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거기는 좋냐
인스타에서 염탐만 하는 사이인 친구의 피드에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이 올라왔다. 나는 그 친구 부모님이 돌아가신 줄 알았으나 몇 초 뒤 커다란 충격을 먹었다. 다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피드였다.
대학 동기인데, 졸업 후 통 만날 수 없었던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뇌종양에 걸려 수술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나는 제주에서 미친 듯이 일하고 있던 터라,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마음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을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만 늘어놓은 채, 제주 일정 마무리 후 병원에 가겠다고 하고 끊었다. 공감되지 않았을 말에도 위로가 되었다며 오히려 고생하라는 말까지 전해 주었다. 의사 말로는 종양의 위치가 좋지 않아서 실명의 위험이 있다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모두의 바람대로 수술은 무사히 잘 끝났다. 실명도 없었다. 기쁜 소식을 듣고도 나는 친구의 병원을 찾아가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얼마나 아쉬웠을까.
1년 좀 지났을 때였나, 친한 친구들 5명과 인천에서 번개 모임이 있어 마침, 요양 중이던 그 친구를 잠깐 불러내었다. 환한 미소로 걸어오던 친구는 살은 좀 빠졌지만, 그때 그 모습과 똑같았다. 아마 이 시대의 목사님 상이 있다면 이 친구가 제격일 정도로 생긴 것이나 마음이나 신앙심이나 모두 훌륭한 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오랜만에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인사만 수 십 분이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들으면서 대단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그날 친구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전화를 몇 번 주고받았는데, 추적 검사결과도 계속 좋았다고 했다. 그러던 그날,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연차를 내고 부랴부랴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친구들과 합류해 꽃 한 송이 놔주고 원망스러운 기도를 드리고 나왔다. 다 괜찮다고 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따뜻한 봄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꽃들을 피워내던 봄의 시작에서 나름 친했던 친구의 부고를 듣자, 더 자주 하지 못한 연락과 병문안 가겠다고 했던 약속들이 모조리 생각이 났다.
사람이 이렇게 못났다. 뒤돌아 후회해 봤자, 친구는 돌아오지 않는다. 귀찮아서 대충 마무리 지어 끊은 대화들이 생각났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교만함이 생각났다. 그 친구를 은근히 무시하고 놀리고 괴롭혔던 놈들의 면상을 장례식장에서 보니 때려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친구는 이제 없다. 그러니 나의 모든 행동에는 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됐다.
벚꽃이 만발하여, 여기저기 사람들이 봄기운을 받으러 쏘다닐 때, 친구는 가버렸다. 우리가 믿는 종교에서는 아픔도 없이 잘 지내고 있을 테지만, 언제나 그렇듯 죽음은 남겨진 자들에게 참으로 안타까움만 만들어 낸다. 인생에서 엄청난 충격적으로 다가 온 엄마의 죽음 이후에 오랜만에 만난 이 허무한 죽음 앞에서 다시 한번 머리가 울렸다. 그래서 나에게 봄은 역설 그 자체이다. 만물의 시작을 알리는 봄이 오히려 무섭게 느껴진다. 엄마의 죽음과 같이 친구의 죽음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봄이 되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 남들이 꽃을 보며 낭만을 즐길 때, 나는 단지 이 봄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봄을 보낸다. 바라건대, 이번 봄은 슬프고도 비통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