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미 May 20. 2024

상무님과 나의 달콤한 인생

혹시 제가 모멸감을 드렸나요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장미순 상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회의실에 모인 팀원들 앞에서 그녀는 자신을 소개했다. 미순이. 순하고 정 많을 것 같은 이름과 달리, 그녀의 첫인상은 몹시 매서웠다. 나이는 50대 중반, 155cm 정도 키에 깡마른 체형, 새치가 반쯤 섞인 숱 많고 뻣뻣한 단발머리, 얇은 금테 안경, 튀어나온 광대뼈가 더 강한 인상을 만들었다. 과연 저 얼굴이 웃으면 어떤 표정이 될까.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미순이, 아니 장 상무는 중소기업에서 보기 드문 인재였다. 국내 상위권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독일에서 10년 넘게 공부하다가, 한국에 들어와 임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런 대단하신 분이 왜 이런 코딱지만 한 중소기업으로 이직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업계 유명 인사들과 알고 지냈고, 무엇보다 각 회사 사장들의 뒷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직원이었던 내연녀가 아들을 낳자 자회사 하나를 떼어준 사장, 열받으면 벽에 걸어둔 일본도를 꺼내 휘두르는 사장, 자신들이 환생한 예수와 열두 사도라고 믿고 정기 모임을 갖는 사장과 임원단까지…. 업계에서 나름 큰 회사들인데, 한 꺼풀 벗겨보니 가관이었다.


평소 자극적인 얘기에 사족을 못 쓰는 나는 장 상무의 얘기에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전래동화 듣는 어린애처럼 "그래서요? 그다음은 어떻게 됐어요?" 하면서 눈을 빛내며 들었다.


그런데, 장 상무는 자신의 열렬한 팬인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나를 괴롭혔다.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근히. 예쁨 받고 싶던 나는 틈만 나면 그녀에게 아부를 떨었지만, 반응은 늘 차가웠다. 호칭도 다른 직원과 달랐다. 나는 성까지 다 붙여서 '류미 대리'라고 불렀으면서, 내 옆자리 남자 대리 조우람 씨는 "우람~~"이라고 불렀다.


"우람~~ 일 잘 돼?"

"우람~~ 뭐 재밌는 얘기 없어?"

"우람~~ 나 배고파. 피자 시켜됴."


왜 나는 '류미 대리'이고 그는 '우람~~'인가. 게다가 아들뻘 직원한테 혀 짧은 소리는 뭔데. 그녀는 내가 조우람 대리랑 친하게 지내는 게 못마땅했던 것 같다. 그와 얘기하다가 등골이 서늘해서 고개를 들어보면, 그녀가 나를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때로는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어 조우람 대리가 본인이랑만 잡담하게 만들거나, 내게 심부름을 시켜 내보내기도 했다.


혹시… 질투하나? 이 생각이 들었지만, 고등학생 아들도 있는데 설마 싶어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나는 점점 조우람 대리와 말을 섞지 않게 되었다.


장 상무는 내 사소한 일상 행동을 자주 지적했다. 한 번은 그녀가 곁에 오더니 내 책상 위 유선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더니 수화기를 들어 꼬인 전화기 줄을 반대쪽으로 돌려 풀었다.


"아, 상무님 제가 할게요. 그냥 두세요."


그러나 장 상무는 아랑곳 않고 끝까지 선을 풀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류미 대리, 성격 꼬였어? 왜 꼬인 줄을 안 풀어?"


"이거 아침마다 푸는데요, 반나절도 안 돼서 다시 꼬여요. 그냥 냅두려구요."


그녀가 들은 체도 안 하고 팀장 쪽으로 몸을 돌려 큰 소리로 말했다.


"하여튼 어이구… 이 팀장도 알지? 회사마다 꼬인 애들이 있어. 고집도 그런 똥고집이 없다니까. 지난 회사에도 그런 애 있었는데, 걔도 류 씨였어."


컴퓨터 자판을 치고 있던 손가락을 멈췄다. 지금 싸우잔 건가? 류 씨가 어때서 진짜.


한 번은 외부에서 점심 먹고 들어왔는데, 장 상무가 나를 슬쩍 보더니 탕비실에 들어가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여직원들~ 오늘 저녁에 삼겹살 먹자. 내가 쏠게. 근데 인원이 많으면 좀 그러니까 딱 여기 있는 사람만 가자. 알겠지?"


안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회사 여직원 중 나만 그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 유치했지만, 그리고 그 자리에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지만, 매우 기분이 상했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쌓여가던 어느 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웬일로 상냥하게 나를 불렀다.


"류미 대리~ 오늘 저녁에 해외 바이어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와인 마시자. 커리어에 도움 될 거야."


오 이제 시집살이 끝난 건가? 참으면 복이 온다더니 그날이 왔나? 나는 저녁 선약을 취소하고 장 상무를 따라나섰다. 가는 길에 물었다.


"상무님, 그런데 어디 바이어예요?"


"영국 사람인데, 독일에서 오래 일했어."


오호. 외국인과 와인을 곁들인 저녁이니, 선약을 취소한 만큼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바이어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는 영어로 인사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장 상무가 독일어를 쏼라쏼라 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비위를 맞췄다.


"어머 상무님~ 어쩜 이렇게 독일어를 잘하세요? 완전 원어민 같아요."


장 상무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아, 웃으면 저런 표정이 되는구나.


