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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Dec 17. 2023

덕질의 삶, Digging의 앎

20231217

삶은 넓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깊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일을 해보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며 많은 경험을 쌓는 건 인생의 소중한 자산이 되어줄 것이다. 보는 시야도 넓어질 것이고 무엇이든 주저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배짱도 두둑해질 것이다.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내가 있을 곳이, 내가 누릴 수 있는 경험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면 단지 지금의 나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면서도 과감하게 지금까지의 것을 버리고 다른 무언가에 뛰어들 줄도 알게 될 것이다. 그만큼 삶의 넓이는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듯, 한 가지만 중요하지는 않은 법이다. 무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될 땐, 항상 그 반대의 중요함도 있다는 것을 염두할 필요가 있다. 삶의 넓이도 그렇다. 넓이도 중요하지만 때론 깊이도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넓이의 반대말이 깊이는 아니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것저것을 기웃기웃하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선뜻 해보는 태도는 참으로 권장할 만 하지만, 때론 그 가운데 어떤 것에 꽂혀 한 없이 파고들어가 보는 경험 또한 소중하다. 이른바 덕질의 세계. 좀 더 우아하게 말해 Digging 하는 삶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나로서는(물론 그 덕에 먹고살고 있긴 하지만), 접근성과 이동성이 좋은 이 매체들의 폐해를 항상 경계하지만, '덕질'에 있어서만큼은 이 매체들의 유용성이란 기특할만하다. 덕질의 양과 질을 높이는데 톡톡한 기여를 했다고 할까. 혹은 소수만의 전유물이었던 덕질의 대중화를 가져왔다고나 할까. 덕분에 두꺼운 안경을 끼고 친구도 없이 방에 처박혀서 남들은 이해 못 할 무언가를 좋아하고 수집하는데 몰두하는 '오타쿠'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크게 개선되었고, 이제는 하나의 '능력'으로, 혹은 열정적인 '취미'로 권장되기도 한다. 자신의 기이한 취향을 숨겨야 했던 오타쿠는 이제 '덕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드러낸다. 그렇게 덕질은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되어 간다.


이제 덕질의 종류와 분야는 천차만별 무궁무진하다. 오래된 오타쿠의 분야였던 피규어 수집부터 정교한 창작 행위에 이르기까지 덕질의 세계는 그 깊이만큼이나 넓어졌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덕질의 본질은 역시 깊이다. 세상 어떤 것이라도 파고들다 보면 그 세계는 끝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피규어만 해도 그 재질부터 크기, 정교함과 희귀성까지 같은 종이라 해도 그 만듦새의 속성과 수준에는 여러 가지의 기술과 방법이 따른다. 한 뮤지션의 음악도 그의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하게 된 계기, 데뷔 전 이야기부터 데뷔와 함께 성장해 가는 드라마, 좌절과 복귀, 실패와 성공, 창작과 연습의 고통 등..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하나의 예술 세계 또는 삶의 세계를 파고들어 가다 보면, 어느덧 인간적인 정도 들고 단지 응원한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의 애틋함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덕질은 어떤 수집품과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사물이나 자연, 여행지와 음식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누군가는 덕질은 소모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덕질이란, 어떤 것에 한 없이 파고들어 알아내고자 하는 Digging의 행위란, 단지 소모적이기보다는 신비하고 오묘한 데가 있다. 기본적으로 덕질은 무언가에 대해 '알아가는'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무언가에 대해 아주 속속들이 빼놓지 않고 그것의 모든 것을 알려해 본 경험이 얼마나 있겠는가. 대부분은 주어진 과제나 의무, 강제된 책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배워야 했던 경험이 대다수니 말이다. 하지만 덕질은 그런 '과제'와는 그 출발부터가 다르다. 그것을 탐구하도록 명령하는 자는 본인 스스로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알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앎의 행위에 있어 동기와 열정을 어떻게 비교할 수나 있겠는가. 그렇게 강렬하게 무언가에 대해 알고자 노력하는 일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니 덕질은 아름다운 행위라 할 수 있다.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덕질은 '앎' 자체의 본질에 대해 알게 되는 길이 된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안다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과제와는 다른 특성이다. 과제는 점수나 성과로 결과가 나타나지만 Digging은 그 앎에 끝이 없으며 그러므로 결과 또한 없고 계속되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앎은 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니까 무언가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잘 알게 되는 것도 같은데, 또 어느 순간 그 앎의 단계를 넘어가면 내가 가진 앎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되는 때가 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수집을 해도 모든 것을 다 수집할 수는 없을뿐더러 설령 그렇다 해도 그 모든 수집품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뮤지션을 너무 좋아해서 덕질을 아무리 한다 해도, 그의 음악 세계를 다 이해할 순 없고 그의 삶도, 인간으로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끝내는 다 알 수 없다. 그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도무지 어떤 앎도 완전하고 정확하지 않고 단지 내가 아는 그런 '면'도 있을 뿐임을, 아니 그 조차도 나의 추측과 해석일 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앎의 불가능함 혹은 불충분함을 알게 된다고나 할까.


