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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굴레 08화

어린 아이

by 슬기



9월.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한국 날씨에서 비행길에 올랐다. 산들바람이 얕게 퍼지는 9월의 마이소르를 상상하며 문득 올라오는 긴장을 쉼 호흡으로 달랬다. 나의 첫 비행은 마이소르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삼약이라는 아쉬람을 향했다. 도착한 시간은 밤이었고, 마중을 나온 가이드가 삼약으로 가는 길에 함께 했다. 새벽에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용 침대가 2개 있었고 문과 가까운 침대엔 방을 함께 쓰는 룸메이트 외국인이 자고 있었다. 찬 바람이 머물렀던 뺨에서 갑자기 눈물이 따라 내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이었고, 깊은 밤으로 숨고 싶었다. 눈꺼풀 위로 피로가 내려오는 걸 간신히 참아가며 옷을 갈아입고 몸을 눕혔다. 떠나오기 전엔 설렘과 기대가 있었는데 막상 이곳에 도착해 누워보니,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새벽 일찍부터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밀려왔다. 잠을 잔 건지, 밤을 샌 건지. 애매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을 때쯤 날이 밝았다. 새벽 6시 30분부터 하타 수련이 시작된다. 뒤척이던 몸을 일으켜 채비를 하고 수련에 나섰다. 함께 방을 쓰던 룸메이트는 미국에서 온 26살의 에밀리. 밝고 행복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었다. 그녀는 이틀 전에 아쉬람에 왔는데, 룸메이트가 없을까봐 내심 걱정했는데 나를 만나서 반갑다고 연신 손을 잡았다. 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본 맑은 얼굴이었다. 하타 수련이 시작되고 각자의 시간으로 들어서자, 옆에서 본 에밀리의 얼굴엔 진지함이 묻어났다. 방금 나와 이야기를 나눈 에밀리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인도에 온, 타국에서 인도까지 요가를 하러 온, 이 결정을 하기까지의 히스토리가 있을 것 같은 사람의 모습. 아직 길게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요가 수련를 하는 과정에서 공통점이 있을 것 같았다.


첫 수업을 진행한 선생님은 옴 만트라를 외우며 시작했다. 낯설고 어색했지만 반 박자 천천히 따라하며 몸을 움직였다. 매트 위에 올라간 건 오로지 내 몸뚱아리 하나,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정신. 요가 선생님의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핸즈온을 따라가며 이 공간이 어디인지 잊을 만큼, 이 순간에 나는 없는 느낌으로 시간을 보냈다. 사바사나 시간엔 발끝부터 머리까지 무겁고 긴 여운이 맴돌았다. 선생님이 천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크리슈나라는 신의 이름이 선생님의 목소리에서 멜로디가 되어 수련장에 퍼져나갔다. 마음에 찰랑이는 물결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옴 만트라부터 크리슈나 소리가 들리는 노래까지 도통 알 수 없는 음이 몸에 가득찼다. 성대 끝까지 눈물이 차올랐다. 어제 이 나라에 도착해서 방으로 왔을 때 흘렀던 눈물, 지금 여기서 얇은 옷을 걸치고 요가 후 떨어지는 눈물. 자꾸만 떨어지는 눈물이 분명 내게서부터 오는 것인데 내 것같지 않고 이유를 알 수 없이 떨어지는 걸까. 선생님의 노래가 끝나고 수카사나로 앉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고, 아무말 없이 한 사람씩 눈을 맞추기 만 하셨다. 손을 모아 나마스테로 건낸게 마무리 인사였고, 이곳에 더 머무르다 가도 좋다고 했다.


모두가 하나씩 머무른 자리를 치우고 나갈 때, 나는 좌선으로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눈을 감고 방금 느낀 여운을 곱씹었다. 숨을 골라 쉬며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쯤 눈을 뜨고 일어났다. 그때 방금 전 수업에서 만난 선생님이 문 밖으로 나가셨고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이름이 무엇인가요?”

낮은 목소리로, 눈을 마주치며, 옅은 미소로 물어왔다.


“루나입니다.”

한국에서도 달의 의미라고 말을 덧붙이니, 인도 점성술에서 달의 의미를 알려줘도 되냐고 물어보셨다.

“마음입니다. 마음을 거울처럼 보면, 변하는 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릴 수 있을거에요.”


선생님의 대답은 깊고 긴 의미가 열매처럼 매달린 문장이었다. 그 문장에서 열린 열매를 내가 어떻게 따서 먹을 수 있을지는 나에게 달렸을 것이다. 오로지 고마움만 있는, 시간을 내어 내게 진언을 준 선생님께 감사를 표했다. 선생님은 긴 말을 하지 않고, 여전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고 길을 나섰다.


