국에 온 덕분에 가게 되었다. 우리는 아침 운동과 해장을 마치고 낮잠을 자러 돌아왔다. 자고, 쉬고, 다시 나가길 반복하며 마치 휴양을 하듯 시간을 보냈다.
에밀리와 함께 보낸 시간이 사흘이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경복궁을 구경하고 싶다는 말에 점심을 먹고 늦은 오후 쯤 다시 밖을 나섰다. 경복궁 근처에서 한복을 대여하여 궁으로 입장하니, 에밀리는 여기저기에서 사진 찍기 바빴다. 물 흐르듯,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닿는대로 보내는 시간에 그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에밀리가 온 이후, 내 일상은 여행이 된 것 같았다.
“루나, 나 배고파. 우리 뭐 맛있는거 먹자.”
“그래 좋아. 우선 이 길을 따라 걸어볼까?”
출출해진 배를 두드리며 안국역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함께 먹을 저녁 식사를 찾기 위해 지도를 보며 음식점을 고르며 걸었다.
“와. 이거 무슨 향기이지? 너무 향기롭다.”
함께 걷던 에밀리가 멈춰서 내 팔을 잡았다. 좋은 향이 나는거 같다며, 코를 들어 두리번 거리자. 안쪽 골목에 빼꼼히 고개를 드러낸, 주황빛 꽃이 촘촘히 피어난 나무가 보였다. 향이 굉장히 포근했다. 나무에서 핀 꽃의 향기가 몇 미터가 훌쩍 넘는 곳까지 내려와 풍기다니, 저 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아마 저거인거 같아!”
향을 따라 걸어가니 각 나라의 음식이 한 집건너 한 집으로 다양하게 나열된 거리가 펼쳐졌다. 꽃나무가 보이는 곳에 멈춰섰다. 에밀리가 찾은 주황색 꽃의 나무가 담장을 넘어 고개를 내밀고 확연히 보였다. 커피와 술을 파는 펍이었다. 시멘트 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거친 담장의 결 위로 나무의 푸른 잎이 걸쳐져있었다. 꽃에서 풍겨지는 향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이 꽃의 정체를 꼭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닥 위로 <삼일만월당> 이라는 작은 표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담장 바로 앞엔 입구가 바로 보였는데, 창문이 열린 가게 안을 들여다봤다. 남자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접시를 닦고 있었다. 그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출입문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아. 네. 혹시 식사도 가능한가요?”
“들어와서 메뉴 보실래요? 낮에는 커피인데, 밤에는 식사와 술이에요.”
에밀리는 들어가자고 눈짓을 보냈고, 친절한 사장님의 인사에 끌여 가게로 들어갔다. 바 형식의 자리가 가게의 전부를 차지했고, 사각 테이블은 작은 크기로 2개 정도가 있었다. 사장님의 인테리어 취향이 돋보이는 인형 장식과 술이 바 앞에 진열되어 있었고, 꽤나 안락했다. 자리에 앉아 메뉴를 보니 밖에서 봤을 땐 알 수 없었던 식사 메뉴가 많이 적혀있었다.
“여기 이 친구가, 앞에 주황색 꽃 향기를 맡고 찾아왔어요. 향이 무척 좋은데, 무슨 꽃인가요?”
“금목서라는 나무예요. 만리향이라고 불려요. 향이 따라 오셨다니. 올해는 꽃이 더 오래 펴있네요. 보통 이쯤이면 많이 져있는데….”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금목서를 인터넷에 검색하며, 이런 꽃이 있었냐며 웹사이트에 적힌 금목서의 정보를 읽어나갔다. 동요 <반달>이야기가 링크되어 있었다, 달에사는 옥토끼 전설과 금목서가 엮여 있는듯했다. 나와 같은 페이지를 읽던 에일리는 래빗을 연신 말하며, 꽃에 왜 토끼가 나오는지 궁금해했다.
그러자 사장님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과거의 한국에선 계수나무로 불리는 나무가 달에 심겨져 있었다고 보았고, 그 계수나무가 금목서이며, 달에는 토끼가 산다고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며 에일리의 호기심을 풀어 주셨다. 연신 신기하다는 반응을 내세우는 에밀리를 보며 사장님은 더 신나게 자신이 아는 걸 말해갔다.
“와, 그럼 금목서는 달에서 나온 꽃이네요? 제 옆에도 달이 있는데! 제 친구 루나!”
