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닥불 Oct 13. 2024

산에서 발목을 접질리면 벌어지는 일

작년 추석의 일이다. 대모산에서 내려오다 넘어져 발목을 크게 다쳤다. 평생 깁스 비슷한 것도 한 번 안 해본 나로선 갑작스러운 부상이었고 처음 겪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발목의 불편함이 남아 있으니 회복 시간도 생각 이상으로 길었다. 그 산이 대모산이라는 것도 꽤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대모산은 아주 야트막해서 인근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가끔 소풍 삼아 오르는 그런 산이다. 주인 따라 나온 동네 강아지들도 정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등산 좀 다녀봤다 하는 사람들은 내가 대모산에서 넘어져 깁스를 했다고 하면 "대모산이요? 풉"이라는 반응을 보여 나를 작아지게 만들곤 했다.


그날 나는 남편과 함께 언제나처럼 가볍게 운동하자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컨디션이 좋아 대모산 정상과 구룡산 정상을 연달아 찍고 나니 신이 났던 것 같다. 기분 좋은 스텝으로 춤추듯 계단을 내려오다 넘어져 발목이 꺾인 채 주저앉았다. ‘악’ 소리와 함께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를 만큼 아팠다. 발목을 감싸 쥐고 고통을 참는 짧은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게 뭐지, 부러진 건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와, 왜 이렇게 아파? 잠깐만, 나 요가할 수 있나? 아니 요가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려가야 하잖아. 119를 불러? 부르면 여기까지 오긴 오나? 등등.


(당연히) 119를 부를 정도는 아니어서 조금 진정한 후 오른발에 의지해 마저 내려가기로 했다. 남편에게 업힐까도 생각해 봤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넘어져 코까지 깨질까 봐 불안했다. 그리하여 누가 봐도 산에서 막 다친 사람의 모양새로 조금씩 하산하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둘 말을 걸기 시작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만나는 아주머니 아저씨들마다 전부 한 마디씩 했다. “아이고 다쳤나 보네", "많이 아프면 구급차를 부르지", "남편이 업고 가면 되겠다", "빨리 병원 가봐" 이런 말들. 심지어 두 아주머니는 내 발목을 두고 서로 투닥거렸다. “아가씨, 내려가자마자 치료받아야 해. 정형외과 가지 말고 한의원 가서 침 맞아”, “아니야 정형외과에 가야지. 한의원은 소용없어”, “한의원에서 사혈하고 침 몇 번 맞으면 바로 낫는다니까”, “부러졌으면 어떡하려고. 정형외과 가서 엑스레이 찍어야 돼”, “아니야. 저번에 내 아들 친구가 축구하다가 발목을 다쳤는데 어쩌고 저쩌고...”


갑자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약을 꺼내주는 어르신도 있었다. 평소 무릎이 아플 때 먹는 약이라면서 텀블러에 담긴 물까지 세트로 내미셨다. 남편이 옆에서 ‘너는 그게 무슨 약인 줄 알고 함부로 받아먹니’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해서 냅다 입에 넣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지팡이가 있으면 내려가기 훨씬 수월할 거라며 나무 막대기를 찾아 주셨다. 중간에 더 튼튼해 보이는 게 있으면 바꾸라는 말과 함께. 거의 다 내려왔을 땐 막 올라오던 아저씨 한 분이 이제 다 왔으니 힘내라고 응원의 말을 건네주셨다. 그런 말들이, 그런 마음들이 내 마음을 너무나 따뜻하게 해 줬다.


사실 다치기 전에는 대모산 사람들이 이렇게 다정한 줄 몰랐다. 원래는 눈을 마주치는 등산객마다 고집스러운 무표정이었다. 좁은 산길을 오르내리다 마주치면 눈인사라도 해줄 법한데, 살짝 미소지어 보여도 언제나 무뚝뚝한 반응만 돌아왔었다. 나름 동네 뒷산인데 너무 정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발 한 번 절어보니 온갖 사람들이 정 많은 ‘걱정인형’이 돼 몸 둘 바를 모르겠던 거다.


재밌는 건, 발목이 좀 나아지고 4개월 만에 대모산에 올라서는 다시 무표정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됐다. 나름 훈훈했던 기억이 생각나 앞에 오는 사람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씩 웃어 보였지만 돌아온 건 ‘얘 뭐지?’ 하는 눈빛이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도 반갑게 인사하는 것보다 눈을 내리까는 게 더 자연스러운 세상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누군가 다쳐서 다리를 저는 걸 보면 이 사람들은 다시 귀여운 참견쟁이로 바뀌겠지.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주고, 나뭇가지를 주워주고, 정형외과에 갈지 한의원에 갈지를 두고 자기들끼리 옥신각신 하겠지. 귀여운 대모산 사람들. 요즘도 나와 남편은 주말이면 대모산으로 향한다. 단, 계단을 내려갈 땐 각별히 주의하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