선생님의 말에 꼬리를 물어 나에게 스스로 물어보았다. 내가 인도로 온 것은 어떤 마음을 비춰서 보려고 온 것일까. 이 마음을 따라 들어가면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내 이름이 루나여서, 그게 나여서, 나는 변화를 따라 살고 있는 것이고. 이 길의 종말이 있다면 나는 내가 알고자 한 삶을 진정으로 알아 차리고 궁극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을까? 나는 속박에서 떠나고자 왔다. 긴 휴식을 가지고, 내가 정하고 굴러온 굴레에서 떠나 새롭게 살고 싶어서 모든걸 멈추고 이 곳에 왔다. 그 끝을 알 수 없지만, 나는 자꾸만 찾고 싶은게 있다는건 확실했다.


도시를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커리 식당으로 들어가 이른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햇빛이 식당안으로 노크를 하며 천천히 들어오는게 보였다. 빛이다. 한국에서도 매일 보았던 햇빛. 내 앞에서 나를 비추고 있거나, 뒤에서 나를 따라오고 있거나, 언제나 나를 품고 있던 햇빛이 인도에서도 눈에 띄게 들어온다. 이 세상 어디를 가든 눈을 뜨면 보이는 태양빛에 그리움이 올라온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공간에서, 부를 수 없는 이름을 떠올려본다.


“루나!”

내 이름을 부른건 에밀리였다. 수련이 끝나고 근처를 산책하다가, 배가 고파서 찾아온 식당에 내가 있다며 손을 잡고 반가워했다. 작은 도시이지만 아름다운 풍경이 많다며 풀, 꽃, 집을 구경하고 왔다고 말했다. 에밀리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 나온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늘 한 하타수련이 좋아서 다음에 또 그 선생님을 만나고 싶고, 인도에 예정보다 더 길게 머무를거 같다며 이 곳에 오길 잘 했다며 행복해했다.


“어, 근데 나 아까 오는 길에 한국인을 만났어. 남자였고, 내일 우리가 수련하는 곳에 요가를 하러 올 예정이래.”


인도에서 만나는 한국인이라니. 유럽과 미국인이 대다수인 인도 요가 여정에 아시아인, 그중에서도 한국인을 이렇게 빨리 마주칠 수 있는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떤 수련자일까 궁금함이 들었다가 이내 에밀리의 조잘조잘한 이야기에 정신이 뺏겼다. 에밀리는 식사 후에도 나와 한참을 시간을 보내며 걷고, 마시고, 앉았다. 후에 있는 수련에도 함께 들어가며 따로 또 같이 하루를 보냈다. 잠을 자기 전까지 우리는 말이 없었지만 나마스테로 손을 합장하며 오늘 밤을 마무리했다. 뚝 떨어진 인도에서의 첫 날이 허하지 않도록 에밀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어제보다 조금 늦게 시작된 아침 수련은 10시에 시작되었다.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풀리지 않는 피로를 안고 수련에 나섰다. 어제보다 몸이 무겁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이어가며 몸을 고정시키고, 숨을 내쉬고, 피로가 제 알아서 머물다 나가길 기다렸다. 끼익- 하고 문을 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 사람이 내 앞자리에 앉아 수련을 이어갔다. 남자였고 한국사람처럼 보였고, 왠지 에밀리가 어제 말한 사람인 것 같았다.


싱잉볼로 시작된 수업은 어제의 하타보다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보다 자유롭게 이완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싱잉볼 소리가 조금씩 사라지고 깊은 숨을 내쉬는 것을 마지막으로 수업이 끝났다. 오늘은 더 머무르지 않고 나서서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에밀리가 산책을 여행처럼 하고 왔듯, 나도 이 도시를 구경하고 싶어졌다. 가지런히 정돈된 신발장에서 신발을 찾아 신고 길에 나섰다. 이리저리 지나다니는 길에 요가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결 편안해진 기분이다. 수업에 나서느라, 열심히만 살아내느라, 채우지 못한 무언갈 향해 오느라, 기대하는 미래만 바라보느라, 누군갈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터라 나의 갈길 마저 알 수 없었던.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멈추고 싶었지만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나의 인생길에서 일단 정지를 외쳤던 것을. 결박을 풀어헤치고, 기어이 이곳으로 온 나를 또 생각하게 된다.


“안녕하세요.”

뒤에서 익숙한 나랏말이 들린다. 순간적으로 너무 놀래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남자였다.