“이름이 루나인가봐요? 그래서 금목서 따라 오셨나?음… 여튼, 계수나무는 중국 원산지인 나무인데, 여기 금목서와는 종류가 다르지만 대략 오해가 있다고 봐요. 뭐 어찌되었든, 달에는 금목서도 토끼도 있는걸로 봐야지요. 여긴 한국이니까.”
끝 말을 머슥하게 흐려가며 자신의 말을 50%만 믿으라는 멘트로 마무리를 하는 사장님을 보니 이 분은 분명 말이 많고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며, 때론 허풍을 섞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한국의 전통 건물과, 오래된 설화까지 듣는 하루라며 센스있게 사장님과의 대화를 마무리하는 에밀리에게서 오늘 따라 더욱 웃긴 구석 마저 보였다. 바에서 주문한 음식은 어묵탕이었다. 한국에선 스프처럼, 밥과 함께 먹는 단골메뉴라고 설명을 곁들이자 에밀리는 아주 맛있게 먹었다. 한국, 음식, 여행, 그리고 오랜만에 요가이야기로 우리의 대화는 돌고 돌았다. 어묵탕의 바닥이 보일 때 쯤, 새로운 메뉴를 주문하기 위해 바 위에 올려진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펄럭이는 메뉴판 아래에, 글씨가 써진 노트가 놓여져있었다. 이곳에 다녀간 사람들이 쓴 방명록 같았다. 사장님께 이 방명록을 읽어봐도 되냐고 물었다.
“물론이죠! 제 가가엔 혼술 하러 오시는 분들이 단골분들이 많거든요. 그 중에서 아주 꾸준히 오시는 분들이 남긴 글을, 따로 모아서 묶어뒀어요. 한 열 권정도가 되는데, 모두다 다른 분의 글이거든요. 근데 최근에 제가 모은 글은, 무슨, 편지글 같았어요.
어디보자…. 여기 있네요. 최근에 제가 따로 모아둔 분의 글이에요. 궁금하시면 읽어보세요.”
노트에서 찢어 옆면이 울퉁불퉁한 종이를 작은 파일에 묶어 둔 노트였다. 꽤나 낭만이 느껴졌다. 손님의 글이 편지같다는데 남의 편지를 몰래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글을 남긴 손님은, 마지막으로 오신지 1년 이 훨씬 넘었네요. 아참, 그 분도 금목서 향기를 따라 오셨어요. 두 분 처럼 꽃향기 따라 오셨다가 단골이 되었는데, 늘 혼자 오셨거든요. 저와 얘기를 하다가, 드물게 꼬냑 한 잔 드시는 날이 있어요. 그럴때면 방명록에 글을 쓰고 갔어요. 글을 쓸 땐 말을 걸면 안될 것 같아서, 나가시는 길에도 목례만 하고 보내곤 했네요. 요즘은 영 안오시네….”
덧붙이는 말이 많아지는 사장님의 음성은 마치 라디오 DJ의 사연 소개 같았다. 글쓴이를 상상하며, 조심스레 노트를 펼쳤다. 에일리가 한국어를 조금 읽을 줄 알아서 함께 글을 읽어갔다.
1.
예쁜 너를 사랑할 수 있어서, 나는 행복했어. - 2020. 05. 16
2.
내가 울면, 당신은 나를 떠나지 못하겠지? 내가 우는 소리에 돌아선 발걸음이 멀리 나가지 못할까봐. 새어 나가지 않게 꽁꽁 싸매어야겠다. 나는 아파도 너는 아프면 안돼. -2020. 05. 21
3.
우리의 이별은 사랑이 끝났음을 결론짓는말이 아니라, 헤어짐을 시작하는 선고였다. 보드라운 손등위로 끈적한 눈물을 닦던, 여리고 고운 너.
너를 위해 네 손을 놓는다며, 네 행복을 위한다며, 멋있게 사랑을 보낸거라고 오랫동안 믿었다. 이쯤하면 잊을때가 되었는데. 그대가 내 인생에 없었던 사람처럼 잊어야 했는데. 내가 당신과의 이별을 잊기 전까지, 이 사랑은 끝나지 않을테지. -2020. 09. 30
4.
헤어진 날, 우리의 사랑은 유리처럼 깨졌다. 깨진 유리조각 위에 맨발로 올라가 끊임없이 유리를 밟아댄다. 깨진 유리여도, 너와의 사랑이다. 멀리 어딘가로, 나가지 않고. 유리를 밟을 수록 더욱 깊게 내 살에 파고들지만, 너를 잡지 못한 그 날의 후회를 잊기가 싫어 멀리 어딘가로, 나가지 않고 아픈 오늘을 걸어간다. 너를 붙잡지 않았던 그 때의 나, 하나도 멋있지 않았다. -2021. 03. 05
5.
