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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미 Jun 17. 2024

완벽한 프로포즈를 하는 법

하라는 대로 하면 참 쉬워요

남들 눈엔 내가 결혼에 되게 부정적인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결혼 소식을 알렸을 때 가장 많았던 반응이 “니가??” 였으므로. 그간 결혼에 별 관심 없던 지인들은 내 결혼 발표에 약간 흔들리는 눈치였다.


‘쟤도 결혼하는데 내가 안 한다고?’


하지만 이미지와는 다르게, 난 비혼을 결심한 적이 없다. 괜찮은 사람이 없으면 혼자 살아도 상관없다 정도?


결혼 사실을 안 지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혼인신고만 하는 거 아니에요?”


“아뇨. 결혼식도 해요.”


“헐.. 주례 없는 결혼식이죠?”


“있어요.”


“와.. 신랑신부 동시 입장인가요?”


“아빠 손 잡고 들어가요.”


“헛.. 웨딩드레스도 입어요?”


“네. 그럼 뭘 입겠어요?“


“아니.. 요샌 신부가 바지 정장 입기도 하니까….”


그들 머릿속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진보주의의 최전선을 달리는 것 같아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사실 나는 허영 가득하고 허례허식을 꿈꾸는 사람이다. 내가 돈이 많았다면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꽃 장식 몇천 만 원 들여서 화려하게 치장하고 요란한 결혼식을 올렸을 것이다.


그걸 못했다고 해서 아쉽진 않다. 현실적으로 어렵다 싶은 부분은 포기도 빠른 스타일이므로.


하지만 내가 결혼 비즈니스에서 여전히-애가 세 살이 다 됐는데도-한이 맺혀 있는 부문이 있다. 바로 프로포즈다. 나는 아직 프로포즈를 받지 못했다. 내 기준에서는.



최초의 프로포즈 시도는 바닷가에서였다. 모래사장에서 둘이 싸우고 서로 노려보던 중, 제비꽃이 “나랑 결혼해 그냥.”이라고 말했고, 나는 어처구니없어서 “싫어.”라고 했다.


두 번째 프로포즈 시도는 여행 중에 있었다. 둘이 대판 싸우고 씩씩대다가 (왜 매번 싸울 때 저러지?) 분위기가 약간 풀어진 순간, 그가 티파니 목걸이를 꺼냈다. 나는 감격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다음 주에 있는 내 생일 ‘겸’ 프로포즈 선물이었다. 이 양반아, 생일은 생일이고 결혼은 결혼이지. 선물을 따로 준비해야 할 거 아냐? 당시 나는 확답을 주지 않았고, 정식 프로포즈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세 번째 프로포즈 시도는 결혼 일주일 전에 있었다. 그동안 가하던 은근한 압박을 강한 압박으로 바꾸었는데도 아무것도 안 하길래, 거의 숨통을 쥐고 흔들며 프로포즈를 요구하던 중이었다.


그날 저녁, 장 보러 마트에 갔다가 차로 돌아왔다. 그가 화장실에 지갑을 두고 왔다며 급히 나갔다. 난 핸드폰을 보며 기다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길래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전화를 해보려는 순간, 누가 차창을 두드렸다. 제비꽃이었다. 그의 입이 벙긋거렸다.


‘문 열어봐.’


차 문을 열었다. 눈앞에 꽃다발이 있었다.


“류미야, 결혼하자.”


나는 꽃다발을 보고 자동적으로 활짝 웃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 느꼈다.


“근데 서서 하는 프로포즈가 어딨어? 한쪽 무릎 안 꿇어?"


“아. 오케이.”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류미야, 결혼하자.”


기분이 아주 좋지는 않았지만, 뭐라 하기도 애매했다.


“그리고 이거."


그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목걸이와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고마워. 어 근데 이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박스에 쓰여 있는 로고가 왠지 낯익었다.


- Le Mai -


나는 재빨리 핸드폰으로 네이버 지도앱을 켜서 검색했다. 그럼 그렇지. 마트 앞에 있는 주얼리 샵이었다.