“어제 산책길에 한 친구를 만났는데, 한국인 친구가 있다고 말해서요. 인사해도 될까요?”


잔뜩 긴장이 올라오지만, 몸을 사리며 말을 건내는 사람에게 큰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을 하고나서 몇 분을 함께 걸었다.

“요가를 시작하고나서 인생이 좋아졌다는 걸 느꼈는데, 바쁘게 살다보니 안하게 되더라고요. 근데 하던 일을 멈춰야할 것 같고, 요가를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 오게되었어요.”


하던 일을 멈춰야 할 것 같다는 말에 귓속이 열리는 것 같았다. 마치 나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마냥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남자의 말을 대답 없이 듣고 있었다.


“이것 저것 하면서 열심히 살았는데,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했어요. 성공하고 싶은데, 아직 가야할 길이 긴 것 같아요. 더 열심히 살아야 할 일이 많이 남아서… 근데 좀 힘들어서 재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그전에 쉬는 시간 가지면서 요가도 하고요. 어쨌든 다시 잘 살고 싶어요.”


“이것 저것 했다는 건 시도의 증거이죠. 본인만 해낼 수 있는 것이고. 아직 채워야 할 것들이 많다고 느끼시겠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이것저것 해온 사람은, 결국 무엇을 해내지 않을까요?”


한 마디를 뱉었다. 시간을 내어 닿은 인연에 한 마디라도 대답을 붙여야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누군가를 그의 시도를 실패로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불굴의 의지로 말할 것이다. 말속에 선함이 묻어났지만 운이 안좋은 사람임이 느껴졌다. 세상은 그를 부정했지만 그에 맞서 희망을 찾아 내고자 하는 의지가 보였다.


“감동이에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뺐었네요. 이만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는 한껏 위로를 받은 눈망울을 갖고 있었다. 내가 어제 요가 선생님에게 받은 위로에 눈이 시렸던 것 처럼, 그는 나의 말에 위로를 받고 고마운 말을 입으로 전하는게 보였다.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날거라 여기며 길을 나서는 그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나는 마저 걷던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발바닥, 종아리, 허리를 타고 걸음의 피로가 올라왔다. 목이 말라서 카페로 들어가 마살라 짜이(밀크티)를 마셨는데 땀이 식자 낮잠이 몰려왔다. 눈을 감고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언제쯤이었는지 모를, 번뜩 눈이 떠지며 주변을 보니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게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렇게 깊고 조용한 잠을 마지막으로 잔게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잠이 꽤나 달았다. 더 자고 싶은 욕심이 생길정도로, 괜찮은 쉼에 머물렀다. 걱정이나 근심, 의문이나 저항을 모르는 아이처럼 잘 놀고 잘 자는 존재로 숨을 쉰 느낌이 들었다. 육신에 얽힌 영혼이 몸을 떠나 멀리 날아가 세계를 바라본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카페로 나와 나를 마주한 태양을 지켜보았다. 지는 석양이 세상을 품고 있었다. 석양의 머리 위로 밤이 흘러오고 있었고, 하루의 막이 내려가는 광경을 구경했다.


삼약에서의 한 달이 지나갔다. 해가 떠있을 때 자주 밖으로 나가서 걸었던 나는 손등과 발등이 까맣게 탔고, 꽁꽁 싸맨 얼굴과 목만 하얗게 둥둥 떠있었다. 에밀리는 그 모습이 독특하다며 이참에 전신을 다 그을려보는 것도 예쁠 것 같다고 말했다. 작은 일에도 기분 좋은 관심을 주는 덕분에 외롭지 않게 시간을 보냈다. 옴 만트라, 싱잉볼, 인도어로 된 노래, 신의 모습을 한 조각형상들, 향신료로 가득한 거리가 익숙해져갔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으며 상점의 주인들은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이 요가를 했고 카레를 먹으며 에밀리와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다. 에밀리가 어제 생각한 아이디어가 있다며, 이 아쉬람에서 만난 사람들과 짦게 여행을 떠나는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흥미로웠다. 익숙한 삼약이 마냥 좋다고 생각했던 찰나였는데, 이곳을 떠나 여행을 간다는 상상을 하니 얼른 나가고 싶어졌다. 만나온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나와 자신을 포함하여 2명 정도만 더 동행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연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 모습에 에밀리는 더 행복해하며 기대하라고 대답했다.


저녁이 되어 우리는 룸에서 다시 만났고, 에밀리의 침대에 배를 대고 나란히 엎드려 누워 일기를 쓰고 있었다. 무언갈 열심히 쓰던 에밀리는 작은 수첩을 열어보이며 나에게 “이거야!” 라고 말을 했다.

