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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굴레 09화

방파제

by 슬기


어떤 삶을 쌓아왔는지 알 수 없는 인생은 마치 얼기설기 붙은 방파제 같은 것이다. 방파제는 파도의 피해를 막기 위해 쌓았지만, 바다의 원래 모습을 헤친다. 그걸 알면서도 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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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은 건설현장에 들어가 시멘트와 목재속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텁텁한 먼지를 마시고, 가래가 끼인 목에 물을 퍼부으며 등과 어깨에 짐을 싣는 하루를 보냈다. 나는 출판사에서 원고를 교정교열하는 일을 파트타임으로 시작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일감이 생길 때 하는 일이 꽤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하고 있을 뿐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나는 전보다 고요한 삶을 굴리고 있는게 분명했지만, 소란은 생각치 못한 곳에서 생겨났다. 태인은 일이 끝난 후 술자리에 자주 나섰다. 술에 많이 취할 때 마다, 울면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 태인의 울음은 나에게 듣기 싫은 소음이었다. 울고 난 다음날이면,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곤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다. 처음엔 그를 이해했고, 그 다음엔 그에게 화가 났고, 결국엔 그가 하는 대화에 말을 닫았다. 나는 태인이 일하면서 생긴 고민과 회사를 이직하고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함께 지켜갔다. 크고 작은 중요한 순간에서 그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구했다. 입사지원서를 쓰는 일 부터 사내에서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과의 처신, 승진을 기대하고 실망하는 과정들을 함께 그렸다. 그는 나에게 많은 걸 물어왔고, 나는 그를 위해 대답했다.


태인은 가시적인 도약이 있을 때마다 내게 선물해주며, 늘 고맙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사랑을 드러냈다. 그는 하고 싶은건 다 하는 사람이었으니, 사랑하고 싶은 나를 마음껏 사랑했다. 그가 보내는 사랑의 크기는 부피가 매우 컸다. 그리고, 자신이 보내는 사랑만큼 사랑이 되돌아 오기를 바랐다.


“루나야.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글쎄. 생각해본 메뉴 있어?”

“장 보러 갈래? 집에서 요리해 먹자.”


태인은 마트에서 식재료를 이것저것 고르고, 함께 마실 와인을 골랐다. 신중하게 좋은 것들을 골라담고 요리를 했다. 소란과 사랑이 동시에 있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안정보다는 재미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인과의 시간이 길어졌다.

“이번에 새롭게 짓는 건축물 구경해볼래? 제주도에서 온 의뢰인데, 요구사항이 많아보여.”


의뢰자는 본인의 노후를 살고자 집을 짓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살고 싶었던 집의 모습은 장장 20년이 넘는 메모에 적혀있었다. 빛바랜 노트와 일그러진 모서리에서 세월을 짐작할 수 있었다. 78살이 된 노인이, 마지막을 보내는 집에는 그간 바랬던 황혼의 풍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있었다. 노인이 요구하는 집의 모습은 현실적으로 만들어내기 어려운 부분과, 최대한 있는 그대로 해내고 싶은 괴리가 커보였다. 태인이 이 작업을 보여준다는 것은, 같이 고민해달라는 신호이다.


저녁을 먹은 후, 와인을 한 잔씩 따라내어 그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이런 고민은 건축을 전공하거나 디자인 감각이 뛰어나거의 문제가 아니다. 메모에 적힌 마음을 읽고, 그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진심의 문제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알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걸 누군가가 알아준다면 행복하거나 만족해한다.


“이 집에서 사는건, 본인이 아니라 함께 살 배우자가 편안했으면 하는 거 같아.”

“어떻게 알았어? 와이프가 바다가 잘 보이는 집을 원한데. 근데 그걸 어떻게 땅 위에 세워 올려야 할지 몰라서 마구잡이로 적은거랬어.”

“창문을 좀 크게 넓히자. 바다가 보이고, 지나가는 새가 보이고, 나무가 흔들리는걸 구경할 수 있다면 좋아하실 것 같아. 할아버지의 취향이 아니라, 할머니의 안락은 거기에 있을거야.”


