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고 인류 대이동을 마쳤지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피로감으로 어딘가에서 애쓰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요즘은 예전과 달리 무조건 시댁 위주로 명절을 보내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쁜 일상 중에 누군가를 챙긴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평소에 대화가 많지 않던 분들과 갑자기 만나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누는 게 어색하기도 하다. 속으로는 걱정거리가 가득한데, 그저 "잘 지낸다"고 말하자니 목이 메고,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놓자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결국 "별일 없이 잘 지내요"라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짓곤 한다.
추석 전후의 스트레스를 남편에게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사람인지라 감정을 완벽히 숨기기란 쉽지 않다. 지방으로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이미 스트레스 수치는 올라간다. 아이를 챙기면서 정체 풀릴 줄 모르는 고속도로에서 같은 자세로 내내 네비게이션만 쳐다보고 있노라면, 터져나갈 것 같은 건 고속도로가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생리적 욕구다. 휴게소 화장실에서 줄 서는 일이나, 만원인 휴게소를 뚫고 아이와 함께 화장실 다녀오는 것도 만만치 않다.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차에 앉아있는 것, 가도 가도 끝없이 막히는 도로... 이 모든 게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그래도 이런 힘든 시간들을 견디고 나면 언젠가는 추억거리가 된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된다.
명절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부부 간의 양육 동맹은 강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위기를 맞기도 한다. 내 책 <엄마를 위한 멘탈 수업>에서 이 양육 동맹에 대해 다뤘는데, 같은 목표를 가지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를 점검할 수 있는 질문들을 제시했다. 그중에서도 '배우자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나요?'라는 질문이 특히 중요하다. 상대방의 말에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그 전조를 알아채는 것, 이를 통해 더 큰 갈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육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가이드> 엄마를 위한 멘탈 수업 P. 152~153
부부 관계에 대한 여러 흥미로운 연구 결과들이 있다. 이 연구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1997년 Geoff Thomas의 연구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Thomas와 그의 동료들은 부부들에게 인간관계에 대한 여러 주제로 토론을 하도록 했다. 이 토론 과정을 비디오로 녹화한 후, 각 배우자에게 이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특별한 과제를 줬다. 바로 영상 속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추측해서 적어보라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부부가 서로의 감정을 얼마나 잘 읽는지, 그리고 그 이해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측정했다.
연구 결과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랐다. 놀랍게도, 결혼 기간이 길수록 상대방의 감정을 잘 못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기간이 길수록 공감정확도가 떨어졌다. 즉, 신혼부부들이 오래된 부부들보다 서로의 감정을 더 잘 읽어냈다. 이 연구는 부부 관계에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오래 산다고 해서 자동으로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현 교수가 방송에서 인용한 연구 역시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준다. 이 연구는 결혼 1년 차, 5년 차, 20년 차 부부들을 대상으로 한 비교 연구에서, 20년 차 부부가 1년 차 부부보다 상대방의 감정을 정확히 읽는 능력이 떨어지느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오래 살수록 서로를 더 잘 알게 된다"는 통념과는 상반되는 결과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결혼 초기에는 상대방을 탐색하고 알아가려는 노력이 활발하지만, 오랜 결혼생활을 하면 이미 자신이 이해한 수준에서 상대의 반응을 뻔한 레파토리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눈빛만 봐도 안다"는 말은 사실 꾸준한 노력이 이어진 극히 일부 부부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멀어지는 시간> ⓒfreepik
이러한 연구 결과는 관계 전문가 John Gottman의 '애정지도(Love Map)' 개념과 연결된다. '애정지도'란 상대방의 취향, 감정, 관심사, 중요한 경험 등을 계속해서 알아가고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John Gottman은 배우자의 감정 상태를 읽고 공감하는 능력이 강할수록 부부 관계가 더욱 견고해진다고 주장한다.
최근 연구들은 비언어적 소통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예를 들어, 2019년 Sharon-David의 연구는 '행동적 동기화'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이는 호흡 패턴이나 발걸음과 같은 미세한 움직임의 일치가 부부간의 감정적 유대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걸을 때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맞춰지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통하는 것 같고 만족스러운 느낌이 드는 현상이 바로 이를 설명한다.
Burgoon 등(2021)의 연구는 비언어적 소통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이들은 머리의 움직임, 얼굴 표정, 목소리 톤 등 다양한 비언어적 요소가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피하는 자세는 긴장감을 나타내는 신호일 수 있다. 이러한 비언어적 신호를 잘 읽어내는 배우자는 상대와의 신뢰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고 한다.
디지털 시대의 소통 방식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Durbin 등(2021)의 연구에 따르면, 이모티콘을 활용한 메시지가 정서적 유대감을 높이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단순한 이모티콘 하나가 때로는 긴 대화보다 더 큰 애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세대 간 소통 방식의 차이도 지적한다. 젊은 세대의 부부들은 SNS나 메신저를 통한 소통에 더 익숙한 반면, 중년 이상의 부부들은 직접적인 대면 소통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국내 연구도 주목할 만하다. 권윤아, 김특성(2022)은 부부간 역기능 의사소통 행동 척도를 개발했는데, 여기서 몇 가지 관심있게 볼 만한 비언어적 신호들이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자주 이마를 짚거나 심호흡을 하는 것, 몸을 뒤로 젖히며 팔짱을 끼는 것 등이 불편함이나 방어적인 태도를 나타낼 수 있다. 반면 눈 마주침이나 고개 끄덕임과 같은 작은 제스처는 긍정적인 신호가 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비언어적 몸짓은 다문화가정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언어적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 이러한 비언어적 신호가 중요한 소통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명절이나 가족 모임에서 부부 간의 소통이 더욱 중요해진다. 특히 시댁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부부가 어떻게 함께 대처하는지가 관계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명절 스트레스를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보다는, 부부가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 자체가 관계를 강화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들을 종합해볼 때,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 비언어적 의사소통 모두 행복한 부부 관계를 위해 필요하다. 부부 관계는 끊임없는 학습과 노력의 과정이다. 오늘부터 배우자의 작은 변화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이를 위한 첫 걸음으로, 양육동맹 가이드 질문문항을 체크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도를 점검하고,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