그 시절에 놓아두고 온 인연이지만 내 미련은 이따금 우리의 시절을 찾아가며 잊지 않으려 애쓴 것 같다. 나는 이제 그 어리석은 애씀을 멈춰야 한다. 너무 울지 말라는 당신의 마지막 말 마저 나는 지키지 못했지만 당신이 오랜 평온에 도달하였다면 다행이다. -2021. 05. 11
6.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넝쿨채 손에 쥐어주고 싶었고,
이른 아침의 고요함을 훔쳐다가 단잠을 지켜주고 싶었고,
형용 할 수 없는 이 마음을 떨리는 목소리로 표현해주고 싶었고,
밤새 들끓는 그리움을 한아름 삼켰다가 너를 보면 쏟고싶었다.
네가 떠나는 뒷 모습을 뜬눈으로 바라보기 전까지,
미안함이 묻어나는 작별 인사를 두 귀로 생생히 듣기전까지,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손을 여러번 잡으러 헛발질 할때까지도 몰랐다.
너의 체온이 내 것이 아님을 알고나서야,
나는 알았다.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이 멈췄다는 것을. -2021.12. 03
7.
당신은 나의 유일한 기도문
당신은 나의 기도문
함께한 시간의 시작과 종말을 담은
나의 유일한 기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기에
그저 기도로 남을
나의 당신 -2022. 02. 23
8.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말은 구질구질한 변명처럼 들렸다.
하지만 보내는 마음과 받아들이는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끝내 이별을 맞이해봤다면 저 문장은 불가능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 잔혹한 현실을 겪어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까지도 내 눈물보다 상대의 눈물을 걱정하는 지독한 애정을.
끊어진 그 사랑도.
마지막까지.
마지막까지, 사랑이다. -2023. 09. 19
누구길래, 이렇게 아픈 사랑을, 이렇게나 길게 끌어가며 품고 사는 것인지.
내가 이별한 사람이 된 듯 마음이 아려왔다.
“엄청, 슬프죠?”
“네…. 그리고 글을 쓴 시간이 꽤나 기네요.”
“맞아요. 자주 오시는데, 글을 가끔 저렇게 쓰더라고요. 무슨 사연인진 여태 말씀을 안하셔서 듣지 못했고, 묻지도 않았어요. 한 사람을 두고 계속 편지를 쓰듯 글을 쓰는 것 같아요. 전하진 못하나봐요.”
여기 또 나 같은 사람 하나 있네싶었다. 세상이 이해하기엔 멍청하고, 짙고 깊은 사랑한 사람이 아닐까. 나는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 무지, 보고 싶어도 달려가지 못하는 비겁함, 가지말라고 매달려보지 못한 회한을 품은 사랑을 했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헤어진 이후에도 이전 사랑을 품고사는 회한이 있는 사랑을 했었나보다.
지나간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잊는다는 통설은 틀렸다.
적어도 이 글을 쓴 사람과 나에게는, 틀린 명제이다.
“글에서 향이 나네요. 꽃도 향기나고, 글도 향기나고. 덕분에 글 잘 읽었어요.”
“아이구, 아닙니다. 다음에 그 분 오시면, 이 글을 잘 읽었다고 말한 분이 있다고 알려드릴게요.”
글을 정확히 읽기엔 한국어를 어려워하는 에일리에게는, 엄청나게 슬픈 이별을 한 사람이 있고, 사랑을 잊지 못한 그리움을 써내린 글이라고 설명하며, 말을 이어갔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는데, 아직 너무 사랑하는데, 차마 잡을 용기는 없었던 사람이 쓴 감정들이야. 거의 3년에 걸쳐서 헤어진 사람이 생각 날 때마다 글을 썼나봐.”
“이런. 그런 이별은 없으면 좋겠어. 너무 아프잖아. 음, 글이 안쓰여진 이쯤이면, 새로운 사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치. 이제 새로운 사랑을 했기 때문에 이후의 글이 없는 것 같아.”
“그렇다면 이 작가에겐 다행인 일이야. 이정도로 사랑을 깊게 하는 사람이면, 다음에 만날 사랑은 좀 더 행복하길 바래지네.”
에밀리는 이름을 모르는 글씨의 주인공에게, 다음 사랑이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붙일 수 없는 편지를 써낸 이 사람이 글을 쓰면서도 불행하진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랑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한, 이 세상에 하나 뿐인 특권을 가져본 사람이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