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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일 없이 달리기 Oct 23. 2023

내 몸과 멀어져 볼까요?

내 몸도 파업에 들어간 걸까..?

*[별일 없이 달리기 magazine]

평안한 달리기를 추구하며 ‘달리기와 일상’에 대한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돈을 많이 벌 수 있거나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간판의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부럽다는 생각을 주로 했다. 나의 시간과 열정 또한 자연스럽게 내가 추구하는 쪽에 쓰였다. 하지만 요즘엔 그런 것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구나 싶다. 엄청난 초일류기업에 가는 것이 아니고서야 벌이야 다 비슷비슷하고 회사 간판이 날 먹여 살려주지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일까?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보다는 그저 스스로를 잘 가꾸는 사람이 부럽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꼭 비싼 옷이 아니더라도 주어진 예산 내에서 말끔히 꾸며 입고, 몸매를 관리하는 그런 삶이 멋져 보인다. 스스로의 가치를 올리고 브랜딩 하는 것처럼 보인달라까나? 


 요즘은 결혼을 하고 그 뒤에 아이를 낳고서도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점점 늘어가는 것 같다. 물론 SNS가 활성화되면서 그런 콘텐츠에 더 자주 노출되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신을 관리해 나가는 삶을 추구하는 게 비교적 올바르기도 하고 나를 대접하는 일이라는 것에는 대부분이 동의할 점이기도 하니 그것을 추구하는 게 나쁘다는 생각은 없다. 다만 가정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데 멋지게 늙는 것까지 해야 한다니...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좋은 사람 되기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나는 자기 관리(여담으로 나는 자기 관리를 자기 통제, 혹은 자기 대접이라고 생각한다) 측면에서 확실히 젬병이다. 오히려 가끔은 내 몸에 미안할 때조차 있다. 아니 사실은 매일 미안해야 할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나의 몸을 그다지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기 때문이다. 매일 저녁이면 튀긴 음식을 메인음식으로 올린다. 한때는 기름을 냄비에 부어놓고 튀김기처럼 썼던 때도 있었다. 사실 튀긴 음식이 맛이 좋은가? 사실 혀의 감각을 되짚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그냥 크리스피 한 튀김을 먹는다는 것이 상당히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맛이라 즐길 뿐이지 몇 입 베어 물면 혀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크게 반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때부터 나는 맛을 느끼지 않고 단순히 포만감을 느끼기 위해 입에 음식물을 쑤셔 넣는 기계로 전락한다. 단순쾌락에 굴복하여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자기 통제가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당연하게도 매년 실시하는 건강검진에는 몇몇 수치가 썩 좋지 못하게 나오는 편이다. 그렇다고 크게 낙담하는가? 그렇지도 않다. 그저 내 몸이 버틸만하니까 그러려니 한다. 회사에서 묵묵히 참고 일하는 놈 일하나 더 주는 그런 느낌으로 내 몸을 무심히 다룬다.


