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미 May 27. 2024

나의 전 남친 결혼식에서 친구는 왜 눈물지었나

난 진짜 진심으로 완전 철저하게 괜찮다니까

평일 하루는 남편과 함께 ‘나솔데이'를 한다. 맛있는 거 먹으면서 '나는 솔로'를 보는 것이다. 간혹 너무 몰입한 나머지 옆에 있는 게 남편이라는 걸 잊어 아슬아슬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보통 남자 출연자의 몸매가 드러날 때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거나, 남자 출연자 외모에 호평을 하거나("잘생겼다") 예전 연애 이야기로 잘난척 하거나("난 열 명 넘게 만났어") 등 순간적인 말실수로 난감해지곤 하는 것이다.


이번 편에서도 어김없이 실수했다.


"영자 지코 닮았다."


"오 진짜네. 눈매가 비슷하다. 예전에 페스티벌에서 지코 봤는데 아~~ 지코 너~~무 귀여워!"


남편이 천천히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 귀...귀엽다는 게 애기처럼 귀엽다는 거지, 남자로 귀엽다는 게 아냐. 우리 애기처럼 귀엽다고. 응? 헤헤."


"..."


남편이 말없이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도 나도 알고 있다. 지코가 설마 애기 같아서 귀엽겠는가. 남자로 귀여운 거지. 힛.


지난주에는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예전 연애 얘기가 튀어나올 뻔했다. 이번 기수 화제의 인물 정숙과 그녀가 직진 중인 영호의 대화에서였다.


"너 H엔지니어링 언제 입사했어?"


"나 OO년."


"너 그럼 OOO 알아?"


"이름은 들어봤는데. 누구야?"


"내 전 남친이야."


와우, 정말 솔직하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관점에서 흥분했다. 내가 (결혼 전) 설파하고 다녔던 '대한민국 연애 시장은 한 다리 건너 모두가 아는 사이‘라는 이론에 딱 맞는 예시였기 때문이다. 20대 시절, 경험상 소개팅 풀이 생각보다 좁았다. 나랑 소개팅했던 사람이 내 친구랑 소개팅해서 사귄 일도 있었고, 소개팅에서 만났던 사람을 몇 년 후 소개팅에서 다시 만났다는 얘기도 몇 번 들었다.


내 경우는 이러했다. 대학 졸업 전 취업을 준비하면서 여러 건의 면접이 잡혔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가 내가 면접 볼 회사에 다니는 선배와 연결해 줘서 면접 팁과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면접에서는 떨어졌지만, 무척 친절하고 매너 좋았던, 이름마저 특이했던 남친 선배는 오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다음 해, 우여곡절 끝에 입사한 첫 회사에 적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동네 단골 술집에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친구 지연이가 밤 10시 가까이에 도착했다.


"지연아 여기!"


"어 늦어서 미안. 나 맥주 딱 한 잔만 할게. 여기요, 오백 한 잔 주세요!"


"너 오늘 소개팅 어떻게 됐어?"


"나쁘지 않았어. 한 번 더 만나볼 것 같긴 한데... 잘 될지는 모르겠어."


"어떤 사람인데? 회사가 어디야?"


지연이의 소개남은 내 전 남친(취준생 때 만나던 남친은 이제 전 남친이 되어 있었다)이 면접 준비할 때 나랑 연결해 준 선배네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물었다.


"이름이 뭐야?"


지연이가 대답한 이름은, 예전에 내 면접을 도와줬던 전 남친의 선배였다. 이름이 특이해서 그 사람밖에 없었다.


"진짜? 나 그 사람 알아!"


지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 사람 OO대학교 나오지 않았어?"


"맞아."


"야, 그 회사에 직원이 천 명은 될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냐."


우리는 신기하다며 술집이 떠나가라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그 매너 좋고 친절했던 사람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고(그래봐야 30분 통화해 본 게 다면서) 지연이는 유심히 들었다. 그러고 얼마 후 그들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

시간이 흘러 우린 어느덧 서른을 넘겼다. 대학 졸업-취업-경제적 안정의 테크를 탄 대부분의 친구들이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나처럼 중간에 커리어가 틀어지거나, 나처럼 성격적으로 하자가 있거나, 나처럼 제대로 된 인연을 못 만난 애들은(모두 해당하는 나라는 사람) 뜸하게 들어오는 소개팅을 하며 기약 없이 다음 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도 동네 친구들과 술집에 앉아 있었다. 지연이는 이번에도 늦었다.


"지연아 여기!"


"어 늦어서 미안. 나 맥주 딱 한 잔만 할게. 여기요, 오백 한 잔 주세요!"


"너 결혼 준비는 잘 돼가?"


"응 거의 끝났어."


예비 신부 지연이는 피부 관리를 받는지 얼굴이 매끈했다.


"지연아, 오늘 내가 쏘기로 했으니까 더 마셔.“


“왜? 뭐 좋은 일 있어?”


"나 지난주에 맥주 빨리 먹기 시합했는데, 여자 부문 1등 했잖아. 주류 교환권 30만 원 받았어. 마셔~~"


'오올~~~‘하고 좋아할 줄 알았던 지연이가 말했다.


"에휴… 류미야. 너 아직도 이러고 사니?"


"왜?"


"휴..."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너도 이제 정신 차려야지. 니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 하고 앉아 있어. 내가 지난주에 어디 갔다 온 줄이나 알아?"


"어디?"


"니 전 남친 결혼식."


지연이는 졸업 전 사귀던 내 남친이자 지연이 남편이 될 사람의 후배를 말하고 있었다.


