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이기는
시를 읽을 때, 간혹 한 문장이 왜 이렇게 나에게 꽂혔는지 모를 때가 있다. 단어 하나에 깊은 감명을 느낄 때도 있고, 정말 평범한 한 문장에도 눈물이 주르륵 흐를 때가 있다. 삶과 그 중심에 서 있는 내가 닥친 상황이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 시이다. 마치 음악처럼. 그런 의미로 몇 년 전에 본 이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라는 시집은 특히,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시는 내게 참 위로가 되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 것만 같은 언덕이기보다는 땀을 뻘뻘 흘리며 더워 죽을 것 같은 그런 언덕인 느낌이어서 더 그랬을까. 다음의 시를 소개해 본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 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 토끼 한 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 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돌이켜 보니 최근 몇 년 나는 미친 듯이 달려왔다. 나를 돌보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돌아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이 경주를 조금이라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저 멀리 점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뛰어야만 했다. 관계나 자기 계발, 취미 생활 혹은 별과 달을 보는 낭만까지 현실 앞에서 모두 뒤로 내팽개치고 살았다. 그러니 여럿의 죽음 앞에서 허무함과 동시에 많은 흔들림이 있었던 것이다.
친구의 죽음 후로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브레이크를 아무리 힘껏 밟아도 금방 멈추지 않는 것처럼 내 삶에는 일종의 제동거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 내 삶이 멈추고 있는 중이기는 할까 싶은 절망감도 든다. 혹시 이것이 우울의 시작이 아닐까.
그해 여름, 나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조금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차가운 현실, 그리고 스러져간 많은 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혹여나 피할 곳이 있을까 땀을 뻘뻘 흘리며 죽어라 올라간 한 언덕에서 펼쳐진 풍경은 시원함보다는 더욱더 뜨거운 태양뿐이었다. 아직 이 여름은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랬다. 내 삶에 켜진 초는 내가 함부로 끌 수 없는 것이었다. 고통스럽고 불안한 삶의 모습이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는 증거이리라.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과 함께 그동안 억눌려 있던 원인 모를 그 이상한 묵직함이 날아가 버렸다.
시의 화자는 언덕에 여전히 토끼가 많이 남아 있고, 곧 폭풍우가 온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고 전한다. 어떻게 읽히든 이 시의 화자는 내게 이렇게 묻고 있다.
‘얼마나 더 고통스러울 것 같니?’
쥐어박아주고 싶은 얄미운 화자의 질문은 촌철살인이다. 만약 이 느낌이 가슴이 뚫리는 관통상의 느낌이라면 이해가 될 것 같다. 정곡을 찔려 속을 들켜버린 느낌이었다. 적어도 이 시는 나에게 이렇게 다가왔다. 그렇게 그해 여름, 나는 슬픔을 이기는 방법을 배웠다. 앞으로 경험하지 못한 어떤 슬픔들이 찾아올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마다 언덕에 올라 이 교훈을 되새길 것이다. 뜨거운 땀방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