태인은 내 말을 듣자마자 창문과 벽면의 넓이를 바꾸도록 수치를 조절했다. 이전과 다른 시뮬레이션이 나왔고, 전후를 비교하니 작은 디테일에서 집안의 느낌이 확연히 달라졌다. 사흘 후 의뢰인을 만났을 때 전후차이를 보여주니 이대로 하면 좋겠다고 계약을 맺었다고 했다. 태인에게 나는, 이렇게 쓸모가 좋은 존재였다.


문득, 이런 쓰임에서 내가 살아가는게 맞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비슷한 점이 많았고 어떠한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 점이 우리를 공명하게 만들었으며, 사랑을 하게 만들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이였음은 분명했으니까, 나는 태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내 존재를 규정해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못했다.



나는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교정교열을 잘해내며 성과가 쌓이자 점차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점차 할 일이 많아졌다. 즉, 쓸모가 좋아지는 사람으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게 된 것이다. 밤에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끼니를 미루는 횟수가 늘어났다. 눅눅한 피로가 쌓여갈 때 쯤, 출판사에서 정규직 입사를 제안했다. 채용자는 나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하나를 부탁하면 둘 이상을 준비해서 내고, 오류 없이 정확한 일처리를 해내었다며 이곳에 온다면 업계에서 엄청 유명한 사람이 될 것 같다며 끊임없이 호의를 드러냈다. 입사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회사로부터, 자리가 보장된 곳이 생겨났다.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왜일까. 남들은 평생을 한 번 받기 어려운 스카우트를, 규모가 큰 회사로 부끄럽지 않은 조건으로 입사할 수 있음에도 고민이 되다니. 껌이 붙은 신발을 들고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은 원하지 않는게 분명했으나, 머리로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사회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하는것, 그토록 바라던 상황인데도 왜 마음은 어렵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일까. 내가 나답기 위해서 지나온 선택들이 쌓여갔고, 전보다 사회적 성취는 좋아지고 있으며, 성장하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무엇이 맞고 아닌지에 대해 고민하는 상황이 머무르고 있다. 굴레일까.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했던 굴레를 다시 마주한 것일까? 이전 굴레를 떠났음에도 다른 굴레 속에서 쳇바퀴를 돌리는것 뿐인,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떠나지못한 상태로 있을 뿐이라고. 너는 이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교정교열은 염두하지 않았던 돈벌이였지만 하고나니 가르치는 일보다 더 인정을 받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몰랐던 내 특기일지도 모른다.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게 인생이라, 내가 매번 찾는 북극성을 다시 결정하여, 뛰어가보기로 했다. 머리를 싸매고 이리저리 고민을 거쳐서 결정을 내렸다. 이번 만큼은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사인이 아닌 머리가 향하는 운전대를 잡아야겠다고. 꽤나 그럴싸한 결정이었다. 남부끄럽지 않고, 나에게도 그럴싸한 선택이었으니까. 그 이후 나는 수많은 원고에 쌓여 일을 했고, 원고에 적힌 이름들을 만났다. 채용담당자의 어깨가 올라갈 만큼 두각을 내는 퍼포먼스가 이어졌고, 그게 나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굴레가 굴러갔고 나는 멈출 수 없었다. 굳이 멈추지 않았다는게 맞겠다. 굴러가는 이 상태를 멈추려면, 나는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써야했다. 그게 싫었다. 굴레를 멈추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의미를 다시금 찾아 정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었다. 스스로 갈 길을 포기한 것인지, 이대로가 편해서 타성에 젖어 살고 싶은 것인지조차 생각하지 싫어졌었다. 그래서 나를 이끌고 가는 바퀴를 들여다 볼 마음도, 들여다 봐야겠다는 책임감도 생기지 않았다. 단지 불안한 것은, 나는 대체로 행복하지 않았고, 엄청나게 불행하지도 않은 상태를 반복하며 흘러가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내 모습은 흡사 사막에 홀로 박혀, 이미 죽어버린 선인장과 같았다. 습기가 전혀 없이, 언제 죽었는지도 모를만큼 바짝 말라 비틀어진 선인장. 사람의 육신으로 살과 뼈를 세워뒀지만 영혼은 깊게 잠들었고, 짜릿한 감흥 - 기쁨과 슬픔 - 따윈 존재하지 못하는 마음,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이 너무나 귀찮아져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버려진 선인장이 나의 자화상이었다. 무언가 이상하고 잘못되었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갈 뿐이었다.


