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어서 미안합니다...
저 산맥은 말도 없이 5천 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저 강물은 말도 없이 5천 년을 흘렀네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신형원, '터' 中)
대학 시절, 예비역 복학생들끼리 모이면 군대 얘기는 절대 빠질 수 없는 대화 주제였다. 저마다 자기가 더 고된 군생활을 했음을 주장하는 고생올림픽이 벌어지고, 그렇게 투닥대다가 결국 별 의미 없이 마무리되는 참 보잘것없는 대화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이 실없는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던 선배 형이 넌지시 했던 말이 있다.
니들은 비화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산불진화요원 출신이었던 그 형의 말에 우린 늘 저 형 또 저런다고 웃으며 넘겼지만, 형은 군복무 시절 마주했던 산불이 정말 무서웠다고 말을 했다. 형이 얘기했던 저 비화라는 것, 즉 불꽃이 바람에 날아가는 장면이 정말 공포스러웠다고. 그 형의 말이 사뭇 진지했기에 난 아직도 저 '비화'란 단어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불꽃들이 날리며 일으켜버린 엄청난 규모의 산불을 목도하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중이다.
자연 앞에선 한없이 작은 존재가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온갖 과학 기술이 발전했다는 지금도 자연재해에는 정말 이토록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새삼 절망감마저 느껴진다. 세상엔 물이 참 많은데, 그 남는 물을 모아서 저쪽으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니... 평소에 내리는 빗물을 산속 어딘가에 저장해 놓았다가 이럴 때 확 터뜨려서 뿌려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주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이번 산불을 바라보는 마음이 너무나 참담하다. 물론 그 불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의 마음에 비할바는 아니겠지만...
신형원의 '터' 속 가사처럼 말도 없이 묵묵히 5천 년을 살아왔다는 산맥 속의 산들이 산불로 인해 까맣게 타버려 잔해만 남은 모습을 보면 내 마음도 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나무들은 물론이거니와 저 산속에 살던 짐승들과, 땅 속에 살던 곤충들은 어떤 고통 속에 죽어갔을지 생각하면, 이런 불을 일으킨 인간들은 자연으로부터 계속해서 벌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뭔데 수천 년 동안 무사히 살아 숨 쉬던 이 터를 이렇게 파괴해버리고 있는 것인가.
어젯밤 라디오를 듣다가 흘러나온 이 노래를 듣고, 인간이어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모진 바람과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온 존재들이, 그저 한 줌밖에 안 되는 인간이란 종족들 때문에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이토록 맑은 가사와 밝은 목소리로 노래해야 할 '터'는 지금도 고통받고 황폐해져 가고 있다. 그래서 난 이 오래된 노래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지고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발 디디고 살고 있는 이 땅과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되새길 수 있도록.
그리고... 이번 산불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https://youtu.be/sYKZiJezv3A?si=KEfQtKOtdAUNi2g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