"아 진짜? 대박. 그 사람 결혼했구나. 이야, 일찍 갈 줄은 알았지만 진짜 빨리 갔네."


"뭐가 일찍이야. 서른이 훌쩍 넘었는데."


"그런가?"


"하객이 진짜 많았어. 신랑 쪽 지인 사진을 세 번이나 바꿔가며 찍었다니까."


뭐, 그럴만했다. 그는 친구도 많고 대외 활동도 많이 했으니까.


"신랑이 직접 축가 불러주는데... 노래를 어쩜 그렇게 잘하니?"


"그치. 그 사람 노래 잘해."


"그리고 신랑 아버지가 축사를 하는데 말씀 너무 잘하시더라. 유머 감각도 있고. 나... 눈물 났잖아."


"왜?"


"왜긴 기집애야. 니 생각 나서지. 우리 류미는 결혼도 못하고 이러고 사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화려하게 결혼하는구나…."


"아... 아니 나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아니… 나 정말로 괜찮다고.


하긴, 그러고 보니 조금 입맛이 쓰긴 했다. 당시 난 연봉을 천만 원 깎고 들어간 중소기업에서 모진 수난을 겪고 있었고, 천년의 사랑인 줄 알았던 남친이 바람피워서 헤어졌고, 소개팅도 끊기는 바람에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 참 괜찮았는데. 그렇게 로맨틱한 남친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

전 남친과 처음 데이트 한 날을 기억한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 나는 탱고(춤) 수업이 있었고, 그냥 아는 오빠였던 그가 심심하다며 연습실로 찾아왔다. 마침 탱고 레슨 후 사람들끼리 밤에 야외 탱고를 추기로 한 날이었다.


“류미 씨 친구분도 같이 가요. 재밌을 거예요."


벚꽃이 만발한 석촌호수. 여러 명이서 탱고를 추는 광경이 신기했나 보다.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구경했다. 아는 오빠는 내가 사람들이랑 탱고 추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줬다.


밤 열한 시쯤 됐을 무렵, 아는 오빠와 나는 여의도 공원으로 이동했다. 그 시간에 거길 가면 집에는 언제 돌아가나. 하지만 우린 아무 생각이 없었다. 벚꽃을 더 더 많이 보고 싶었을 뿐.


우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대화에 흠뻑 빠졌다. 비슷한 취미와 취향을 가진 줄은 알았으나, 유머감각이 그렇게 탁월한 줄은 몰랐었다. 밤이 깊어지고 깊어지다가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그는 참으로 현명했다. 기분에 취해 내게 사귀자고 말하는 실수를 하지 않고, 첫차를 태워 집에 고이 보내준 것이다.


이후 그와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하던 어느 날,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도착하니 그가 공간 가운데에 있는 피아노에 앉아 있었다. 그가 나를 보며 씨익 웃더니,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했다. 본인이 만든 곡으로, 요약하면 '사귀자'는 거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고, 유쾌하게 웃으며 '그러자'고 외쳤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시작됐다.


그는 똑똑한 로맨티스트였다. 적당한 순간에 꽃을 선물하고, 이때쯤 연락해 줬으면 좋겠다 싶을 때 전화를 했다. 내 기분이 좋을 때와 별로일 때를 구분해서 농담을 구사해, 나를 어김없이 웃게 만들었다.


내가 졸업 전 혼자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 그는 내게 mp3파일(네, 원시시대죠)을 담은 폴더를 보내주었다.


"류미 여행 일정에 맞춰 만든 파일이니까, 그 지역에 도착했을 때 하나씩만 들어야 돼."


인천공항에 도착해 mp3플레이어로 ‘공항에서.mp3’ 파일을 틀었을 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띠리리리~ 리리~ 리리~ 리리~’


한국인이라면 익숙할 노래, 바로 <인간극장> 인트로 BGM이었다. 그가 인간극장 성우 목소리로 녹음한 나레이션이 나왔다.


“오늘은 류미 씨가 유럽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어젯밤 늦게야 짐을 다 싼 류미 씨는 잠이 부족해 피곤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부쩍 수척해 보인다. 류미 씨는 자신의 얼굴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내가 각 여행지에서 맞닥뜨릴 상황을 상상해 인간극장 나레이션으로 코믹하게 녹음해 두었다. 트랙 하나하나가 어찌나 위트 있고 재밌던지. 덕분에 여행 중 돌발상황에 불안해질 때마다-밤 열두 시 넘어 홀로 밤길을 걸을 때, 기차를 눈앞에서 놓쳐 하루를 완전히 버렸을 때, 할아버지 스토커가 호스텔까지 따라왔을 때-인간극장 주인공에 빙의해 씩씩하게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게, 지연아. 나 왜 그 사람이랑 헤어졌을까?”


그와 결국 잘 되지 않은 이유는, 상대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내 고질적인 문제인 그 불신. 이건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와는 상관없이 내 본질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는 그 흠 없음이 진정성 결여로 느껴졌다. 사람이라면 으레 성질도 내고 실수도 하고 재미없는 농담도 해야 하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완벽에 가까웠던 그도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내 인생에서 떠나보냈다.


지금 남편은 완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본능적으로 믿음이 간다. 이래서 ‘결혼 인연은 따로 있다’고 하나 싶다.


다시 태어나면 남편이랑 또 결혼해도 될 것 같은데, 남편은 농담으로라도 절대 나랑 결혼 안 한다고 하는 걸 보면… 이 결혼, 내가 이득인 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