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by 이뉴

날 때부터 가난했다. 흥부와 놀부를 보면서 인과응보를 배우기도 전에, 흥부가 나보다 잘 사는 것 같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가난의 저주를 끊은 위대한 사람들을 보면서 공부하고 또 실천했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길다면 긴 이 삶에서 여전히 기회가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글쎄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은 강한 확신이 든다. 내 평생에 달고 가야 하는 하나의 혹일 것이다.


재력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쫄딱 망한 집의 친구를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친구의 심정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이 무너지고 세계가 망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표현하는 그 친구의 마음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재력이 있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여기서 더 망하는 상황을 감히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위로와 공감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 모르는 그 친구를 잠시 떠올려봤다.


운이 좋았던 것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는 말수도 적은 아이였고, 집도 가난했고, 편모 가정이었으니 더욱 그럴만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나를 봐준 것인지, 왕따를 시키지 않았다. 줄곧 와서 장난도 쳐주고 말도 걸어주고 같이 놀자고 끌고 나가기도 했다. 참으로 운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왕따까지 당했으면 아마 나의 삶은 진즉에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차갑고도 냉혹한 현실 앞에서 걱정하고 두려워 떠는 것만 빼면, 가난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치유할 수 있다는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누구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돈이 많아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아서 온갖 세계선이 무너졌던 친구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공감이라는 건 경험의 차이가 크다.


없이 살면,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하게 된다. 어떤 말로는 자기 합리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자기 암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전적으로 맞다 하더라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현실 앞에 내던져진 하나의 연약한 실존이 버텨낼 재간은 없다. 하루라는 시간이 무척이나 힘들게 느껴짐과 동시에 정말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아, 나의 삶을 돌아볼 때, 나는 누구보다 단단해진 것을 볼 수 있다. 경험의 폭도 넓어지기에, 삶의 전 분야에 있어 많은 이들과 교류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때로는 그들에게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되기도 하며, 그들에게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순간순간, 가난하여 발생하는 위기들은 끔찍하게도 버텨내기 어렵다. 해본 사람들은 안다. 오늘도 많은 이들은 삶의 끝자락에서 버텨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말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는 않는다. 도저히 버텨낼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하자. 가난하기 때문에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고. 가난하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다고. 가난하기 때문에 옹졸해지지 않는다고. 가난이 주는 이 역설이 어쩌면 나에게 마지막 낭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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