 대체로 자극적이게 맛있다고 여겨지는 음식들은 왜 더 저렴하기까지 할까? 나는 처음 독립해 살면서 치킨이나 피자보다, 싱싱한 채소가 더 비싸다는 게 납득하기 어렵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은 '질 좋은 음식'이 더 비싸다는 것쯤은 안다. 치킨 3만 원 시대에 살며 치킨은 더 이상 가성비 외식음식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치킨샐러드 앞에선 치킨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저렴한 메뉴 중에서도 같은 음식이라면 그램당 단가가 싼 브랜드를 주로 시켜 먹는다. 같은 메뉴면 맛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고 혀도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그만큼 나는 미각에 집중하는 습관이 덜되어있다). 그래서 식재료에 있어서는 가성비를 무척이나 따지는 편이다. 심지어 요즘은 내가 뭘 먹고 싶은지 생각하기보다 가격표를 먼저 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나는 가장 싸고 저급한 음식으로 나를 대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의 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노예대접도 이런 노예대접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간혹 든다(미안!). 노예대접을 수년간 유지하다 보니 좋지 않은 컨디션일 때가 많다. 뭐 이유는 다들 예상하다시피 과체중 때문이거나 좋지 못한 음식으로 인한 몸의 염증반응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킬레스건염과 족저근막염으로 고생한 지가 꽤 됐는데, 이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발뒤꿈치나 발바닥이 찌릿한 느낌이 든다. 크게 아픈 정도는 아니지만 아침에 몸이 풀리지 않은 채로 발을 디디면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느껴진다. 그래서 매일 아침의 처음 몇 발자국은 조심스럽게 걸어야만 한다. 크게 불편한 점은 아직 없다만 가끔은 일상생활에서 조차도 찌릿한 느낌이 오거나 종아리에 쥐가 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아킬레스건염을 처음 앓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년여 전이다. 그때는 달리기에 나름 물이 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몸이 가볍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다(특히 초가을에 그리 느낀다).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 마음이 들떠 부상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다. 매 훈련마다 점차 속도를 올려 달리기 시작했고, 훈련의 마무리는 전력질주로 남은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식의 트레이닝을 했다. 그러면서 몸이 회복할 시간을 빼앗았다. 사실 종아리가 저리거나 발바닥이 아픈 것이 하루이틀은 아니었는데 훈련을 하면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병을 키웠다.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친 탓일까. 건염은 이제 만성에 접어들기까지 했다. 1년이 지났는데 도통 언제 완쾌될지 알 수가 없다. 마치 군대에 입대하고 전역일을 알려주지 않는 답답한 느낌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글을 쓰는 시점으로부터 다음 주는 23년 경주국제마라톤이 있는 날이다(Half코스에 참가예정). 대회를 눈앞에 두고 컨디션을 체크할 요량으로 조깅을 하러 나갔다. 그런데 아뿔싸, 정강이가 아파서 발을 제대로 디딜 수가 없는 게 아닌가. 결국 결국 달리기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훈련의 피로가 누적된 것이다. 아침에 몸을 평소보다 덜 풀기도 하였고 짧은 거리를 달릴 생각에 처음부터 페이스를 올렸던 것도 문제였으리라(세상에.. 나는 도대체 얼마나 거만하게 몸을 대했는가...) 내 실력으로 하프마라톤을 뛰려면 거의 3시간을 달려야 한다. 일정이 코앞인데 10분도 달리지 못할 컨디션이라니.. 영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증, 그리고 혹시라도 대회를 *DNF 했을 때의 부끄러움과 좌절감 등 복잡한 감정들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버티는 건 오로지 내 몫이어야 한다. 누굴 탓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내 몸과 타협하지 않고 업무강도를 올렸고, 밥값도 제대로 주지 않고 수년을 보냈다. 내 몸은 악덕 고용주인 나를 대상으로 파업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정도 파업이면 감사할 정도다. 달리기를 하기 전에도 몸을 충분히 풀어주고, "이제부터 뛰기 시작할 거니까 준비를 하자~"라고 살살 타일렀어야만 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지시하기 바빴다. 


 큰 대회를 앞두고는 일부 주자는 테이퍼링이라는 걸 한다. 대회일정을 1~2주 정도 앞두고 훈련을 중단하거나 저강도훈련만 실시하는 것을 뜻한다. 테이퍼링의 주된 목적은 에너지 비축과 몸의 회복이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경주마라톤에 대비해 10km 정도를 천천히 달리러 한강을 나섰다. 그런데 가을아침 날씨도 좋고 체력도 남아 대교를 2개나 더 지나서 몸을 돌렸다. 결론적으로 예상보다 한 시간 정도는 더 달리게 되었다. 당일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지금생각해 보면 그때 과도한 훈련이 정강이 통증으로 연결된 것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달리기 전에 내 몸의 의견을 세심히 들어봤어야 했다. 아니면 달리고 나서 큰 대접이라도 해줬어야 했는데 그날 저녁 간단하게나마 술 한잔을 했던 거로 기억한다. 평소에는 먹지도 않는 술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고된 하루를 보낸 나에게 술을 독처럼 대접한 것인가. 약간은 자책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나를 노예처럼 막 대하는 나, 반대로 타인을 대할 때는 어땠는가? 오히려 가성비를 따지지 않고 대접하려 했다. 회사에서는 동료들에게 밥이나 커피를 살 때가 (누구나) 종종 있다. 이때 쓰는 돈은 전혀 아깝지가 않다. 그래서 항상 커피를 살 때는 "비싼 거 먹어도 되니까 먹고 싶은 걸로 시켜"라고 꼭 강조한다. 애매하게 아껴서 될 문제도 아니고 몇천 원 아껴서 부자 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차라리 제대로 쓰고 선심을 쓰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다.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 그렇지 생각하지 않나? 흠.. 어쨌거나, 지금까지는 이런 나를 지극히 상식적으로 바라보았으나 최근에는 묘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행동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보통 내 것보다는 남의 것을 험하게 쓰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혹은 나도 모르게) 내차보다 렌터카를 더 험하게 운전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 때문에 중고차를 구매할 때 렌트이력이 있는 차량의 구매를 꺼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 나는 어쩌다가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인 나의 신체를 이렇게 험악하게 쓰는 것일까. 차량처럼 처분하거나 부품을 교체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이에 대한 해답을 '내가 나와 너무 가까워서', '나를 너무 편하게 생각해서'라고 답을 내렸다. 우리는 항시 곁에 존재하는 것을 한없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내 몸을 너무 편하고 가볍게 생각하는구나 생각했다. 나(我)를 제외한 가장 가장 가깝게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개의 경우에는 가족이었다. 독립을 하기 전에 부모님과 같이 살 때에는 마찰이 많았다. 우리 집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가세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 때문인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매우 예민한 상태였고, 일상적인 대화도 단절되었었다. 때로는 혀에 칼을 두르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이처럼 서로를 밀쳐낼 정도였다. 내가 반강제적으로 독립을 하고 나서 1~2년간은 연락도 없이 서로 서먹하게 지낼 정도였으니 일반 가정보다는 조금 더 서먹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겠다.