그런 하루 중 어느 날, 긴 원고 하나를 마감하고 다음 날인 평범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무거운 몸을 깨우지 않으려 늦잠을 길게 자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손님> 유무진 작가입니다.”


덤덤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내게 급한 문의 메일을 보냈으나 빠르게 확인하지 않는것 같다며 조급한 마음에 전화를 했다며 양해를 구한다고 말했다. 미팅이 있을 땐 늘 무채색의 단조로운 셔츠를 입고 소매를 가볍게 걷은 상태로 회의실 문을 열어 들어오던 유무진 작가였다. 옆으로 길게 떨어진 눈매는 검정색 안경에 가려져 있었지만 가끔 안경을 벗고 있을 땐 강렬한 눈동자가 빛이나던 얼굴을 가졌다. 안경 뒤에 가려진 눈빛은 날카로운 야망으로 가득차있었지고, 원고에 담은 인생은 열정으로 넘쳐 흐르는 것 같았다. 그는 항상 마감기한에 늦지 않게 원고 일정을 맞추었고, 깔끔한 비즈니스 매너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현대소설의 신예, 최근에 가장 주목받고 있는 스타작가로 불렸다. 그가 쓴 글은 SNS에서 항상 이슈가 되었고 북토크나 사인회가 있을 때면 티켓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 였다. 그런 그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함께 원고와 씨름하며 일을 했는데, 그동안 모든 일은 이메일로만 소통했고 미팅을 일정은 주로 팀장님의 업무여서 일정과 관련해선 나와 직접적으로 얘기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급한 일이 생긴건지 궁금했다.


마감인 원고의 문제인가? 주말임에도 급한 일이라며 연락을 할 정도라니. 꽤나 시급한 문제인듯하여 통화를 계속 이어갔다.


“우선 갑작스러운 연락이라 죄송합니다. 사실, 이번 원고에 관한 문제는 아니고요. 제가 편집자님께 드리고 싶은 제안이 있는데 저희 이번 작업건이 끝나면 말씀드리려고 기다렸습니다.”

“어떤…?”

“통화로 전부를 말씀드리기엔 어렵지만…. 일단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편집자님과 함께 다른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제 마음에 강한 확신이 들어서서요. 제안을 하루라도 빨리 전하고자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아…. 네.”


스카웃 제의였다. 현재 출판사에서 정규직으로 스카웃을 받은지 겨우 6개월만에, 또 다른 스카웃을 받게되었다. 과거의 나 였다면, 이리뛰고 저리뛰며 내 능력이 이만큼이라 떠들고 기뻐했을것이다. 하지만, 유무진 작가의 제안을 듣고 있어도 마음의 큰 요동이 생겨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대답을 이어갈지 고민하며 1초가 1분처럼 긴 공백에 머무르고 있을 때 유무진 작가는 자신의 말을 계속 전했다.


“괜찮으시다면 빠른 시일 내에 뵐 수 있을까요? 편집자님 일정 괜찮으실 때 알려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본인의 원고를 출판하는 담당 출판사에서, 함께 일을 한 편집자에게 작업을 꾸려낸 회사에서 나와 자신과 함께 일을 하자는 제안을 하다니. 당돌한 것인지,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지 혀 끝까지 뒷담이 차올랐다. 통화를 주고 받는 이 자리에서 바로 거절을 하고 싶었으나, 아직 유 작가와의 작업이 마무리 되지 않은게 몹시 거슬렸다. 그래서 최대한의 배려로 그를 대했다.


“오늘 괜찮으실까요. 오후 4시 쯤이요.”

“좋습니다. 만날 곳을 찾아서 주소를 문자로 알려드릴게요. 편집자님, 감사합니다.”

“네.”


그의 목소리는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의 소리처럼 높은 옥타브를 흘리듯 들려왔다. 유 작가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카페의 주소를 보냈다.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표하는 속내엔, 곧 있을 만남의 결론이 그의 뜻대로 긍정일 것라는 확신과 기대가 보였다. 내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도록, 자신만의 준비도 철저히 했을 것이 분명하다.