이후 이들은 4시간 동안 독일어로만 얘기했다. 독일어를 모르는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뭔 말인지도 모르는데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고, 이들이 웃으면 나도 따라 웃었다. 나를 의식한 바이어가 중간중간 영어로 언어변환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장 상무가 독일어로 대답하면서 원천 차단했다. 밤 11시 넘어 자리가 파했을 때, 나는 정신이 혼미해져서 쓰러질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며 깨달았다. 이러려고 데려온 거구나. 본인의 어학실력을 자랑하고 싶었구나. 예뻐하는 조우람 대리 말고 날 데려올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외에도 많았다. 워크숍 가는 날 잠시 자리 비운 틈을 타 자기들끼리 차 타고 먼저 출발하기, 업무 실수를 부풀려 사장 앞에서 호되게 질책하기, 회의 시간에 나만 빼고 의견 물어보기, 내가 발언하면 못 들은 척하기, 내 실적을 교묘하게 본인 실적으로 꾸미기….


50대 중반 아줌마가 30대 초반에게, 그것도 직급도 하늘땅 차이인 직원한테 저렇게 유치하게 구나? 다른 직원들은 몰랐다. 이런 일을 내 입에 올리는 것조차 창피해서 말 안 했기 때문이다.


참을성이 없는 나는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천성이 남한테 미움받는 걸 못 견디는 내가 그만큼 버틴 것도 용했다. 내가 이 회사 아니면 갈 데 없나.


하지만 이후 오랫동안 재취업을 못 하면서, 점점 장 상무에 대한 증오가 커져갔다. 나는 틈만 나면 그녀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했다. 길에서 만나면 꿀밤 때려주기, 한밤중에 전화해서 무서운 노래 들려주기, 나중에 크게 성공해서 만나 반말로 인사하기... 그러다 그녀의 고등학생 아들을 꼬셔서 애인으로 만들고, 집에 인사를 가 졸도하는 그녀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상상에까지 다다랐다. 이쯤 되자 아 내가 미쳐가는구나 싶어서 정신건강을 위해 그냥 다 잊어버리기로 했다.  


-

6개월 후, 회사 사람들과 만나 저녁을 먹었다.


"장미순 상무 잘 지내요?"


"아, 장 상무 잘렸어요. 두 달 전에."


나랑 동갑내기 황 대리가 말했다.


"진짜요? 어쩌다가요?"


"사장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아요."


나한테 그렇게 갑질해도 사장 앞에서는 납작 엎드려 설설 기더니, 뭔 일이래?


"그때만 생각하면 휴... 선희 주임이 고생 많았죠."


"왜요?"


고개를 돌려 선희 주임을 쳐다봤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황 대리가 말을 이었다.


"그날 장 상무가 사장실에 한참 있다 내려왔는데, 씩씩대면서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장난이 아니에요. 잘린 거죠. 회의실로 들어가면서 '우람, 술 사 와' 이러더라구요."


"술을요?"


슬쩍 보니 조우람 대리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네. 우람 대리가 난감해가지고... 근데 회사에 어떻게 술을 사와요. 그때 팀장님도 자리에 없었거든요. 우리끼리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장 상무가 나가더니 소주 2병이랑 맛동산을 직접 사오더라구요. 회의실에 앉아서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먹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우는 거예요."


50살 넘은 아줌마가 회의실에서 꺼이꺼이 우는 장면을 떠올리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래서요? 안에 들어가서 달래줬어요?"


"아뇨. 다 밖에 있었죠."


"진짜요? 혼자 소주 까면서 큰 소리로 우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했어요?"


"네. 들어가서 뭘 해요. 그냥 모른 척하고 일했지."


큰 소리로 우는 건 누구라도 와서 달래주고 얘기 들어달라는 신호였을텐데... 삼겹살도 사주고(여직원들) 애교도 떨어준(조우람 대리) 사람들이 모두 모른 체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으이구. 나한테 잘해줬어 봐라. 그런 일 생기면 내가 들어가서 술친구도 해주고 같이 울어주고 했을텐데...(난 ENFP니까)


"한참 있다가 팀장님이 사무실에 들어와서 장 상무 데리고 호프집으로 갔어요. 나랑 선희 주임도 데리고."


대낮에 호프집에서 그녀는 억울함을 토로하며 맥주를 연거푸 마셨다고 한다.


"술을 한참 퍼먹다가 화장실 간다고 갔는데, 안 오는 거예요. 이상해서 가보니까... 세면대에 토해놓고 바닥에 눈 감고 앉아 있더라구요. 근데… 그거 알아요? 토할 때는 변기에 해야지 세면대에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더러움 주의. 비위 약한 독자님은 스크롤을 내려 다다음 문단으로 가세요)


"왜냐하면 세면대는 물을 틀어봐야 건더기가 씻겨 내려가지 않아요. 선희 주임이 맨손으로 건더기를 모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벽에 튄 토사물도 닦았어요."


"저 그러고 일주일 동안 밥 못 먹었잖아요."


지금 생각해도 구역질 난다는 듯 선희 주임이 말했다.


"나랑 팀장님이 장 상무 택시 태워서 집에 데려다줬어요. 그러고는 끝이에요. 다음 날부터 회사 안 나와서 짐도 우리가 집으로 보내줬어요."


초라한 결말이었다. 고작 이렇게 끝날 거면서 그렇게 요란하게 휘젓고 다니면서 나 괴롭힌 거냐.


"아, 그리고 그거 알아요? 독일은 남편 따라 간 거래요. 본인은 거기서 어학원만 10년 다녔고. 그러니까, 학벌 위조를 한 거죠."


으이구 못난 사람. 능력에 자신 없으니 더 큰소리쳤구나. 빈 수레가 요란한 것처럼, 소리라도 요란해야 불안감을 숨길 수 있으니까.


이 일로 얻은 교훈이 뭘까?


인과응보(X)

뿌린 대로 거둔다(X)

사람 보는 눈을 키우자(X)

속이 안 좋으면 변기통으로 가자. 세면대가 아니라(O)


항상 중요한 건, 깔끔한 뒤처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