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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지 Mar 18. 2020

주부라고 말하기 싫었던 날

아이 학원에 상담을 갔다. 상담 실장은 10분만 주어지면 그 누구와도 말을 놓을 듯 화통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검색했더니 나오더라고요.”

“저희 학원에는 이번에 oo고 합격한 형도 있고요, 지금 교실로 들어가는 저 아이는 벌써 『이기적 유전자』를 읽는답니다.”

학원 재원생들을 자랑한 다음에는 나의 신상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머님은 무슨 일 하셔요? 의료계? 아, 느낌이 교육계에 계실 것 같아요.”

교육계라니, 선생님 같아 보인다는 말은 자주 들었다. “주부예요.”라고 말하려다 “남편 일 돕고 있어요.”라고 했다. 그날따라 무슨 일 하시냐는 질문이 싫었다.


내 직업은 무엇일까? 주부도 직업인가? 결혼할 당시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주부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상사는 두 아이의 엄마였는데 시어머니가 아이를 맡아 키워 주셨다. 내 시댁과 친정 양가에는 육아를 도와줄 이가 없었다. 그러니 나는 아이가 생기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회사원에서 주부로 이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슨 대단한 직장이라고. 전문직도 아닌데, 당연히 그만둬야지.”, “네가 벌어 봤자 얼마나 번다고. 집에서 살림하는 게 돈 버는 거야.” 15년 전만 해도 그런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던 때였다.


첫 아이가 두 살쯤 되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부는 직업이 아니었다. 주부는 월급을 받지 않는 데다가 소속감도 명함도 업무의 전문성도 없었다. 주부로 전업했는데 주부의 다른 이름은 무직이었다. 다시는 월급 받는 곳에서 일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소위 전문직 여성이었다면 잠시 일을 쉬었다가도 직장에 복귀할 수 있었겠지만, 전문직이 아니기에 나는 더더욱 직장을 그만두면 안 되었다. 몰랐다.


“집에서 살림하는 게 돈 버는 거야.”라는 친정 엄마의 말씀이 사실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지금 가사도우미 앱에 올라오는 시급이 만 원 정도니까, 지난 15년 동안 가사도우미의 시급은 두 배 정도로 오른 듯하다. 시급으로 따져 보면 가사노동을 돈으로 환산해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 돈을 내게 지불할 이는 남편인가? 그에게 의식주를 의지하는 내가 월급까지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인데, 나는 무슨 돈을 벌고 있는 것인가? 부부라는 경제공동체에서 나는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을 뿐.


베티 프리던의 『여성성의 신화』에는 ‘유스 세럼 youth serum’이 등장한다. 생물학자들이 발견한 이 혈청을 애벌레 상태의 유충에 투여하면 성충으로 성장할 수 없어서 내내 유충으로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부모님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는 한 부모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없었던 것처럼,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을 꾸리는 한 남편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유스 세럼을 맞고 성충이 되지 못하는 유충처럼,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의지하는 나는 여전히 내가 완성되지 못한 존재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은 돈 잘 버는 주부들을 부러워했다. 주부라고 다 같은 무직자가 아니었다. 애 키우고 살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자립한 주부들도 많았다. 서점 베스트셀러에 재테크로 성공한 주부들의 책이 올라오는데 “마트 대신 부동산에” 가서 “부동산으로 아이 학비”를 벌었다는 내용이었다. 가까운 곳에서도 무용담이 들려왔다. 신혼집 전세금을 불려 십 년 만에 아들 줄 집까지 마련했다는 동네 지인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가 웬만큼 자란 후 전공을 살려 레슨을 하거나 공부방을 차려 수입을 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살림의 귀재인 금손 주부들에게도 눈이 갔다. 모델하우스 뺨치도록 예쁜 집을 꾸미고 사는 이들이 보였다. 새 것 같은 가구 위 생화가 놓여 있고, 벽에는 아트페어에서 구입한 유명 작가 작품은 아니더라도 분위기 어울리는 그림이 걸려 있는 집. 맛집 메뉴를 곧잘 따라 만드는 음식 솜씨 좋은 주부들도 있었다. 제철 해산물을 주문해 챙겨 먹고 과일청과 장아찌를 넉넉히 담가 주변에 나눠주는, 이웃을 초대하여 샐러드와 팬케이크를 넓은 그릇에 폼나게 내놓는 이들.


부업을 하여 가정 경제에 보탬을 주었더라면, 혹은 살림 솜씨가 좋아 식구들에게 매끼 맛있는 것을 해 먹였더라면 “저는 주부예요.”라고 당당히 말했을까? 주부의 자질과 미덕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주부는 엇비슷하게 살아가는 걸까? 식비와 의류비와 학원비 사이 균형을 고민하거나, 대출금을 갚고 집을 넓히고자 계획을 세우거나, 부모에게 도움을 받거나 부모를 봉양할까? 누군가는 자식 교육과 종교 활동에 힘쓰고, 다른 누군가는 자기 계발과 취미 생활에 더 몰두할까? 집집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주부들에게 묻고 싶다. 주부는 직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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