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빵과 같은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도시의 어두운 곳에서 살았던 나는, 심지어 아무도 모르는 시골로 이사를 갔다. 7살도 되지 않았던 나는 지도상에서만 알 수 있는 사람이 사는지 의심이 되는 지금 이곳으로 왔다. 나의 의지는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 할 수 없으나, 내려온 이유도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외할머니와 살게 되었다. 바짓단에 흙 한 방울 튀어도 울고불고 난리 쳤던 내가 두엄 냄새와 수많은 가축들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는 게 그 어린 나도 몹시 싫었을 것 같았다. 엄마는 아픈 동생을 돌보려 서울 병원에 붙어 있었고, 눈 떠보니 사라진 아버지의 존재는 내겐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8살 초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고, 나는 다 쓰러져 가는 집에 가축과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90년대의 문을 열면서 태어난 내 또래는 물을 긷기 위해 마중물을 넣어야 한다느니 아궁이에 불을 떼야한다는 등의 옛 문화를 잘 경험하지 못하는 때였다. 하지만 대학에서 친구들과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면서 더 놀라움을 느꼈다. 그들은 나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전부 다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나무를 구하기 위해 온 산을 돌아다녀야 했다는 말이 솔직히 나도 믿기지가 않는다. 하교 후에는 소여물을 위해 꼴을 베러 다녔다. 아슬아슬하게 소 뒷발차기를 피해 다니며 배설물을 열심히 치워줬다. 이런 상황이 믿어지려야 믿어질 수가 없었을 테지, 서울깍쟁이들에겐. 서로 다른 경험이 충돌하니 나 역시 이해 못 하는 그들이 이해가 될 리 없었다.
제일 믿지 않았던 것은 반찬으로 새우젓이었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 할머니도 이른 아침부터 밭에 나가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밥상을 차려놓고 가셨다. 나는 일어나 밥을 먹고 등교를 했다. 몇 년 후 신작로가 생기면서 시간이 줄었지만, 아주 어릴 적 등교하려면 빨리 나가야 했다. 40분은 족히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식지 않게 잘 보관해 주신 뚝배기 밥그릇에 반찬은 새우젓. 간혹 간장이나 김치 같은 게 있었다. 아침마다 새우젓과 함께 밥을 먹고 다녔다. 근데 그게 꼭 싫지는 않았던 게 제법 맛이 있었고, 지금도 가끔씩 찾지만 할머니가 해주셨던 그 맛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다. 급식으로 나오는 휘황찬란한 반찬들은 내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에 좋았다. 그러니 집에서 먹는 새우젓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어린 나이에 비교는 당연히 생기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에게 새우젓은 눈물 젖은 빵 한 조각과도 같았다. 어쩌면 나에게 새우젓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너무 목이 말라 시디 신 석류를 먹어야 만하는 것과 같았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울컥할 때가 종종 있다. 성격 탓인지, 환경 탓, 상황 탓을 하지 않았지만, 하지 않았던 나를 후회한다. 누구에게나 힘들었고, 돌아가고 싶지 않은 때가 있다. 철저한 N의 소유자로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억만금을 준다고 하면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 나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차라리 군대를 두 번 가는 한이 있더라도 어린 시절 나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트라우마보다는 외롭고 추웠고 배고팠던 기억으로 가득 찬 어린 나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