이름, 오엑스, 날짜가 적힌 메모였고 거기엔 4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Emily O 10/3

Luna O ?

Taein O 10/3

Jan O 10/3


“루나, 네가 가장한 날짜를 말하면 돼.”


X가 쳐진 이름들은 수련원에서 함께 만난 요기들과 그 요기들이 다시 다른 수련원에서 만난 요기들의 이름이었다. 한 번쯤 인사를 건낸 사이였고 함께할 가능성에 염두했던 이들이다. 에밀리는 하루종일 10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제안을 비춰낸 것이다. 가장 확실히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과, 가장 빠른 시간내에 떠날 수 있는 사람을 추려서 보여주었다. 내 이름 옆에만 날짜가 비워져있었다. 10월 3일이면 이번주 토요일이다. 이틀 뒤에 출발이라는 것.


“태인은 너가 저번에 만났던 그 한국인이야. 얀은 아쉬탕가 수업에서 자주 봤던, 아이슬란드에서 온 친구이고. 이들이 함께 해.”


이틀 뒤에 출발이라는 것은 고민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번 인사했던 한국인이 이 여행에 함께 하고, 그의 이름마저 알아버린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아무런 대답없이 고민에 잠긴 내 얼굴을 보며 에밀리는 물끄러미 눈치를 살폈다.


“루나. 괜찮겠어?”


이곳에와서 한국인과의 인연이 생겨갈 것 같은 흐름, 그리고 함께 아는 에밀리가 있다는게 어렵게 느껴졌다. 싫다고 하기엔 이상할게 전혀 없지만 이 인연을 맺기에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고 있었다. 그저 여행 순간에만 머물고 싶은 욕심도 함께 들었다. 에밀리에게는 내일 아침에 대답들 해주겠다고 말을 하고 싱긋 웃었다. 가기로 결정은 했지만 동그라미 사인은 내일 하겠다는 으름장을 장난으로 비춰지게 에밀리를 속였다. 격하게 좋아하는 에밀리의 어깨를 안아서 토닥거리다가 굿나잇을 말하고 나는 내 침대로 누웠다.


루나, 괜찮겠어 라는 에밀리의 질문을 나 스스로 읽어본다. 어디로 튕길지 모르는 공을 벽에 대고 튕기면 다시 공이 나에게 올 뿐, 달라지는 건 없다. 질문도, 대답도 공처럼 마찬가지로 튕겨지며 움직일 뿐이었다. 벽을 향해 마음을 던졌다. 조심스럽다는 심정을 보내면 마음을 걸어 잠구라는 대답이 라고 돌아왔고, 여행을 가고 싶다는 욕심을 보내면 순간에 머물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밤새 공을 튕기며 같은 질문을 반복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에밀리의 노트엔 Luna 이름 옆으로 10/3 이라는 날짜가 적혔다. 나는 질문을 멈축고 이들과 여행을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여행 전, 함께 떠나는 첫 여행지가 우띠라는 것만 알았다. 모든 준비는 에밀리의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마이소르에서 우띠까지는 버스로 4시간이 넘게 걸렸다. 태인은 버스에 먼저 탄 내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버스에 타기전부터, 얀을 데리러간 에밀리는 얀과 신난 얼굴로 대화를 하며 그들도 당연하다는 듯 함께 자리에 앉았다. 우띠에 도착해서 어떤 일정으로 나아갈 건지 손으로 지도를 그리며 설명하던 에밀리의 안내로 여행이 시작되었다.


창 밖을 넘어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소, 말, 염소가 길 위로 자연스럽게 다니며 나무 아래 그늘에 앉아 쉬는 도시.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눈에 담아본다. 한 달 동안 익숙해진 도시인데 낯설게 느껴진다.


“루나 씨.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정적을 깨고 태인이 말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태인은 이곳에 왔던 이유를 첫 만남떄부터 말을 했는데 나는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쉬고 싶어서요. 열심히 살아왔는데, 무엇을 향했는지 몰라서 모든걸 멈춰서 왔습니다.”

“저와 비슷하시네요. 처음에 제가 저의 얘기만 말하고 루나 씨에겐 묻지 못해서 오늘 물어봐요.”

“그 땐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서요. 음. 하던 일의 진척은 있었나요?”

“아니요. 이전에 어질러 놓은 일을 정리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썼어요. 다행히 리모트워크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기와서 할 수 있었네요. 이후에 무엇을 새로할지 고민을 했어요. 해야 할 일을 찾았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하려고요.”


