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방문
미국에 있는 동생에게 급하게 연락이 왔다. 코로나가 끝나갈 무렵이긴 했으나, 여전히 삼엄한 국제 사회 속에서 우리나라 역시 다르지 않았다. 열이 난다는 소식에 놀랐지만, 다음 소리에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감각 없는 발뒤꿈치에 상처가 나서 모르고 있다가 보니 썩어 가고 있다는 소리였다. 급하게 연차를 내고 공항으로 나갔다. 열은 다행히 잡혀서 공항을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초췌한 모습으로 나온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믿는 신을 잠시잠깐 원망했다.
삼성병원으로 급히 달렸다. 퇴근 시간이라 막힐 법도 했지만, 한시가 급했다. 교통법규를 잘 지켜야 함에도 나는 뵈는 게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응급실로 가야만 했다. 도착한 응급실에서는 코로나 검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계속해서 지체되었다. 많은 환자들을 지나 보내면서 우선순위에 대한 지나친 비판이 시작되었다. 그로 그럴 게 1월의 추위는 동생을 더 떨게 만들었다. 동생을 차로 밀어 넣고, 나는 응급실 앞을 서성거리며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언제쯤 들어갈 수 있는지 계속해서 물어봤고, 그제야 PCR 검사를 받고 음성이 나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새벽녘이었다.
동생의 차트는 이미 어마무시하기 때문에 응급의학과의 다급한 콜은 교수를 오게 했다. 감염내과 교수가 와서 한 번 보고 갔고, 일단 MRI부터 찍자고 했다. 항생제 투여를 하면서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염증이 꽤 깊이까지 퍼져 골수염이 의심된다고 했다. 뼈를 긁어내야 하는 수술이 필요해서 정형외과랑 상의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현재 1차 판독으로 다른 게 보인다고 했는데, 암이 의심된다고 했다. 암이라고 한다면 골육종 밖에 없었다. 말이 안 됐다. 이미 완치 판정을 받은 지도 20년이 넘었는데, 다시 암일 리가 없었다. 2차 판독 결과를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 시간이 억겁의 시간이었다. 응급실 복도 끝에서 쭈그리고 앉아 한참이나 울었다.
의사가 다시 왔다. 장애가 있는 동생 다리는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고, 뼈는 이미 기형화가 되어 있었다. 쉽지 않을 것 같다고 OS 교수가 말했다. 그리고 암으로 의심되었던 것은 암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검사 상 보이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뭔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암이 아닌 것만 확실할 뿐 정확히는 뭔지 모른다고 했다.
회사에 전화를 해 일주일 간의 연차를 내었다. 휠체어 생활을 해야 해서 보호자가 있어야 했다. 동생은 가라고 몇 번이나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행히 발의 상처는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릎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것 같은 동생의 표정을 보면서 계속 안타까웠다. 커다란 주사기를 가져와 한 두 번의 물을 빼고 하는 과정이 정말 쉽지 않았다. 어지간한 아픔은 다 참아 보았을 동생도 얼마나 아파하는지 끔찍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들을 왕창 읽었다. 언제나 늘 곁에 있었던 죽음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잠시 치워둔 죽음이었다. 언젠가 모든 이들은 내 곁을 떠나고, 나도 누군가의 곁을 떠난다. 그렇지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면 갑작스럽게 이별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닥치는 대로 읽고 쓰고 정리했다.
상처 난 곳과 무릎에 물 차는 것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서 퇴원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미 망가져 버린 신장 기능 때문에 한국에 남아 있기를 바랐는데, 결국 미국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남아 있는 나는 사실, 불안과 분노만 남았다. 한국에서 투석받는 게 더 나은 선택 같은데, 다시 미국으로 가 버린 선택을 존중하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화가 났다. 보통 일이 아닌데 말이다. 결국 그해 여름, 막혀버린 인조혈관으로 인해 다시 급하게 한국을 나왔다. 위험한 상태에서 빨리 스탠스 시술부터 받고 급하게 투석을 받았다. 추웠던 그해 겨울에 느꼈던 이 서늘한 잔혹함은 여름이 되어도 가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