채비를 하고 나서는 길에 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갑작스럽게 생긴 제안이지만,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싶어서 오늘 시간을 내어 나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말끝이 흐려지는 목소리와, 시무룩해진 기운을 드러냈다.


“뭐야 이 반응? 혹시 기분이 나쁜거야?”

“응. 조금.”

“왜? 이해가 안되는데. 나를 이해시켜줄래? 왜 기분이 나쁜거지?”


그의 기분이 나빠진 건, 내가 태인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행동했다는 서운함이 이유였다. 태인은 항상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그 사랑이 메아리처럼 자신에게도 들리길 바랬다. 오늘은 주말이라 그와의 데이트를 위해 시간을 냈어야하는데, 자신과 상의하지 않고 유 작가를 만나러간다는게 그를 속상하게 한 것이다. 아무리 일과 관련 된 만남이어도 자신이 우선순위에 없다는 기분이 든다면서 연신 섭섭함을 말했다.


나를 이해시켜 달라는 부탁을 잊고, 내가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핸드폰 넘어의 태인을 붙잡고 이번만큼은 이해를 해줬으면 한다고 호소의 말을 토했다. 내가 하는 말들에는 태인이 이해하고 싶은 단어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유 작가를 만나러 가는 결정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약속을 취소하지 않았다. 태인이 나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눈치챘는지, 유 작가와의 미팅이 끝난 후 연락을 해달라고 했다. 핸드폰을 붙잡아봤자 결론이 달라지지 않을 것을 둘 다 알았기 때문에, 이만하고 전화를 끊은 것이다.


나는 유 작가가 알려준 카페로 향했다. 인왕산 아래의 작은 카페였는데, 외관으로 보아 오래된 건물이었다. 정원이 있는 가택을 개조하여 낮은 층의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오고, 산이 아래로 보이는 운치가 아름다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층고가 낮아 틈 사이로 먼지와 거미줄이 보였고, 쿠션감이 낮은 의자가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마실 수 있는 음료가 쌍화차, 둥글레차, 꿀차로 단촐했다. 뜨거운 둥글레차를 주문하고 유 작가를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사장님이 직접 차를 자리에 가져다 주셨다. 연기를 내는 차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뜨겁습니다. 데이지 않게 천천히 드세요.”


찻잔 소리와 테이블의 유리소리가 마주대면서 딸칵하는 소리가 화음을 내었다. 소리가 나는 찻잔 아래로 시선이 길게 머물렀다. 그 아래엔 한지 위에 쓰인 긴 글이 적혀 있었다.


<타락으로부터>
세치혀, 피해의식, 속임수, 배신은
눈을 통해 나오는 어두운 기운이며
칼 끝과 같은 살기 이다.

보이지 않는 …….


“편집자님. 안녕하세요.”


다음 줄을 읽지 못하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유무진 작가였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모습이 보이는 걸 보니, 이곳으로 오느라 꽤나 급했던 모양이었다. 유 작가는 함께 먹을 다과와 차를 새로이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급하게 연락을 드렸는데, 주말임에도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해요.”

“네. 작가님. 음…. 작가님의 말씀을 들어볼게요.”

“저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만 살 생각은 아니에요. 왜냐면, 출판업계 시장을 보니, 글쟁이로 살 수 있는 수명이 길지 않다고 보였기 때문에요. 운이 좋아서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매우 한정적이잖아요. 서점 매대로 가봐도 겨우 20권이 잘 보이게 진열될 뿐입니다. 글을 쓰는 일은 마치 몸에서 심장이 뛰는 것과 같은 삶이지만, 심장이 뛰는 것 만으론 오랫동안 살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작가들이 쓴, 심장과 글이 이전 보다 많이 읽힐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요.”

“음. 공감합니다. 좋은 글이어도 누군가에게 읽혀야하는데, 글이 드러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죠. 특히나 출판사 투고로 책이 탄생하는게 가장 그렇고요. 하지만, 작가님의 말씀은 투고를 통해 책을 펴내는 루트만 두고 이런 말씀을 하는 건 아닌거 같은데, 제 생각이 맞나요?”