그는 인도에 오기전 구두를 디자인하고 판매하는 사업을 했었다. 남성과 여성 모두가 멋스러움 신고 세상에 나갈 수 있는 자신감을 주는 기분이었다며 과거의 이야기를 늘어뜨렸다. 디자인을 배우는 과정은 고독했고 제작하여 실물로 만드는 일엔 지연이 따랐으며 이를 세상에 선보이고 판매를 하는 일엔 배신이 따랐다고 했다. 한끼를 해결할 1,000원 조차 없어서 지나가는 이에게 밥을 사달라고 부탁을 했던 시절이 있었고 수도가 끊겨 목욕탕을 전진하며 살았던 시기도 몇 번 넘겼다며.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호황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데, 여전히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하지 못하여 평생을 바친 일을 마무리 할 수 밖에 없었음을 고백했다.


태인은 나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며 말을 걸어왔지만, 대화는 내가 태인의 이야기를 듣는 쪽으로 흘러갔다. 지겹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지만 조리있게 삶을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태인은 핸드폰으로 자신이 디자인한 구두, 일정표, 작게 나온 뉴스기사를 보여주기도 했다. 마치 오랫동안 써온 일기를 툭- 하고 건네며 이 곳에 내 인생이 다 있다고 말하는 연설처럼 들렸다. 태인에 대한 경계가 조금씩 내려가는게 느껴졌다. 마음을 열었다기 보단, 에밀리와 점점 친해지기 시작한 느낌처럼 그냥 한 사람을 알아간 것에 불과했었다. 다만 삶의 목을 정하고,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치열하게 노력해온 궤적이 나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채워지지 않는 미완성에 목이 마른 영혼은 이상향을 찾고 싶어하고, 인간적인 노력을 부단히 일궈내지만 오랜 평안으로 숨을 수 없음을 깨는 것. 그래서 이제껏 해온 것들을 내려 놓으며 회한에 눈물을 담고, 인생이 생겨난 기존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굴레에 올라타 따라가는 것. 그것이 최선일 수 밖에 없는, 줄다리기 위에 서있는 나약한 존재…. 무엇을 알아채고자 하는지는 가보야아만 알 수 있기에, 그 끝까지 가려고 여행길에 올라서는 이방인 같은 존재. 내가 태인에게 나와 같음을 느낀 것은 이러한 탄식이었다. 점차 그에게 느껴진 경계의 정체를 알아채기 시작했다. 우리는 비슷한 아픔으로 공명하지만 나는 그 비슷함을 경계한 것이다. 과거엔 각자의 굴레를 누구보다 열심히 따랐고, 요가 속에 현재를 두고 있고, 미래엔 희망을 걸고 있는 점까지 비슷했다. 태인과 친해질 것 같은 직감은 이내 두려움이 되었다. 이는 결코 에밀리에게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아니었다. 우리는 친구가 아니라 다른 시간을 보낼 사이가 될 것이며 그 결정을 거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 이런. 또 제 얘기만 길어졌네요.” 한참을 떠들던 태인이 말을 멈추고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대답하며 시계를 보니 우띠에 도착하려면 아직 1시간을 더 넘게 가야하는데, 아침부터 이른 채비로 인한 노곤함이 몰려왔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잠을 자는게 낫겠다싶어 그대로 고개를 돌려 창문에 머리를 대었다. 덜컹거리는 버스의 작은 흔들림이 요람의 자장가 같았다.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공기의 결을 따라 머리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생겨났다. 한동제였다.


한동제를 따라 캠핑을 떠났던 그 날, 한동제의 향기와 손길이 만든 사랑의 장면.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여행길 위에 부드러운 바람이 방향을 터주던 그 날. 인도에서 맡은 바람이 한동제를 데려왔다. 왜 아직 없어지지 않았을까. 전 세계 어디에서나 있을 공기와 바람에서 한동제를 떠올려버리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서둘러 잠을 찾았다. 머릿속에 검은 물감을 붓는 상상을 했다. 떠오른 한동제의 얼굴을 새카맣게 지우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우띠에 도착했다는 말이 들렸고 부랴부랴 버스에서 내렸다.


툭툭을 타고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오늘은 우띠 시내에서 피자를 먹고, 토이트레인을 예약할 것이며, 넓은 고산지대를 느끼기위해 곳곳을 걸어다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모든건 척척박사 에밀리의 계획이다. 겉옷을 하나 챙겨 밖으로 나왔다. 숙소는 우띠 시내에서 오르막 중턱 쯤에 있었기 때문에 다시 시내로 내려가야만 했다. 고개를 돌리면 건물 사이로 언덕이 배경으로 깔린게 보였다. 대한 산이 마을을 안고 있는 포근함과 초콜릿과 차 향기가 도시 곳곳에 배여 있는게 우띠에서 느끼는 정취였다. 작은 테라스에 테이블이 2개가 놓인 가게에 앉았다. 피자와 맥주를 시켜서 밖을 구경하며 점심을 먹었다. 우리 넷의 얼굴은 광대 위로 태양이 머물렀고 그을린 살이 구릿빛으로 바뀌어갔다.


