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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굴레 07화

사랑의 오만가지 모습

by 슬기






진해가 우리집으로 찾아왔다. 편의점에서 산 비닐봉지에 맥주와 씹을 육포를 담고서. 솔직히 말하면, 수화기 넘어로 나의 직업 고민을 털어놓았던 그날 밤 진해가 해준 말은 틀림없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진해의 정답이 불편했다. 겉으로 보기에 괜찮은, 그만하면 만족하는게 살기 편한 직업.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일복을 신의 자비로 여기는게 좋을듯한 마음 가짐으로 살아가는 것. 보통 평균보다 많이 받는 월급에 자족하는게 틀린말은 아니었지만 내게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퇴사까지 쉽지 않았을텐데. 이제 뭐 하려고?”


진해의 질문은 그녀만의 걱정과 관심 표현이다. 진해는 오래전부터 나의 학점, 연애, 공부, 동기 모임에 넘치는 질문을 두었다. 중간고사 성적은 몇 점인지,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 얼굴은 어떤지, 공부는 잘 되어가고 있는지, 자기를 부르지 않고 만나는 회사 동기모임에 누가 참여했는지와 같은 것들이 그녀의 관심사였다. 진해를 함께 알아온 사람들 중에서, 진해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몇몇은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진해를 멀리했다. 진해와 친했던 사람들이 점차 그녀와 멀어진 이유는 각자 다른 사건이었지만, 공통된 이유는 같았다. 그 이유를 처음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진해와 보내는 시간이 잦을 수록 그들이 진해에게 거리감을 만든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진해는 자신이 아는 것만을 옳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심정, 처한 상황을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악의는 없지만, 듣고나면 기분이 나쁜 말들을 스스럼없이 했다. 진해는 이런 자신을 걱정하여 말투와 태도를 바꾸면 좋겠다고 말하는 친구들을 적대시하여 멀어지고, 진해의 부정적인 태도를 미리 멀리한 친구들과는 더 친해질 수 없었다.


“요가. 요가하러 떠날거야. 인도로.”

“인도? 하필이면 치안이 안좋기로 소문난 인도로? 너혼자?”

“치안이 안좋은건 북인도 쪽이고. 내가 가는 지역은 남부 마이소르라는 지역이야. 큰 도시이고, 요가 수련으로 많이들 와. 치안 걱정은 안해도 돼. 몰론 혼자가고.”

“왜 하필 요가야? 이미 한국에선 유행도 지났고. 요가 강사하려고?”

“내가 언제 유행 생각하면서 살았냐. 티쳐 트레이닝 과정을 하긴 하는데, 어떻게 살진 좀 더 천천히 생각해보게. 돈만 생각했으면 퇴사 안했지.”

“너 공부한거 아깝다.”

“그렇긴 하지?”

“근데 너, 동제씨랑은 이제 연락안해?”


진해의 입에서 동제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휘둥그레진 눈을 그녀에게 고정했다. 잊은 이름이 마음속에서 솟구쳐오르자 나는 더욱이 진해가 불편해졌다. 그녀가 사온 맥주와 안부를 묻는 이 시간에서 친절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동제한테 어떻게 연락하냐.”

“연락이 오지도 않아? 너랑 동제씨 잘 맞았잖아. 그리고 동제씨가 너 많이 사랑했잖아. 그럼 결혼했어야 하는거 아니야?”

“너는 요즘 만나는 사람 있니?”


나는 관심사를 돌려 진해의 연애 이야기로 넘어갔다.

“...”

내 질문에 말이 없어진 진해는 미지근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꽉 다문 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붉어지는 진해의 입술에서, 튀어나오지 못하는 이름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진해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얼마전에, 또 만났어.”

“징하다. 너도 징하다고 느끼니?”

“그래…. 그 사람을 거부할 수가 없어.”

“야. 솔직해져봐. 사랑이야, 미련이야?”

“...둘 다.”