“이거 이 앞에서 샀어?”


“응.”


“방금 이거 사러 간 거였어?”


“응.”


“하아….”


인상을 찌푸리고 눈을 감았다.


“왜 또 그러는데.”


눈을 번쩍 뜨고 말했다.


“왜 또 그러냐니? 프로포즈를 할 거면 미리 준비를 했어야지. 우리 집 앞에서 선물을 즉흥적으로 사오는 게 어딨어. 성의가 없잖아!"


내가 늘 강조했듯, 프로포즈는 준비성과 성의의 문제였다.


내가 생각하는 프로포즈의 정석은, 남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호텔 빌려서 촛불 100개 하트모양으로 켜놓고, 장미 1000송이 침대에 장식해놓고, 벽에는 “나와 결혼해 줄래? 평생 영원히 어쩌고 저쩌고 너만을 죽을 때까지 쏼라쏼라…" 현수막 붙여놓고, 천장에는 파스텔색 헬륨풍선이 가득 붙어 있고, 정장 빼 입고 한쪽 무릎 꿇고 반지 들고 기다리고... 아 그리고 테이블 위에 본인이 결혼에 임하는 자세와 나에 대한 사랑을 장장 3장에 걸쳐 적은 손 편지가 놓여 있는 이벤트였다.


그런데 고작 마트 주차장에서 한쪽 무릎도 안 꿇고 급히 사온 귀걸이랑 목걸이로 나를 겟하겠다고? 안 된다. 나는 이 결혼 못한다.


“이게 무슨 프로포즈야! 나 결혼 안 해!”


“아 좀 그만해~”


“뭘 그만해!!!”


화딱지가 났다.


“내가 샤넬백을 원한 것도 아니고, 다이아 반지를 사 오란 것도 아니고, 누구처럼 명품 웨딩 구두 받고 싶어 한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최소한 미리 준비라도 해놓고 날 깜짝 놀라게 했어야지!”


“깜짝 놀라긴 했잖아.”


“놀라고 감동해서 눈물이 나와야 진짜지!”


“류미 눈에 눈물 고여 있는데?”


“이건 분해서 그런 거고!”


그가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물고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내가 이 결혼 할까말까 얼마나 고민했는데 겨우 이런 프로포즈라고? 서러움이 폭발했다.


“내가…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잖아. 어? 내가 뭐 샤넬백을 사달라고 했어 뭐라고 했어… 흑."


북받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내 가치가 고작 이 정도야? 고작 집 앞 주얼리샵에서 산 목걸이 받고 프로포즈를 승낙해야 하는?


제비꽃은 말없이 운전만 했다.


“내가 그렇게 정성 들인 프로포즈 받고 싶다고 했는데도 어쩜 이럴 수가 있어. 하다 못해 손편지도 없잖아!”


“있어. 꽃다발 속에 잘 찾아봐.“


꽃다발을 샅샅이 뒤졌지만 없었다.


“없잖아!"


그때 조수석 발밑에 작은 정사각형의 종이가 보였다. 떨어졌구나. 몸을 숙여 주웠다.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카드였다. 열어보았다.


‘류미야, 결혼하자.

늘 너를 사랑할게.

약속해.'


하이쿠보다도 짧은 내용 아래에 흐릿하게 로고가 드러나 있었다.


- Le Mai -


“뭐야. 이 카드 주얼리 집에서 받은 거야?”


“응.”


나는 진짜로 폭발했다.


“프로포즈를 한다는 사람이 집에서 편지도 안 써오면 어떡해!! 이건 나를 무시하는 거야! 프로포즈는 정성이 중요하다고 했잖아!"


“내가 하아… 선물 주고 욕먹기는 처음이다.”


“그럼 욕을 안 먹게 준비해야지! 프로포즈에 정성도 없으면서 결혼을 뭘 하겠다는 거야! 내가 언제 샤넬백이라도 사달랬어? 대체 이게 뭐냐고!”