“에밀리 덕분에 우리가 너무 좋은 여행을 하고 있어!”


얀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맞아. 이 모든 순간은 에밀리의 설계와 선택이었다. 나는 피자를 먹고 난 다음에 토이트레인을 예약하는 일정에 대해 문득 걱정이 몰려왔다. 우띠에서 토이트레인을 타는 것은 한 두달 전에 예약을 하는게 일반적이라고 아는데, 그만큼 인기가 많은 자리를 어떻게 예약한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정해져있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는 내 습관이 여전히 툭 튀어나오는 대목이었다.


“나는 내가 만드는 선택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면 그 모습을 보는게 너무 행복해. 앞으로도 그렇게 살거야. 음, 아마 곧 있을 토이트레인 예약도 분명히 행복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걸?”


놀랍게도 에밀리는 미래까지 설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미래에 대해 묘한 불안을 걱정할 때 에밀리는 행복한 결과만 생각한다는게 달랐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하는 건지 신기했다. 그리고 곧 있을 일이 정말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기대되기도, 궁금하기도 했다. 우띠에서 먹은 피자는 우리 입맛에 딱 맞았고, 맥주의 적당한 취기는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점차 수다가 많아진 우리는 농담을 주야장천 쏟아내며 즐거운 식사를 마쳤다.


에밀리의 계획에 따라 토이트레인을 예약하러 갔다. 예매를 안내하는 역무원은 현재 4명이 탈 수 있는 좌석은 없다고 말했다. 현장 발권이 안되는건 아니지만, 4명이 동시에 예약하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밀리는 안된다는 말을 듣고서도 그 말을 수긍하겠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 한 시간 뒤에 다시 올게.” 역무원에게 곧 다시 온다는 말을 남기곤, 에밀리는 우리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일단 시내를 구경하자. 기분 좋게 놀고 웃다보면 좋은 일이 생겨. 진짜야. 나를 믿어봐.” 에밀리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 였다. 보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선한 미소와 확신을 드러내는 말투. 에밀리의 제안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우띠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소규모로 장이 서 있었다. 간이 부스에 옷, 악세사리, 옥수수, 초콜릿 등 먹을거리와 구경거리가 가득했다. 그 중 인도 사람들이 입는 전통 의상인 사리와 도티를 간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개조한 옷이 눈에 띄었다. 친절한 주인장이 옷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 외국인들이 4명이나 몰려 옷을 만지니 이것저것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혼이 쏙 빠지는 친절과 흥정이 끝나자 우리는 인도사람이 된 마냥 옷을 걸쳐입고 장을 마저 구경했다. 한 바퀴 정도 장을 구경하고 나니 40분 가량이 지나있었고 자연스럽게 역으로 다시 향했다.


우리가 역으로 들어서자 역무원은 다소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옅은 웃음을 보였다.


“너네 정말 신기하구나?” 라며 역무원은 에밀리에게 말을 걸었다. 말이 안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라도 한걸까? 정말 4명을 위한 자리가 나기라도 한거야? 한참을 얘기하던 에밀리와 역무원은 표를 건네는 작은 구멍사이로 박수를 쳤다.


“우린 내일 토이트레인을 타게 돼.” 에밀리가 말한 결론은, 에밀리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가까이서 함께 앉을 수 있는 자리 4개가 아니라 기차 한 칸을 띄우고 따로 앉아야했지만, 다행히 2명씩은 붙어 앉을 수 있다며 어찌되었든 예약이 완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취소자리가 생겼고 우리가 오기전까지 아무도 예약을 하지 않은 기적같은 상황이 생겼다. 내가 만드는 선택은 다 행복을 결정하는 것이라며 확신하는 에밀리의 말이 진짜였다.


고개를 돌려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레몬빛으로 빛나는 머리칼 사이로 포개진 하얀 얼굴, 그리고 한껏 올라간 눈썹에서 그간 그녀가 살아온 감정이 읽혀졌다. 웃을 때 도드라지는 광대엔 사랑, 행복, 기쁨이 모여있었다. 에밀리의 얼굴에서 드러난 곡선과,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서 들리는 진동에는 마르지 않는 에너지가 묻어났다.