 몸이 멀어졌으니 마음도 더 멀어졌을까? 이 판단은 독자에게 맞기는 편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나의 경우 몸이 멀어지니 서로 신경 쓸게 덜해졌다. 예전에는 집에 작은 문제가 생겨도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스트레스를 받기 일쑤였다. 각자가 책임감을 가지고 의견을 내지만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그런 대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어지간한 문제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관찰한다. 최소한의 도움만 주고 적당한 거리를 두니 서로 싸울 일이 많이 줄었고 작은 도움에도 서로에게 감사할 일이 늘었다는 게 흥미로운 점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서로에게 '예의'라는 것을 차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 지붕 안에 살면 서로 간 격식과 예의를 점점 잊고 살기 마련이다. 집에서 방귀를 뀌던 코딱지를 파던 하루 이틀 씻지 않던 서로가 상관할바가 아니다. 나의 경우에는 다 큰 성인이 집에서 홀라당 벗고 팬티차림으로 집을 활보하고 다녔던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매우 부끄러워진다(하지만 그때는 그게 부끄러운 줄 몰랐다.) 집에서 나와 4년 정도 살다 보니 본가에 가면 며칠 머무르더라도 차림새를 바꾸지 않는다. 별도의 옷을 챙겨가거나 부득이 옷을 챙기지 못했다면 양말정도만 벗고 생활하는 정도다. 약간은 남이 된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단순히 서로가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는 느낌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가족과 관계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집을 나와서 살게 되었으나(심지어 가족과 약간은 멀어질 결심까지 했으나), 결국 서로의 몸과 마음이 멀어지며 서로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서로 간 결핍에 대한 이해를 통해 심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고 할 수 있겠다. 


 아마 나는 나의 몸을 너무 내 것처럼 생각해서 내 몸의 결핍상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당한 대우를 못해주는 것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 나는 살면서 '나에게 대접'한다라는 표현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나인데 나에게 대접을 한다니? 고생한 나에게 보상을 해준다니? 내가 그냥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나를 나임과 동시에 타자화하는 문체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말들이 조금은 이해 가기 시작됐다.


 우선 나는 튀김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사실 먹을 때 혀의 감각이나 포만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먹는 경우가 대다수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내 몸의 감각을 최대한 살려 맛을 느껴보려는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니 전체적인 식사만족도가 올라갔다. 굳이 많이 먹지 않아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대로 맛있다고 착각했던 몇몇 싸구려 음식들이 먹기 거북해졌다는 것이다. 불과 지난달까지만 해도 최고의 가성비 메뉴 중 하나였던 것들이 단순히 느끼하고, 입에서 느글느글한 식감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장을 볼 때도 조금 더 건강한 메뉴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을 준다고 생각하고 꽤 있어 보이고 질 좋은 음식을 사려고 노력한다. 오늘 같은 날이 그러하다. 평소 같았으면 냉동코너에 가서 가격이 가장 싼 돈가스나, 치킨너겟을 골라왔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삼겹살이 좀 먹고 싶었다. 이마저도 평소에는 냉동삼겹살로 삼겹살을 먹는 시늉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몸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를 대접한다면 냉동삼겹살을 내놓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큰마음먹고 냉장삼겹살을 샀다. 평소 같았으면 냉동삼겹살을 다 구워서 질릴 때까지 입에 쑤셔 넣었겠지만, 질 좋은 고기로는 두줄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오늘 저녁은 많이 먹지 않아도 한입 한입이 매우 즐거운 저녁이었다. 게다가 질 좋은 음식을 샀음에도 결국 전보다 덜먹게 되니 들어가는 식비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내 몸을 조금 남 보듯이 대하려는 노력을 하는 중이다. 내가 고용주면 내 몸은 피고용주이다. 요즘은 평생직장이 없지 않은가? 다들 능력에 맞게 직장을 갈아타는 시대다. 내로라하는 기업들도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서 수많은 복지를 도입하고 높은 급여로 대우하려고 한다. 나도 내 몸을 조금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경각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질 좋은 음식으로 대우해주지 않고,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며 악덕고용주 행세를 한다면,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를 떠나지 않은 내 몸에 감사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DNF : Did Not Finish, 경기를 끝마치지 못함 

*LSD : Long Slow Distance, 천천히 장거리를 달리는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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