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천
회사 내 파이프라인이 바뀌면서 약간의 정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당시 비정규직이었던 나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날아갈 수 있던 터라, 부서 이동을 자원했다. 역시 예상은 맞았다. 곧이어 닥친 해고의 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동한 부서에서는 맨 땅에 헤딩하는 격이라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나는 이런 종류의 경험이 있었던 편이라 배우는데 나쁘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재밌었고, 나의 방법이 프로세스를 만드는 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에도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몇 달을 주말도 반납하고 쉬지 않고 매달렸다.
용케 살아남은 내 전 부서 사람들도 회사의 내규에 따라 서서히 내가 있는 곳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때 남아 있던 중간 관리자들 역시 대거 이동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회사 내 정치세력들에 의해 살짝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때였다.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그동안 내가 해온 게 있으니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이었다. 게다가 부서 이동하면서 정규직으로 전환되었기에 그 가능성은 더욱 없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슬픈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었다. 당시 차장이었던 한 사람의 농간으로 나는 원래 있던 부서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인사이동에 회의실로 쳐들어가 따지기도 하고 하소연도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정치인들의 보편적인 대답과도 같았다.
하늘은 유독 밝았으나, 나를 위한 하늘이 아니었다. 즐거운 일이 있어 웃었겠지만, 그 모든 웃음은 나를 향한 비웃음으로 들렸다. 퇴사를 하겠다고 했다. 아주 조금 마음을 알아주던 다른 차장이 고민을 들어주었고, 한 달 휴직으로 협상을 했다. 그렇게 제주도에 처박혀서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하지만 답은 늘 같았다. 나가라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 회사의 스탠스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 뜨거운 곳에서 검은 옷이 하얀 옷이 되게 일을 하고 원하는 스펙을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는데, 알아주기는커녕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내쫓아 버리는 이 몰상식한 회사에 정이 뚝 떨어졌다. 당장 이 기간이 끝나면 사직서를 들고 가 그놈 면상에 꽂아주겠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봄에 뿌린 씨와 땀을 흘리며 일군 뜨거운 여름이 지나면 가을은 적당한 열매를 거두게 한다. 자연은 가끔 심술쟁이 같아서 엄청 많이 거두게 하고 엄청 적게 거두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몹시 씁쓸했다. 다른 이들은 저마다 수확을 하고 있는 이때에 내가 이런 대접을 받다니.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퇴사하거나 무너지는 것이 이 차장놈이 원하는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독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복귀한 이후로 날 보낸 차장은 자기편을 나누기 시작했고, 나는 사실상 적으로 간주됐다. 시급직인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데, 일부러 일찍 보내기도 하고, 일감을 일부러 늦게 주어서 욕을 먹게 하기도 했다. 심지어 다른 부서로 이동시키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10개월 간의 긴 싸움 끝에 남은 건 그 차장의 백기투항이었다. 나는 어느 부서에 가서도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음해하던 세력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자기 사람으로 쓰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계속해서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던 가운데, 그 차장이 퇴사를 하게 되었다. 회사가 아주 썩어빠지지 않는 이상, 횡포와 부당한 처사들은 낱낱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20대 초반부터 당했던 불의한 일들에 대처하는 방법이 이제 와서 결실을 맺었다. 가을은 그렇게 나를 매몰차게 배반하였지만, 이듬해 여름이 되었을 때 오히려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좌천은 모든 부서를 돌고 오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공장 내 모든 공정들이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하지 않고 죽기 살기로 열심히 했다. 나만의 것들을 만들고 채워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들어도 나를 다른 부서로 쉽게 보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무기가 되어 상사들과의 관계에서 알게 모르게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10개월의 시간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지만 돌고 돌아 살아서 온 나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삶은 정말이지 참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