확실하다. 에밀리는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찾고 의심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살아가는 굴레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녀는 의심과 아픔을 오래 안고 살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이 결정대로 된다는 것을 그 자체로 알고 있다. 물론 운이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어딜가나 폭풍우 날씨를 만나는 사람이 있고,오는 비를 그치게 만드는 마술을 불리는 사람이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에밀리는 원하는 것을 현실에서 발견하고 그대로 펼쳐지리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이다. 그 앎이 그녀의 삶을 만들어 왔다. 그녀는 그녀의 굴레를 평생 모르고 살지도 모르지만, 앎과 모름은 중요치 않다. 그녀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만드는 행복한 울타리 안에서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 순간이 고맙게 느껴졌다.


계획된 일정은 바뀌기 마련이다. 오늘 고산지대를 걷는 일은 내일로 미루어졌다. 하지만 이미 도시를 걷는 것으로 채워진 고산지대 구경이 아쉽지는 않았다. 해가 저물어가고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숙소에 올라가서 빠른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각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조용한 여유를 부렸다. 나는 침대위에 누워 오늘 도시 곳곳에서 찍은 사진을 구경했다. 에밀리의 얼굴이 보였다. 갑자기, 에밀리에게 오늘 느낀 것들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져서 말을 걸었다.


“에밀리. 나 오늘 너를 보면서 너무 신기했어. 사실 나는, 토이트레인을 타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어떻게, 예약도 하지 않은, 심지어 예약이 두 달전에 마감되는, 인기 있는 자리가 남을 거라고 확신한거야?”

“그거야 당연하니까.”

“조금. 조금 더 설명해줄래?”

“루나. 너가 현실에서 무엇을 보기 전까지는 그건 없는 일이야. 너는 네가 보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기만 하면 돼. 토이트레인을 타지 못할 거라는 걸 누가 정한거야?”

“음. 예약이 모두 되어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 사람들은 일정을 미리 정해놓아야 마음이 편안하고, 그리고 그게 자연스럽다고 느끼니까. 기차표 예약이나 우리가 요가를 하기 위해 수업에 오는 것도 다 미리 해놓아야 안정감을 갖고 다른 일도 할 수 있지.”

“루나, 너는 몇 년전에 인도에 요가를 하러 올 줄 알았던 거니?”


에밀리의 마지막 질문에, 모든 시공간이 일시 정지된 진공상태로 느껴졌다. 마치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내 몸이 넘어지는걸 알면서도 중력의 무거움이 몸을 바닥으로 쳐박게 하는 저항없는 상태처럼 나는 멍하니 서있었다. 에밀리의 마지막 질문에 아니 몰랐지, 라는 대답을 하고나서도 에밀리는 계속 말을 이어나가려고 했다. 사실 내가 이 대화를 멈추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에밀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에밀리의 이미지를 상상하게 되었다. 나는 스물여섯의 에밀리에게서 풍선을 잡고 놀이터를 뛰어다니는 다섯살 아이를 보았다. 여기저기를 쏘아 다니다가, 엄마를 만나면 너무 행복하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는 다섯살 아이. 그 아이의 세상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이 주어지고, 잠이 오면 장소가 어디든 잠을 자게 되고, 풍선이 갖고 싶으면 엄마에게 사달라고 말하는 요술로 가득 차있다. 원하는 것이 당연하게 따라오는, 스스로가 신이자 절대 규칙인 세상에 산다. 부족함이 드리우지 않는 세계에는 풍족함이 심겨져 있을 뿐이다. 처음이었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마냥 손을 잡으며 환영하던 모습이 에밀리의 세계이다.


“루나, 너는 모르지. 너가 얼마나 환한 빛을 내는 사람인지. 음. 어쩌면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르겠지. 네가 지금 가진 빛을 다 잃어 버릴 수도 있어. 하지만 진정한 빛을 잃어버렸다는 건 아닐거야. 너는 그런 존재가 아닌거 같아. 음.. 만약, 다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건 모두 잃어버려야만 하는 빛이었을거야. 너의 진정한 빛이 태어나기 위해서 버려야 할, 오래된 과거? 착각? 뭐 그런 것들 말야. 그저 네가 빛인걸 알면 돼. 하지만 모든 걸 다 비추려고 하지는 마.”