“하하. 역시 예리하시네요. 맞아요. 출판사에 투고하는 원고 뿐만 아니라, SNS로 글을 공유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읽히지 못한, 보석같은 글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편집자님도 잘 아시잖아요. 저는 귀한 글들이 확률적으로 더 많이 읽히는 시장을 만들고 싶어요. 한국 뿐만 아니라 글로벌하게요. 작가는 좋은 글을 쓰고, 독자가 그 글을 읽는 방법. 그 방법을 바꿔서 새로운 시장을 시도하고 싶어요.”

“혁신적이군요. 쉽진 않을 것 같은데, 작가님이라면 해보실 수 있겠어요.”

“쉽지 않죠. 그래서 저는, 편집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생각하고 계신 방법이 있으시겠지만, 그러한 큰 시도에서 제가 어떤 도움이 될거라 보신거에요?”

“일반적인 이력서나 포트폴리오에선 읽을 수 없는, 이루나 편집자님의 에너지입니다.”


젊고 발칙한, 신선하고 강렬한. 출판업계에서 이무진 작가를 부르는 수식어였다. 순수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라기엔, 한 번쯤 큰 사고를 칠 것 같은 강인한 열기가 그에게 도사렸었다. 그 열기의 정체는 출판업계의 흐름을 바꾸고자하는 시도가 되었다. 그의 확신에는 무엇이 차 있을까. 그는 문자 위로 읽히는 정보가 아닌 사람과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공명된 에너지를 읽고, 결정의 증거로 삼았다. 게임판에 들어오라며 손을 흔드는 행위는 이미 모든게 결정된 이후, 통보와 같았다. 그의 확신은 방법이 아니라 신념에 있을 뿐이었다. 이무진이 삶을 꾸려온 방법은, 오로지 그의 신념이라는 것이다. 이 작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편집자님은 교정과 교열을 보시며 책을 완성시키는 일에 매우 재능이 있으십니다. 그러한 실력적인 부분은 이미 차고 넘칠만큼 출중하시어서, 이를 더 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저는 편집자님을 보면서, 교정교열과 같은 실무를 넘어서서 체계를 만들어 운영해나가는 모습으로 발전하시는게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게 보였습니다. 이루나 편집자님, 꿈 크시잖아요.”


나와는 단 한 번도 개인적인 목표에 관해 말을 나누지 않은 사람이, 나의 꿈의 크기를 말하고 있다.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묵인으로 답하는 나는, 그의 말을 긍정한다는 뜻을 보였다. 가보지 않은 세상에 대한 동경과 향해의 깃발을 소망처럼 품은 사람은, 비슷한 기운을 가진 사람에게서 보이는 표식 같은게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무진 작가가 내게 저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숨을 가빠졌다. 숨겨둔 이상향을 들킨 것 처럼 부끄러웠다. 이미 죽어버린 선인장이, 사실은 뿌리가 살아있었고, 물이 내리쬐길 기다렸을 뿐이라며 기지개를 펴대고 있는 것 같았다. 찾고 싶었고, 보고 싶었던 나의 모습이란 어디에도 없는 신기루였을 뿐이었지만, 여전히 정체 없는 탄생을 희망하고 있는게 보였다. 여전히 이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는게 부끄러웠다. 달라진게 있다면, 나의 쓰임을 찾는 세계에 대한 불신이 너무나 깊은 것이다. 변화 없이 살아야 덜 아프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작가의 제안을 거절했다.


“작가님께서 봐오신 제 모습은 일하는 저의 모습 중 아주 일부입니다. 그리고, 저는 현재 출판사에서 정규직으로 일을 한지 6개월이 갓 넘었고, 스카웃이었어요. 저는 지금 일하는 상황에 불만이 없고 오히려 저를 알아봐주신 분들께 고맙기만해요. 작가님의 제안이 무척 감사하지만, 현재 회사를 떠나서 작가님과 함께 하기엔 부담이 있습니다.”


거절을 전하는 내 대답에서, 이무진 작가는 눈빛이 흔들렸다. 이게 아닌데, 그럴리가 없는데라는 의아한 표정. 그 안에는, 이렇게 매력적인 제안을 거절하다니와 같은 말도 들려오는듯 했다.


