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심의위원회, 일명 '학폭위') 절차 중 ‘기피신청’이라는 것이 있다.
심의위원회에 참석한 학생과 보호자가 심의위원 가운데 공정한 심의를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위원이 있는지 살펴보고 심의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때 ‘기피신청’, ‘공정한 심의’와 같은 단어는 법률 용어여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심의위원 중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는 식으로 부연설명을 하곤 한다.
오늘 심의위원회에 온 중학교 3학년 A. 그런데 처음이 아니다. 작년 이맘때 같은 반 친구와 싸운 일로 교내봉사 조치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학교 밖에서 다른 학교 학생과 시비가 붙어 다툰 일로 또다시 학교폭력 가해학생이 되어 온 것이다.
두 번째 참석한 A는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첫 번째 왔을 때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돌아갔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온 것이다. 함께 온 어머니 또한 조금은 화난 표정으로 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인적사항 확인이 끝나고 시작된 기피신청 절차. 위원장님은 ‘위원 중에서 공정한 심의를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위원이 있으면 기피신청을 해 달라’고 요청한 뒤, 이해를 돕기 위해 ‘혹시 저희 중에 아는 얼굴 있으신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풀 죽어 있던 A가 고개를 들어 심의실 안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큰 발견이라도 한 듯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저, 이 분 알아요! 지난번에도 봤어요!"
그리고는 자신 있게 손을 들어 심의실 안의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런데 맙소사, 가리킨 것은 심의위원이 아니다.
잠시 당황하여 말이 없던 위원장님이 상황을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그분은 위원님이 아니고 회의 준비하시는 간사님이에요."
기억력이 좋은 A가 1년 전 심의위원회 때도 안내를 맡았던 간사님을 알아보고는'아는 얼굴이 있다'며 지목한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종종 ‘변호사 처음 봐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럴 때마다 ‘그럼 다행입니다’라고 답한다. 변호사를 만나야 할 만큼 법적으로 어려운 일을 겪거나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심의위원회에 아는 얼굴이 생겨버린 A. 이제는 또다시 심의실에 오는 일도, 아는 얼굴을 마주하는 일도 없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