마침내 그가 폭발했다.


“그놈의 샤넬백 샤넬백! 알았어! 내가 샤넬백으로 보여주면 되잖아!"


반격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음? 그거 괜찮은데? 그러고 보니 썩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건 명품백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명품백을 대놓고 바라는 여자가 아니'라는 이상한 자부감으로 무장했지만, 이 상황이 되니 그거면 다 해결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정성을 듬뿍 들인’ 프로포즈는 명품백을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존재하는 플랜B 아니었을까?


정성 들인 손편지+꽃다발+미리 준비한 작은 선물+한쪽 무릎 꿇기 <<<<<<< 무심하게 건네는 명품백


마음속 밸런스 퀴즈의 정답이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프로포즈 선물로 명품백을 원하는 사람들과 똑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솔직하지 않았던 것뿐. 하지만 내 입으로 인정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말없이 가만 있었다. 대답 안 하면 무언의 긍정으로 여겨 샤넬백 가져오겠지?


어느새 눈물은 멈춰 있었다.


제비꽃을 집에 보내고 늦은 밤, 침대에 누워 있는데 기분이 설렜다 불안했다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근데... 진짜 샤넬백 사오면 어쩌지? 어차피 그거 받아봐야 매고 갈 곳도 없는데. 그리고 여름엔 면티, 겨울엔 맨투맨밖에 안 입고 다니는데 옷도 사야 될 거 아냐. 그 옷은 또 무슨 돈으로 사냐고. 에휴... 그리고 사온다고 해도 분명히 카드 긁을 거 아냐. 그럼 12개월이든 24개월이든 할부는 어차피 같이 갚아야 하잖아. 그게 맞는 소비일까?'


하지만 기분상 받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쓸데가 없어도, 나에 대한 마음의 크기를 증명하는 상징물인 것만 같은 느낌이었으므로. 평생 거들떠도 안 보던 명품백이 왜 이렇게 간절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럴 거면 재산을 술값에 탕진하지 말고 조금씩 모아서 가방이나 몇 개 살걸.


온갖 생각으로 복잡해진 머릿속, 잠들기 직전 이 생각이 스쳤다.


‘역시 결혼은 미친 짓이야...’



다음날, 집에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나야.”


제비꽃이었다. 진짜 샤넬백 사왔나?


두근대는 맘으로 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이 아니라 손부터 보였다. 손에는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가방이 작아도 저기 안 들어갈 거 같은데.


"나 들어가도 돼?"


"어.. 어어. 들어와."


그가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자, 받아.”


그가 건넨 쇼핑백에는 Golden Dew라고 쓰여 있었다. 목걸이랑 귀걸이구나. 그럼 그렇지, 기대한 내가 잘못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샤넬백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랑 결혼하는 남자가 능력도 안 되는 소비를 해버리는 기분파 하루살이가 아닌, 그런 고초를 겪고도 꿋꿋이 행동하는 이성주의자라서.


쇼핑백 안에는 어제 코딱지만 한 카드보다는 큰 카드가 들어 있었다.


‘류미야, 약 1년 동안 만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치. 지금까지 잘 이겨내온 만큼 앞으로도 우리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 덕분에 참 행복해. 항상 감사하다. 지금은 샤넬백으로 보여주지 못하지만 나중에 꼭 보여줄게. 사랑해.’


또 한쪽 무릎도 꿇지 않고, 꽃다발도 새로 사오지 않았고, 편지도 3장이 아닌 카드 하나고, 촛불도 켜지 않았고, 현수막도 없고 등등... 결격 사유가 많았으나, 이렇게까지 내가 원하는 프로포즈를 완강히 거부하는 것도 나름 생각이 있어서겠지 싶어 눈 딱 감고 양보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잠시 양보했을 뿐, 나중에 샤넬백으로 보여주겠다는 굳은 약속은 한번도 잊은 적 없다.

빨리 가져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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