그렇다 보니, 덕질을 한다는 건 어쩌면 철학을 하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가 단지 편견으로만,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그 대상의 얄팍한 표면을 넘어 깊숙이 내적 본질을 탐구하다 보면, 이것은 하나의 오묘하고 복잡한 세계이며 나는 그것의 일부만을 보았을 뿐이고 다 알지 못하고 다 알 수도 없음을 알게 되는 신비랄까. 그리고 그때 맞닥뜨린 그 신비는 결국 알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아닌, 그것의 오묘함과 복잡함을 인정하며 그때그때 내가 취할 수 있는 일부만을 취할 뿐이라는 겸허함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탐구하게 되는 여전한 호기심과 도전의 감정이다. 그러니까 다 안다고 한다면 더 알게 없으므로 더 이상 흥미를 잃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계속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전 속에서 나는 살아있음을 느다.


덕질의 세계, Digging의 삶을 말하다 보니 어느새 너무 멀리 왔다.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덕질과 Digging은 삶에 꼭 필요한 태도이자 행위임을. 그것은 어떤 것을 배우는 가장 빛나는 태도이자 앎에 이르는 힘겹지만 유일한 길임을. 그리고 결국은 그런 덕질과 Digging의 반복이 쌓여 세상을 보는 내 시야는 넓어지고 내 세계는 깊어지는 것임을. 곧, 삶의 넓이와 깊이는 결국 닿아있는 것임을.


왠지 기-승-전-결이 아닌 기-승 - 결로 끝나버린 비약의 글쓰기가 되어버렸지만, 이것은 어떤 장르와 형식을 지향하는 글이 아님을, 애초에 핸드폰과의 경쟁을 위해 만들어낸 '간이 글쓰기'일뿐이라는 비겁한 변명 속으로 숨어 본다. 다소 교훈적으로 마무리해 보자면, 무언가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 Digging을 한다는 건 그저 눈 감고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는 행위와 같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코끼리의 다리를 그 미세한 주름부터 피부와 털에서 느껴지는 촉감, 더듬더듬 유추해 보는 모양새로 계속 알아가다 보면 어쩌면 조금은 다를지라도 전체 코끼리의 모습을 대략은 그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앎의 과정이란 결국 그런 막연한 희망과 기대감을 품는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막연한 희망 끝에 도달한 앎의 전체마저도 결코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 그래서 끝없이 지연되는 앎의 확신만이 오히려 진정한 앎에 가깝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앎의 실체인 것이다. 하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런 앎을 위한 출발에 덕질과 Digging의 단순한 호기심이 놓여 있으며, 그런 단순한 호기심만이 비로소 Digging의 먼 길을 출발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Digging의 길에 결코 지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한 앎이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안다는 건 손에 쥔 앎이 아니라 앎을 손에 쥐려는 그 행위에 있음을..


결국은 나 스스로를 위로하는 글쓰기가 되어버렸지만, 우리 모두 덕질과 Digging의 마음을 놓지 않기로 하자는 다짐을 건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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