사랑이지만 미련인, 양가 감정을 두쪽다 채워 버릴 수 없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 온전한 평화보다 불안한 지옥에 가까우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보단 소유하고 싶은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진해의 정의였다. 진해는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진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전 회사에서 만난 직속 선임이자, 두 아이의 아빠이며, 다리 한 쪽을 쓸 수 없는 와이프가 있는, 오래전 연인이다.


처음에 둘은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선후배사이였고, 서로에게 마음을 둔 평범한 연애를 했다. 남자가 일본으로 인사발령을 받고 나서 둘은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남자는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여인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진해는 오래도록 그 남자를 그리워했지만 영영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예정으로 나간 사람을 다시 찾을 순 없었다.


떠난 남자의 소식을 처음으로 다시 들었던 것은, 일본에서 난 지진으로 남자의 집이 무너졌을 때 미처 피하지 못한 콘크리트에 오른쪽 다리가 깔려버려 무릎 아래를 쓸 수 없게된 와이프의 비보를 동료로부터 건네들었을 때였다. 두번째로는, 그 이후의 피해를 복구할 수 없기 되자 모든 삶이 무너져 일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일을 구하려고 이력서를 내고 있다는 소식을 같은 동료가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남자는 한국에서 쓰던 전화 번호를 바꾸지 않았고 늦은 밤, 예고도 없이 진해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진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을, 그 남자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둘의 전화는 멈추지 못했고, 그 날 밤 예정없이 만났다고 한다. 그리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밤을 함께 보내며 그리움을 나눴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진해는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이제 좀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너도 알잖아 이거 아닌거.”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근데, 나 이 사람 아직 너무 좋다.”


남자는 아내에게 출장을 명목으로 한 달에 두어번, 평일을 이용하여 외박을 했다. 그가 진해를 만나러 오는 날이다. 진해가 남자에게 먼저 연락을 할 때면 진해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단 한번도 진해가 원할 땐 남자를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남자 진해를 찾을 땐, 미리하는 연락이 없어도 진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남자를 진해는 거부하지 않았다.


“왜 굳이, 네 몸도 정신도 버려가며 대접도 못받고. 그 사람이 하자는대로 휩쓸리는거야? 자존심 안상해?”


그 남자는 와이프에 대해서도, 아이들에 대해서도 책임감으로 산다는 말 이외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리가 없는 와이프와 아이 둘을 먹여살리려고 살고 있다는 말 이외엔, 진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가 동정심을 유발하여 진해를 이용하는 걸로 보였다. 그런 얕은 수가 진해에겐 먹혀왔고, 진해의 마음이 파멸에 이르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되지 않았다. 진해는 과거의 연인관계를 현재로 긁어와 지금도 연인일지 모른다는 허상에 매달려 살아갈 뿐이었다. 과거의 당연함이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믿어야 죽지 않을 진해였다.


남자도 진해도, 와이프와 그의 아이에 대해선 부끄러움이 없어 보였다. 그들이 사랑이라 이름 붙인 딱지에서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아보였다. 나는 더 이상 진해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진해와 나 사이엔 각자가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고, 진해의 굴레는 그녀의 결정과 마음에 따라 구를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진해가 보는 나는 그간 배운 것들을 뒤로하고, 보이지 않는 미완성을 채우려하고, 사랑했기에 보낸 사랑이 있는, 요가를 하기로 결정한 바보일 것이다. 우린 서로를 쓰잘데기 없는데 힘을 쓴다고 생각하는게 분명했다.


진해는 한동제의 마음이 짙다면 내게 연락이 와야한다고 믿고 있다. 가정이 있어도 자신을 찾는 남자의 행동만큼은 되어야 농도 짙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거라며.


내 곁에서 오래도록 힘들까봐 보내는 것으로 결론을 진 사랑과

내 곁에 있으면 안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관계로 결론을 진 사랑은

무슨 이름으로 불릴 감정일까. 멍청함? 미련? 파멸?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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