에밀리의 세계엔 모든 것이 다 있다. 그래서 더 채워야할 미완성의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에밀리의 눈에는 갈증에 목이 마른, 불안을 안고 있는, 변화를 무서워하지만 멈출 수 없는 폭발적인 에너지로 굴러가는 내가 없을 것이다. 나는 열심히 살아야 성공한다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온 폐해일 뿐일까? 아니, 오히려 무한한 경쟁과 성공은 한국 보다 미국에서 더 강요되는 가치일 것이다. 상황이야 어쨌든,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지는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에밀리를 배우고 싶어졌다. 에밀리의 세계를 감히 훔쳐보면서 그녀의 에너지를 닮고 싶어졌다. 마음에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을 떠나 올 때 내가 가졌던 소기의 목적들은 유효했다. 쫓겨사는 굴레가 아닌, 진정한 내 모습을 만나고 싶다는 것. 그를 위해 인도를 선택했고, 지금 요가를 하고 있는것. 그리고 내 모습을 만나고 싶은 욕구 아래엔 나를 사랑하고 싶은 본능과 사랑을 찾고 싶은 욕심이 함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에밀리에게서 배운 감정의 정체는 사랑이다. 사랑이 채워진 존재를 보며 오롯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에밀리를 통해 배웠다. 이는 에로스나 탐욕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지 순수하게 스스로를 사랑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으로 공명하는 삶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알아채는 것이었다. 진정한 내 모습에 가까워지는 움직임이 꿈틀거리듯 솟아나고 있었다. 이 감정을 거울에 비춘다면, 거울엔 무엇이 드러날까.


내 마음의 거울은 태인을 향해 있었다. 허나 그가 내 인생에 보이는 건 동제를 사랑했을 때의 감정과는 달랐다. 그에게서 비춰지는 나를 보기로 한 것에 가까웠고, 사랑이라 정의하기엔 두려움이 존재했다. 한동제의 등장은 밤이 한참인 하늘에서 서서히 빛을 내며 어둠과 밝음의 경계 마저도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사람이었다면, 태인은 하늘을 칼로 이둥분하여 자신만의 색깔로 한쪽을 아에 칠해버리는 파괴력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그래서 이상한 느낌. 두렵지만 궁금하고 알아보면 어찌될까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아마 나는 나에게 비춰지는 태인을 더 선명히 보게 될 것 같다.


초콜릿을 몇 봉지 손에 쥐고, 우띠의 차 향기를 옷에 담아 삼약으로 돌아왔다. 이 후에 나는 TTC (티쳐트레이닝코스)에 등록을 했고, 태인과 에밀리도 함께 하기로 했다. 얀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한 달간 할 일을 하고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 에밀리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지냈다. 티쳐트레이닝 코스의 첫 날, 선생님 곁에 둘러 앉아 화로에 불을 피우고 오프닝 세레모니를 했다. 일렁이는 불길에서, 타닥- 소리를 내는 나무에서, 함께 앉은 요기들의 얼굴에서 온기를 바라보았다. 옆엔 태인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태인은 코스 내내 내 옆에 머물렀다.


시간이 흘러 클로징 세레모니를 하는 날 아침, 태인은 나를 보며 말했다.

“집을 짓는 일을 하려고요.”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삶을 사시는 것 같네요.”

“하하. 정확히 보셨네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집을 짓는 일을 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배울 거에요. 그리고 저도 제 집에서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가족을 만들고 싶네요.” 클로징 세레모니를 위해 하얀 옷을 입고 온 태인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 깨끗한 피부, 요가를 하며 곧게 펴진 허리가 그의 매무새를 완성했다.


“루나씨. 한국에 돌아가시면, 저를 만나주세요.”

엊그제 태인을 향해 기울어진 추는, 확실히 이곳으로 따라들어오라는 심판을 선언했다. 기울어졌지만 고민되는 마음도 똑같았다.


“저는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아뇨. 이미 저를 좋아하고 계십니다.”

“왜 확신하는 거죠?”

“저랑 함께 하실 때 웃으시니까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모든걸 솔직하게 터놓는 태인은 원하는게 있으면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돈이 없을 때 느끼는 부끄러움에 무너지지 않았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거침없이 돈을 구하고 대충이라도 음식을 우겨먹고 사는 사람이다. 배고픈걸 참고,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내지 않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태인은 거침없이 경계를 부셔버리는 겁이 없는 아이였다. 에일리의 천진난만함에서 느낀 아이와는 달랐다.


“만납시다, 저랑.”


태인은 설명이 길지 않았다. 구구절절 늘어뜨리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말하는 그의 말투에 놀라지 않은건, 예상했던 일이라서이다.


원하는게 있다면 반드시 가져야하는 영혼을 곁에 두는 건, 아이를 키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녔지만 그만큼의 변수를 안고 키워야 한다. 내 마음은 결론을 짓지 못했다. 그저 정확한 거절을 드러내지 못한채로 태인을 따라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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