“아. 연봉이나 복지에 관해서는, 업계최고로 대우해드립니다. 관련하여 준비된 안들이 여럿있지만, 저의 제안을 보시고도 썩 마음에 안드신다면 편집자님이 원하시는대로 제안도 가능합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니까요.”


아차 싶은 표정으로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살아오면서 거절의 순간이 매우 적었을 사람이지 않을까. 블랙홀처럼 매력적인 외모, 말투, 태도.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 하는 제안은 거절보단 승낙이 더 어울리는 그림인건 분명했다. 눈꼬리가 내려간 그의 얼굴은 생각으로 가득차있었다. 차를 한 잔 들이키곤 입을 떼어 말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퇴근 후 한 시간정도, 그냥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어떻게 일을 하고 있고, 제가 어떤 말을 하고 있고…. 이런 것들을 보기만 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 보수는 따로 드립니다. 운영을 간접적으로 보기만 하셔도 좋다는 말씀입니다. 보시고, 이것마저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면 언제든 그만 오셔도 됩니다.”


이무진은 끊임없이 독특했다. 당신 자신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도움이 된다는 건 분명하기 때문에 자꾸만 나를 끌어당기려고 하는 것인데, 이무진이 사람을 이끄는 모양새는 예상 밖의 꼴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 한 시간, 현재 본업과도 겹치는 업무가 아니라면 겸업 과도 상관이 없고, 더군다나 내가 다니는 회사는 직원의 겸업을 환영하는 개방적인 분위기를 가졌는데. 본업을 하기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직원 개인이 가지는 개별적인 경험은 오히려 조직에 보탬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기회가 된다면 해보라는 팀장의 말이 떠올랐다.


다음 계산은, 왜 이무진은 내가 회사에 오길 바라는 걸까로 넘어갔다. 고작 한 시간이라고 해도 회사 사무실에서 그곳의 직원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면 자연스럽게 그들과 동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 눈엔 바꾸면 좋을,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방식으로 해야 할 일들이 보일 것이며 그건 회사의 흐름을 바꿀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이무진은 자기 혼자의 생각으로 떠올릴 수 없는, 보다 더 날카롭게 흐름을 바꿔갈 정예가 필요하다. 내가 이무진의 회사로 들어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넋만 놓고 있진 않을 거라는 것을, 이무진은 너무나 잘 알았다.


혹시, 이 제안을 기회로 삼아 타성을 깨트릴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이러한 생각이 올라왔다. 흐릿한 의식 상태로 사는 이 상황이 내키지 않음은 확실하니, 나를 다른 쓰임에 던져보면 지긋지긋한 타성을 깨고 다시 새롭게 굴러갈 동력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무진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고민을 조금 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이 작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고민후 연락을 드리게다는 말에 가능성이 담겼으니 이 작가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의자 위에 올려진 자신의 검은 서류 가방을 열었고, 정갈하게 입구가 접힌 서류봉투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어떠한 일을 해낼 것이며, 어떠한 회사를 만들 것인지를 그려둔 보드입니다. 회사 IR 자료가 되기도하고요. 원래 편집자님께 제안드리려고 했던 부분들도 적혀있습니다. 결정에 도움이 되실거에요. 연락주세요.”



유 작가는 먼저 자리를 뜨고 나는 식어버린 둥글레차를 마셨다. 서류봉투에 담긴 내용을 꺼내어 읽어보았고, 희망차고 멋진 계획들이 가득했다. 서류를 맨 끝장까지 다 읽은 후, 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인은, 내가 스카웃 제의를 받은 것에 대해 아주 기뻐했다. 낭중지추는 이루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며 비행기를 태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내 능력은 어디서나 빛이 난다며, 인정받는 내 모습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응원했다.


태인은 언제나, 나의 쓰임을 기뻐했다.

내가 요즘 가장 의지하고 있는 것은 태인이기에, 태인은 나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이기에,

태인의 기쁨을 보며 나도 행복하고 싶었다.


태인이 기뻐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내가 이무진 작가의 제안을 따라가더라도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인의 목소리에서 나는, 거절했던 제안을 되새김질해보며 이무진과 일을 시작해보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여갔다. 헹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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